윤한봉 구술녹취문 (3차)

윤한봉 구술녹취문 (3차)

■ 개요
구술자 : 윤한봉
면담자 : 박현정
면담주제 : 5.18 항쟁사 정리를 위한 인물사 연구
면담일자 : 2006년 2월 22일 오후 2시-5시 (3시간)
면담장소 : 두암동 자택
면담차수 : 3차

■ 상세목록
1.
1-1. 민중에 대한 개념
1-2. 정세분석
1-3. 복직. 복적결정과 토론
1-4. 광주항쟁에 대한 예감과 준비
1-5. 광주항쟁 발발과 피신
2.
2-1. 도피생활
2-2. 김대중
2-3. 귀국후 활동 - 518기념재단과 들불열사기념사업회
2-4. 정치활동, 정당에 대한 견해
3.
3-1. 요즘 근황
3-2. 518과 재단에 대한 평가
















1-1. 민중에 대한 개념

면담자 : (* 그 전에 했던 인터뷰 내용을 되짚어보면서 앞으로 이야기할 것을 정리하고 있는 중) 저번에 박기순 열사이야기까지 해주셨구요.
구술자 : 그건 이제 78년 이야기고. 아, 저, 맞아 78년 12월이지.
면담자 : 예, 그리고 극단 광대이야기, 마지막으로 해주셨던 광대 이야기. 방화사건 주모자로 되가지고
구술자 : 79년 들어가서
면담자 : 예, 그 다음에 박기순 열사. 그렇게 이야기하셨구나. 79년도까지. 예. 거기까지 이야기해주셨어요.
구술자 : 그래서 그러면 오늘이 2006년 2얼 22일 선생님의 마지막 인터뷰구요. 선생님 그래서 제가 518전까지. 79년부터 미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를 이야기를 들을까 했는데 이 책 (『운동화와 똥가방』)에 나와 있다면. 이게 미국까지, 귀국할 때 까지에요, 선생님? 귀국 다음에 이야기를 할까요? 아니면 그 앞 부분을 간단하게라도 다, 그런데 간단하데 되짚기가 어렵긴 한 대.
면담자 : 하여튼 80년 전. 80년 초 그러니까 내가 긴급조치 9호로 들어갔다가 박정희 죽고. 긴급조치 9호 해제되어 가지고 나온 이후의 이야기를 시작을 하죠. 그때가 79년 12얼 9일인가 내가 나왔어. 긴급조치 9호 해제로 최규하가 해제해서. 그러니까 나오자 나는 팔이 한쪽이 마비된 채로 고문 후유증으로 나와 가지고 내가 세 번째 구속되기 전에 부마항쟁이 있었다고 그랬잖애? 부마항쟁이 인제 나한테 엄청난 충격으로 왔고. 그래 전혀 예상치 못했으니까. 하튼 나뿐이 아니었지. 다들 충격이었어. 그래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가. 그걸 알아보기 위해서 현장을 방문하려고 마음 먹었다고 그때 내가 들어가서 고문당하고 감옥에 들어갔는데 그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었기 때문에 석방된 다음에 인제 시골에 가서 선산에 가서 성묘하고 집에서 며칠 있다가 며칠 있고 나니까, 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계속 탁탁탁하고 소리나게 두들김.) 1212 쿠데타가 일어난 거예요. 9일 날 석방됐으니까 한 3일 후였죠. 1212 신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거죠. 음...긴가민가들 모두들 했었는데 나는 그때 또 다시 시작이구나. 다 틀렸다. 그런 어떤 민주화에 대한 희망 같은 것을 상당히 나는 인제 접었지. 또 시작이다. 그러면서 이제 그 의문을 풀기 위해서 내가 부산으로 갔어요. 인제 부산 들러서 마산 들러서 이렇게 오려고 했는데. 부산 현장을 이렇게 왔다갔다 시위현장, 항쟁현장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 이야기도 좀 듣고 그리고 부산에 좀 알고 있던 친구들 이야기도 좀 듣고. 그래서 거기서 확연히 깨달은 게, 내가 그 동안에 운동에 뛰어든 이유는 민중이 어떻게 뭐가 어떻고 떠들었는데 나는 완전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민중에 빠져 있었다. 노동자들 농민이라든지 빈민이라든지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역사 속에 항쟁의 주역이었던 농민들. 이를테면 이제 갑오농민운동이라든지 의병항쟁이라든지 이런 차원에서만 이해했지 구체적인 우리 생활 주변에 하루하루를 그렇게 힘겹게 살아가시는 이웃집 아저씨 아주머니 할머니 할아버지들 우리 주변에서 있는데 이를테면 노동자나 농민으로 분류되지 않은 그 사람들 또한 민중이었는데. 그걸 인제 노동운동, 농민운동 이런 범주 속으로만 하고 생활 속 생활현장에서 살아 숨 쉬는 민중들을 놓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거예요. 그래서 아! 인제 마산도 갈 필요가 없다, 알았다. 내가 잘못 생각했던 거다. 내 인식이 잘못되었던 거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인제 돌아온 거죠. 광주로. 바로 우리 이웃들에 살아 숨 쉬는 민중들이 있었는데 노동자니 농민이니 이런 식의 범주 속에다 넣고 관념적으로만 이해를 했었다는 거죠. 인제 나중에 518로서 확인됐지만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활 주변의 갑남을녀 들이 들고 일어난 거죠. 그래서 이제 이걸 검증을 해야겠다. 내가 무얼 어떻게 잘못보고 있었는가. 그래서 어떻게 그걸 잘못보고 있었는가 알아야겠다 그래가지고 그냥 부단히 돌아다녔어요, 광주 전남지역을. 시골 버스 정류장에 앉아서 할아버지 할머니들하고 이야기도 나누고 목표 옛날 철선 다니는 용당 같은데 배타고 기다리고 있으면서 배 타려고 기다리는 거기 있는 아줌마들하고도 이야기하고. 광주 대인시장 양동시장 막 헤매고 다니면서 사람들하고 부대끼면서 그들의 표정을 읽고 그들과 기회만 있으면 말을 해보고 그러고 다니면서 인제 확인하는 것이 아, 확~실히 내가 잘못 파악하고 있었다. 그 동안에 인제 운동하는 우리들 스스로를 선각자 내지 선지자, 선구자. 노래에도 나오는. 해란강변에 말달리던 선구자 식의. 그리고 민중들이 안 따라오고. 우리가 앞서가면 언제가는 따라오겠지. 인제 이런 식의 교만방자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은 거예요. 완전히 그들 앞에 간 것이 아니라 멀리 떨어진 엉뚱한 곳을 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거예요. 그들 속에 들어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들 앞에서 섰던 것도 아니고. 그러면서 앞에서 선 것처럼 착각을 했고. 심지어는 (민중들이) 하도 안 움직이니까 더 고생을 해야 정신을 차린다는 그런 이야기도 있었는데. 더 당해봐야 할 거라느니 그딴 소리나 하고 있었는데. 아 잘못됐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죠. 그런 시각으로 이제 사람들을 보니까 정세분석에 있어서 예를 들면 현재의 농민운동이 어떻고 운동수준이 어떻고 뭐가 학생운동이 어떻고 기독교가 어떻고 종교계 움직임, 정치권 움직임 등 해가지고 우리 힘이 이 정도니까 어쩌고 저쩌고 이런 식의 정세분석을 하던 관점에서 벗어난 거예요, 내가. 그래가지고 이제 우리들 생활 주변의 민중들이 어떤 입장과 관점을 가지고 있는가 이런 것이 신경을 쓰게 될 수 밖에 없었죠. 그러고 보니까 이제 그들이 안 따라온다고 가만히 있다고 무릎 꿇고 있다고 욕하고 그랬었는데 그게 아니여. 그들이 지금 그 엄청난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들김.) 지진이나 화신을 예고하는 변화에 대한 갈망이 그 사회의 정치적인 사회 경제적인 변화에 대한 갈망이 엄청나게 뜨겁게 지금 솟구쳐 오르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 거예요. 그래서 이제 나의 정세분석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진행이 됐는데.

1-2. 정세 분석

인제 이 정세분석 이야기를 조금 해야겠는데. 내가 뭐 정세분석이나 뭐니 축산학과 다니던 내가 뭘 알아야. 운동도 갑작스럽게 뛰어들게 됐고. 그런데 감방가고 감옥살이 할 때마다 이제 많은 걸 느낀 것이 뭐냐면 서울 출신들 그리고 교회 관련자들이 재판할 때건 교도소에 있을 때건 면회 오건 그러면 듣고 와서 소식을 나누거든. 완전히 신문도 못보고 라디오도 못 듣고 할 때니까. 궁금하죠, 바깥세상이 어떻게 될까. 근데 서울 사람들, 면회 자주 오니까. 그 다음에 교회 쪽. 여기는 인제 해외 창구를 가지고 있는 유일한 세력이었거든? 교회쪽이. 다른 사람들은 여권이나 비자를 받아서 미국이나 유럽에 갈 여력도 없고. 경제력도 없고. 여권도 안주고. 인자 목사 신부 이런 사람들이 주로 많이 나가니까. 근데 야튼 한마디로 말하면은 재판받거나 교도소에 있으면서 정세분석을 주로 서울 중심으로 하는데 내용은 첫 번째 들어갔을 때고 그러고 두 번째 들어갔을 때도 그러고 세 번째 들어갔을 때도 똑같애. 뭐냐면 낙관적이야. 굉장히 밝아. 곧, 곧! 심지어는 새벽 3시. 4시. 그리고 곧 석방. 그래가지고 이번 삼일절에는, 딱!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침) 이번 815에는, 딱!(*테이블을 손바닥으로 침)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딱!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침) 인제 석방될 것이다. 그러고 인자 그렇게 미국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거예요. 인제 알지도 못한 놈의 미국 상원 의원 케네디가 중심이 되가지고 한국인권문제에 대해서 결의안을 채택해서 제출을 했느니 뉴욕타임즈에 뭐라고 나왔다느니 카터 정권이 어쩌고 저쩌고 해가지고 박정희가 코너로 몰리고 있어가지고 어쩔 수 없고 뭐 여당도 동요하고 있고 뭐 그냥 듣고 있으면 신문도 없고 방송도 없으니깐 면회 갔다온 사람들 이야기 들어보면 전부, 곧 이야, 곧. 그런데 100% 그 말을 안 믿지만 내가 모르는 이야기니까. 솔곳하니, 나간다니 싫어할 사람 없지. 곧 좋은 세상 온다는데. 새벽 몇시라는데. 근데 아니나(*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짐), 맨날 헛방이야. 틀려. 그럼 인제 김 팍 세지. 우울해. 그런 날은. 한번 두 번 그런 것을 겪고 나서 내가 내린 결론. 에엣, 나쁜 놈 시키들. 나쁜 놈들이라고 표현하기 보다는 엉터리들이지. 나는 인자 느그들 말 안 듣는다. 관심도 안 가져. 귀도 안 기울이여. 씨잘데기 없는 소리 하지마. 콱! 사람 김 빼게. 좋았어. 정세분석 내가 스스로 하겠어. 남이 해 놓은 거 듣고 앉아서 고개 끄덕끄덕 하고 기대 걸었다가 망신사고 그러지 않겠다. 그래서 정세분석을 내가 스스로 하겠다. 그런데 인제 내가 무슨 사회과학을 공부했던 놈도 아니고 내가 무슨 그런 쪽에 오랫동안 운동권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유신 쿠데타 때문에 갑자기 끼어든 놈이. 그래서 뭐 정세전망을 했다가 이럴 것이다 했다가 틀려불면 또 나만 망신되고 똑같지. 그래서 인제 혼자서 연습을 했어. 그래가지고 대외적으로 발표를 않고 속으로 이렇게 될 것 같다. 저렇게 될 것 같다. 이것 보면 이거 이렇게 이렇게 되니까 아마 이럴 것 같다. 그래가지고 인자 맞는가 틀린가 확인을 혼자서 보는 거에요. 한 번, 두 번, 속으로 그걸 계속 하다보니까 상당히 인제 맞아떨어져. 그 재미라는게 남에게 말을 안했지만 내 스스로 아~여지 없이 정확히 봤다. 다른 사람들이 다른 이야기를 많이 하거든. 먼저는 안해. 가만히 듣고만 있는 거야. 속으로. 슥, 나는 저렇게 생각 안하는데 저 사람은 저렇게 보는구나. 근데 누가 봐주면, 보자. 교수니 뭐 내 노라한다는 각 유명한 유명인사들, 서울서 내려 온, 모여 앉으면 주로 이야기가 그런 이야기지. 그러니까 서울서 내려온 놈들이 완전히 지방 촌놈들 데꼬 앉아서 못 들은 이야기, 뭐 안국동 윤보선씨 집 안방에서 누가누가 만났는데 어쩌고 뭐 어느 목사가 유럽을 산업선교회 관계로 갔다 왔는데 뭐가 어떻고. 여기서는 도저히 못 듣는, 언론에도 없는 이야기니까. 언론에도. 그냥 혹 해가지고 촌놈들이 이라고 듣고 있는 거지. 그때 당시에 일반적인 거였어. 정보의 집중이라는 게 권력의 집중이거든, 바로. 인제 서울이 완전히 그렇게 장악하고 있었던 거죠. 촌놈들이 그냥 헬렐렐레 해가지고. 와~미국의 무슨 인권목사가 왔는데 뭐라 뭐라. 그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니까 조용히 남아서 이야기를 들으니까 미국이 어쩌고 저쩌고 상원의원 몇 명이 어쩌고 어쩌고. 내 이야기하고 틀려. 그럼 인제 누가 들어맞는가 보자. 한번 두 번 어느 정도 자신이 생겼다고. 그것이 70년대 내내 지속이 됐어요. 긍게 내가 79년에 내가 대외적으로 내가 처음으로 인제 앞으로 이렇게 이렇게 될것이다 라고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했어. 그 동안에 내공을 좀 쌓아가지고 거의 맞았는데 그게 뭐 였냐면 이제 팔레비 왕조가 무너지고 이란의 혁명이 성공했을 때 이야기예요. 인자 미국이 심어놓은 어떻게 보면 강력한 말뚝이었는데 근게 이제 빠진거지. 팔레비 왕조가 미국으로부터 엄청나게 많은 무기 구입 계약을 맺어놨다는 것을 내가 신문에서 봤다고. 페르시아 영화를 꿈꾸는 인자 석유자본으로 팔레비가 이란이 완전히 중도 중심국가가 될 것처럼 야망에 불타있을 땐데. 글다보니까 이제 군사력도 엄청 강화하고 그러기 때문에 미국의 참 훌륭한 고객이지. 군수산업에. (*사모님께서 커피를 내오심. 면담자가 준비한 과자와 음료수도 꺼냄. 사모님께서 목소리가 쉬었다고 하시자 윤한봉씨가, 말을 이렇게 많이 해 본적없이 없어서 그렇다고 대답함. 일동웃음) 그래 인제 그랬는데 카터 정권이 들어서면서 주한미군 철수공약을 내세웠잖아요 인제. 단계적으로 철수하도록. 그러니까 정부에서 철수철폐 국회 결의안이 나오고 난리가 났지. 근데 나는 인제 딱 이란 혁명이 성공하자 주한미군 철수는 끝났다. 그렇게 이야기를 했지. 왜냐. 인자 사람들이 왜. 상당히 운동권이 들떠 있었다고 인제. 미군철수에 대해서 주장을 했었던 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런데 인자 미국 군수단의 입장에서 본다면 큰 고객이 하나 떨어져나갔다. 그러면은 당현히 그걸 대처할 새로운 고객을 찾을거 아니냐. 인자 무기라는 것은 만들어 놓은 재고를 파는 것이 아니라 견본만 내놓고 주문을 받아서 생산을 해서 파는 거거든? 인자 발주 생산이라고 그러는데. 그게 이건 이미 팔레비가 살려고 해놨던 최신 전투기부터 시작해서 많은 것들이 있는데 그걸 팔아먹어야지 않냐. 그라면 인제 결국은 어디다 팔 것이냐. 용도가 있는 곳에다 팔아야 햐난데 우리가 지도를 놓고 아무리 봐도 긴장, 군사긴장, 그래서 저놈이 때릴라고 하니까 너도 몽둥이를 들어라 식으로 어디 꼬드길 데가 있어야지. 그러다보니까 한반도다. 그럼 한반도 주한미군 철수 문제는 그만큼 한반도에 전쟁 발발 위험이 적다는 것을 전제로 한 자신만만한 것에서 비롯된 것인데. 인제 무기 팔아먹으려면 어떤 북의 남침, 또 북의 군사력. 북의 남침이 높고 북의 군사력이 강하다라는 걸 강조를 해야 팔아먹을 수 있는 건데. 미군 철수하면서 북이 강하다 북의 군사가 강하다 무기가 현대화됐다 그러니까 사라 할 순 없는 거 아니야. 결국은 철수 한다고 공약은 했지만 그건 백지화 될 것이다. 그리고 이란으로 갈 무기 우리한테 다 온다. 하니까 에~뭐 어쩌고 저쩌고, 철수에 대해서 이의제기했던 장군이 소장인가 준장인가 한 사람이 보직 해임되어 버렸다고. 저, 카터한테 대들었다가. 주한미군 철수 반대하고 그랬다고. 그런 분위기였는데. 그 사람이 무슨 참모장 이었는데. 어쨌든 그랬는데 이제 나중에 아니나 다를까 미국 뉴욕 타임스가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북에 갑자기 탱크 수가 막 인제, 예를 들면 천대에서 이천대로 나오고. 보병 사단이 전투 사단이 예를 들면 20개 사단에서 위성으로 확인한 결과 30개 사단이라느니 요상한 장난이 계속 나오면서 결국 끝에 가서 철수 중단!. 그 다음에 카터 와가지고, 오니까 뭐 인권 대통려이 오고 어쩌고 저쩌고 해가지고 뭐가 어쩌고 기대가 운동권에 잔뜩 들었는데 무기 팔아먹고 쌀 팔아먹고 갔지. 그때 이제 아~ 어쩌냐 내말이 맞았지. 그래가지고 드디어 내가 정세 분석을 대외적으로 하게 되고 인정을 받게 되었는데. 이제 그런 시각에서 부마항쟁이 나한테는 굉장한 의문이었던거죠. 왜 도대체 가능하지 않은 일이, 꿈에도 못 꿨던 일이 어째서 발생했는 가야. 그래서 이제 현장까지 가보고 그런 과정을 거쳤던 거죠. 그럼 내가 어떻게 뭣을 잘못 봤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돌아다니고 많은 사람들을 접촉하고 그래서 내린 결론이 이제 아,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치심) 광주가 터진다. 광주항쟁을 예감을 한 거에요. 그게 3월 말 경이에요. 그래가지고 인제 확신이 딱 선 것이 아, 광주 터진다. 간단한 거예요. 이 전두환 일당 12 12 쿠데타를 통해서 1단계 성공을 시킨이들이 절대 물러날 수가 없다. 다음 단계로 간다.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다, 군부가. 신군부가. 근데 이제 변화를 갈망하는 70년대 내내 민주화의 열망을 키워 온 각계각층 인제 그 절망의 분노가 있는 거죠. 절망하게 되면 분노하게 되고 폭발하게 되는데. 근데 그런 상황에서 광주가 가장 그 열망이 컸기 때문에, 변화에 대한 어느 지역보다 컸기 때문에. 차별과 소외, 빈곤의 대표적인 곳이기 때문에. 여기서 충돌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충돌하고, 무조건 진다. 어떻게든, 피바다가 될 것이다. 이런 식의 논리였죠. 그럼 이걸 어떻게 하느냐. 대책이 없어, 대책이. 왜냐면, 내가 내린 답이 막을 수도 없고 이것을. 그렇다고 이 항쟁을 지도할 능력도 없고. 광주 사람들이. 운동권이라고 하는 게. 그러니까 조직되지 못한, 봉기의 항쟁이 실패할 수 밖에 없다. 필연적으로. 광주가 피바다에 잠긴다. 그렇게 된다. 이, 우려가 몇 번을,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다시 정리해보고 정리해 봐도 정세전망이 그렇게 나오는 거라. 인제 터진다. 그래갖고 광주는 피바다에 잠긴다. 그 불안 속에서 인자 80년이 된 거에요. 80년 초에 그 즈음해서도 뭐 불안 속에서 걱정만 할 수는 없으니까. 일은 해야겠다. 대표적인 게 이제 현대문화연구소가 중심이 돼서 적극 밀었던 게 극단 광대 조직사업에 이제 1월에 80년 1월에 결성을 했어요. 박효선 중심으로. 인제 극단 광대를 만들었는데 하튼 풍물 하나도 없는 거예요, 인제. 그걸 일체 내가 투자를 해서 샀어. 연구소에 놔두고 활동하라고. 그래가지고 창단 공연을 하자. 그래가지고 인제 그때 당시에 돼지값 폭락으로 시골이 난리가 났었거든. 돼지 새끼를 팔러 갔는데. 하도 형편없는 가격으로 팔려고 하니까 집에 도로 가지고 오다가 사료 걱정 때문에 자기 집에서 내리면서 돼지를 차 안에 두고 내려버리고 막 그런 정도였으니까. 하도 똥값이 돼가지고. 이 돼지값 폭락 문제를 소재로 해서 하자 그렇게 한게 돼지풀이를 마당극으로 한 것인데 그때 3월에 YMCA에서 첫 공연을 했는데 대단한 성공이었어요. 농민단체들 초청해서 공연도 하고 얘기도 하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그랬고. 그런 강연회 등등 이것 저것 조직강화하고 인제 전남민주청년협의회 옛날 구속자협의회가 발전해가지고 한건데 전남 민주청년협의회 조직강화를 위해서 이를테면 감옥에 안간 사람들도 가입을 시켜서 박효선이. 나중에 항쟁지도부에 들어간 정상용, 이양현 이런 친구들이 회원으로 받아들이고. 내가 어려운 시기라고 날더러 회장 맡으라고 해서 맡았는데 그렇게 하고 아주 다양한 조직강화 작업이 이루어지고. 그때 당시 광주 노동운동도 상당히 활발하니. 또 10.26 이후에 전국적으로 노동운동이 굉장히 활성화됐어요, 인제. 그래가지고 잘 아시겠지만 사복 봉기가 터지고 동국제강 부산 노동자들이 대 투쟁을 하고 이런 분위기가 있었고. 농민운동 쪽만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결정을 못하고 주책바가지로 농민운동 지도자들 중에 일부가 광주같은 경우는 전남같은 경우는 서경원씨였는데 총선에 출마할라고 해가지고 그것 때문에 되게 싸우고 그랬는데. 우리는 인제 미쳤냐고 막고. 그럼 그 운동하는 사람들 다들 아 저 새끼들 정치 할라고 운동했다 그런 소리 들을 거 아니냐. 왜냐하면, 카농(카톨릭농민회) 회장인데 그냥, 막고 그랬는데. 그런데다 정신을 쏙으니 이게 일들이 제대로 안돼지. 농민운동단체들하고 많이 이야기를 해가지고 농민단체도 그때가 5월 19일날 대규모 시위를 광주에서 하기로 그렇게 결정이 되가지고 전남대학교 학생들도 함께 연대투쟁을 하기로. (그런데) 그때 이야기들이 상당히 재밌어요. 농민들이 인제 분무기에다가 농약을 독~하게 타가꼬
구술자: 농약이요?(*놀라우면서, 어이가 없어 모두 웃었음)
면담자: 이거 분무기로 그래가지고 최루탄에 맞선다고 해서. 아조 전남대 학생이랑 뭐 해갖고 대규모 시위 준비를 하고 그랬어요. 그럼 고놈 맞아불면 최루가스하고 달리 죽, 병원에 입원해야지 인제. 독한 농약응ㄹ 뿌려 불면. 전경들. 하여튼 그런 준비를 해나가는데 나는 계속적으로 불안한 거예요.

1-3. 복지, 복적 결정과 토론

그리고 그 사이에 무슨일이 있었냐면 이, 최규하 정권이 제적됐던 학생들하고 해직됐던 교수들, 복직 복적 결정을 한 거예요. 희망자는 다 받아준다. 그래가지고 인자 또 우리나라 학생운동 사회운동이 한번 요동이 쳤는데. 전국적으로 복학, 복직이 허용되니까 토론 한 번 없이 그냥 물밀 듯이 학교로 다 들어가 버렸어. 짤렸던 친구들이. 모든 대학에서 다. 근데 인제 유일하게 전남에서만 그 문제를 가지고 심각하게 토론이 벌어졌죠. 고민을 하고. 그래서 나는 인제 복학 반대를 입장이었는데 논리는 간단했어요. 뭐냐면 그동안의 학생운동이 인제 제적당하고 투옥당하고 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학교에서 쫓겨나 버린 거죠. 학생들이. 그러니까 운동의 무대를 필연적으로 이제 사회로 옮긴 거죠. 그래서 사회운동에 어떻게 보면은 일익을 맡은 거에요. 노동운동 농민운동아 아니라 학생운동들이 나와 가지고 교회라든지 출판 등등을 통해서 문화라든지 언론사에 들어 간다는지 학원에 강사로 들어간다든지. 운동하는 사람들이 다양한 분야로 들어가면서 현장투신도 일부 있었고 그래가지고 사회운동을 활성화시키는데 학생운동이 큰 역할을 한 거에요, 인제. 학생 운동 인자들이지. 제적된 사람들이. 인제 광주전남지역만 해도 이학영이도 위장취업해가지고 서울 올라갔도 나중에 남민전에 가담하고 그랬는데. 박형선, 이강은 민청세대들인데 농민운동에 투신했고 야에 형선이는 지게지고 농촌으로 들어갔고. 이런 분화들이 일어 났고. 이향연이는 노동운동, 그러니까 사회활동이 활발한 활동을 했는데 그러고 이제 우리가 농민 운동하는 사람들, 노동운동 하는 사람들하고 접촉해보면 학생들, 먹물들 안 믿어요. 불신을 해. 그러니까 한쪽으로는 부러워하면서도 한쪽으로는 미워하는 그런 미묘한 것이 있었는데. 불신. 너희는 달라야. 계급이. 너희들은 언제든지 먹고 살 걱정을 안해도 되는 사람이지만 우린 여기 떠나면 죽는다는 것이자. 그래 그 사람들하고 대화하고 연대하기 위해서 많은 별 노력들을 했거든요. 내가 저번에 이야기했던 쌀 생잔자대회 때 밥 한다든가 이런 것이 다 이런 노력의 일환이거든요. 우리는 하나다. 함께 하자. 그렇게 해서 또 신뢰를 쌓아갔고 함평 고구마 사건 단식 때 그렇게 뒷바라지하고 참여하고. 근데 이제 그렇게 해서 우리는 하나다 같이 죽고 같이 살자. 노래도 같이 부르고 그랬는데 노동자, 직장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하다못해 학원 강사들에 대해서는 복직 복적이 안되는 거에요. 그러면서 정부에서 교활하게 학생들에 대해서는 복학, 제적 해직된 교수들에 대해서는 복직 허용을 한 거에요. 특혜를 준거지. 근데 그건 정치적 속셈에 뭐냐면 분리를 시키는 거예요. 연대의 틀에서. 분리를 시킨 거죠. 복학 복직들 결정하니까 우우 다 들어가버렸어. 인제 광주에서는 심각하니 그 문제 가지고 모여서 토론을 했어요. 그래가지고 학원으로 돌아가서 학생운동을 계속 하겠다는 마음을 굳힌 사람은 복학을 해라. 남아서 사회운동을 계속 할 사람들은 복학하지 말고 남자. 그래서 이건 강제할 수 없는 것이니까, 그러고 우리가 무슨 철혈조직도 아닌데 조직결정으로 해서 강제할 수도 없으니까 자유선택을 하도록 하자. 그래서 돌아가면서 자기 입장을 밝히기로 해 가지고 나는 복학하겠다, 돌아가서 난 싸우겠다. 나는 남겠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나는 졸업장을 받고 직장도 잡겠다. 인제 이런 사람들이 나오고 그랬는데 그래갖고 나 포함해서 한 5명 정도 남았어요. 나머지는 들어가고. 그러니까 인자 학원으로부터 자유로워 진 거죠. 상당히. 복학을 안 하니까. 70년대 운동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인제 전국 각 지역 간의 정보 교환이라든가 유대의 틀이 만들어졌는데 그것이 또 인제 작동을 해서 이를테면 인제 가끔 모여서 서울에서 모여가지고 대구 쪽에서 부산 쪽에서 전북에서 전남에서 서울, 경기쪽 이런 데서 한 두 명씩 모이는데 이번에는 419를 앞두고 학원가에서 가두투쟁, 가두진출을 해서 시위를 하는데 구호는 뭘로 하자. 성명서 내용은 이러이러한 형식으로 하자. 요런 어떤 뭐랄까 전략전술도 논하고 정보도 교환하고 그런 자리들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는데 그게 이제 4월 10일경에 인천에서 했는데. 박귀연인가? 이름은 여기 책자에 나와 있어. (『운동화와 똥가방』책자를 가리킴) 서울에서 인제 여러 명이 나왔지. 그 다음에 인제 광주에서 내가 가고 전북에서 최인규라고 지금 와서 보니까 목사님이든데. 대구에서 백선우 오고. 다 내책에 있어요 모였어 인제. 근데 그때 인제 전국적으로 가두투쟁이 인제 가두진출이 각 대학마다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을 땐데 전남만 안 움직일 때야. 가두로 안 나오고 있을 때. 우리보고 왜 가두진출 안 하냐고. 근데 전남대는 복학생들 중심으로 해가지고 재학생들하고 똘똘 뭉쳐가지고 어용교수들 퇴진운동을 내걸어서 그걸로 해서 학생들을 묶으로 있었을 때였어. 교수들은 교수들대로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어용교수백서도 내고. 정보교환 해 가면서 안팎에서 서로 함께 하는데 그때 4월 10일 날 모였을 때, 모두들 다 이야기 하는데 이번 419에 전면철폐를 내세우자 말자부터 그런 소리를 하고 앉아있는 거에요.

1-4. 광주항쟁에 대한 예감과 준비

내 입장에선 광주가 피가 보이는데 쓰잘데 없는 소리만 하고 앉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지. 한가롭게. 그래서 내가 회의 말미에 이대로 회의를 끝내선 안되겠다 그래서 잠깐, 잠깐, 결론 내리기 전에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광주전남은, 그때만 해도 광주라는 말은 없지, 전남이지. 전남은 지금 이러이러한 상황이다. 터진다. 그러고 어차피 신군부하고 부딪힐 수 밖에 없다. 부산마산에서처럼 피가 흐른다. 근데 엄청나게 흐른다. 대책을 세워라. 광주만 터지면 작살 나분다. 적의 힘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타 지역에서도 같이 쳐 줘야한다. 인제 그 논리지. 그런데 뭐 4월 10일인데 아무도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아. 뭔 쓸데없는 소리 한다느니 회의 분위기 깬다느니 여 다른 나라 이야기 하고 앉았다느니 그런 식으로 우스워 보인거지. 내가 잔뜩 다급해가지고 그래도 지방에서는 부산은 부마항쟁으로 피해를 많이 봤으니까 대구가 그래도 가장 강하지 않냐. 광주 이쪽 빼면은. 대구 운동 쪽에서 맞받아쳐줘라. 광주만, 전남만 터져가지고는 박살나분다. 그러니까 백영욱씨 아~우리도 어쩌고 저쩌고 함시롱 먼 말인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인제 우물우물하고 넘어가 버리죠. 그래서 하여간에 고민들이 해란 말이야.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근데, 아무도 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더라고. 돌아와 가지고 아예 4월 달부터 본격적으로 사람들한테 그 이야기를 했어. 개똥이를 만나면 이 이야기, 또 두 셋이 만나면 이 이야기. 아무도 내 이야기에 귀를 안 기울이고. 아 쓸데없는 소리 왜 자꾸 해싸요, 아이고 그런 날이 좀 왔으면 좋겠조 내가 봤을 때는 어림 반푼어치도 인자 어림없다 이거지, 민중들이 무슨 들고 일어나야 그거지. 우리가 뭐 부마항쟁은 예측이라도 했었냐. 아 그건 어떤 특수한 조건 속에서 이루어진 거지, 아이고, 여기는 어렵다고. 인제 그런 사고 특히 부마항쟁을 이야기할 때 어떤 입장이 있었냐면 일부 운동권에서. 그때 당시 인제 이란 혁명을 계기로 한 석유 오일 쇼크라고 그러지? 석유파동이 나니까 세계무역이 엄청 위축이 됐지. 그래서 이제 수출로 먹고 사는 이 나라에 정면으로 타격이 와 불고 그래가지고 부산지역에 수출물량이 떨어져버려. 또, 마산수출자유무역지대도 마찬가지고. 가동률이 떨어지고. 인제 부산의 항만 노동자들이 일감이 없는 거지 인제. 부산 경제가 휘청 휘청하고 마산도 마찬가지고. 그런데서 실업, 그 다음에 수입 감소 이런데 허덕이고 있는데 인제 김영삼이를 국회의원직에서 제명을 했잖아, 그때 국회의원이었는데. 그것이 인제 계기가 되어가지고 화가 나서 인자 확 일어났던 거다 이런 식의, 어쨌든 부마항쟁도 주역은 학생들이 뛰니까 거기에 생활 속에서 불만을 가지고 있던 부두 노동자들 등등 실업자들이 참여해서 그렇게 된 거다. 그런 정도로 분석을 하고 있을 때지. 거기도 마찬가지, 생활 속의 수많은 대중들은 빠져버린거지. 거기도 항만 노동자 전위적인 학생 이런 식으로. 광주는 그것도 없다. 광주는 뭐 공장다운 공장도 없으니까 노동자도 없고 뭐 수출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그런 산업구조도 아니고 뭐 어쩌고 저쩌고. 그래 인제 그러다가 5월 5일 날 그때 내가 이야기했던 민주가족야유회라는 걸 인제 하게 된 거죠. 그래가지고 그때 식영정으로 갔어요. 광주호 위에 있는. 거기가서 한 오십명 갔어요. 가족들이 많으니까. 인제 그 자리에서 모두들 인자 진달래는 피지 그러니까 인자 기분들 좋아가지고 모처럼 그러고 있는데 내가 인자 또, 나는 인자 어두운거지. 이게 맨 피만 보이는데. 지금 우리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노래 부르고 있을 때가, 휘파람 불 때가 아니다. 광주 터진다. 그러고 인자 내가 거기서 피바다, 피바다라는 말을 썼거든요. 2천명 이야기를 했는데 광주가 피바다가 된다. 한 2천명 죽는다.
면담자: 아 숫자까지?
구술자: 숫자까지 그때 나도 모르게 이야기 나와버렸는데, 신들렸다고 그러는데 (*웃음)
면담자: 그러니까, 돗자리 까셔도 될 거 같은데요 (*웃음)
구술자: 틀림없이 터진단 말이야. 그러니깐 다들 또, 지금도 안 잊어버렸죠. 정상용이 그 친구도 그렇고. 아이고 형님, 야유회까지 나와 가지고 피 이야기를 하요. 아이고 형님 징하요, 왜 그러요? 안 받아줘, 안 따라줘요. 인자 그라고 돌아왔어요. 근데 이제 안 되겠어. 나라도 생각해야지. 그래가지고 그 당시에 인자, 요즘은 지도가 아주 세밀한 지도까지도 나오는데 당시에는 만 오천분지 일 지도를 가지려면 신분이 확실한 사람 외에는 그걸 못 사게 되어 있었어. 살 때. 단파 라디오 사는 것하고 비슷해가지고. 그 지도를 인제 박화강씨, 그때 광주매일인가 있었는데 지금 한겨례 지국장 하다가 그만 뒀는데. 그 화강이 형한테 부탁을 해가지고 내가 만오천분지일 광주 지역 지도를 구해가지고. 나는 간단했어 아주. 아주 간단한 논린데 상징적으로 어차피 깨진다. 깨지기는 깨지는데 피바다에 잠기는데, 부산마산처럼 막 왁 일어났다가 그냥 갑자기 꺼져버리는 식으로는 피해만 크고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깨지더라도 정치적으로는 그걸 성공을 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제 도청을 장악을 해야 한다. 최후까지 싸우다가 깨져야지 그렇지 않으면 부마항쟁처럼, 들불처럼 번졌다가 갑자기 꺼져부렀거든. 응? 그러니깐 그게 이젠 역사적으로 어떤 후속 항쟁이 이어지지 못한 거예요. 정치적으로 실패를 해 버렸기 때문에. 도대체 뭘 주장했는지 명확하게 안 나와불고. 그래서 이제 도청을 장악을 하고 끝까지 항쟁을 해야 한다 그것이 내 지론이고 깨지더라도 정치적으로는 승리를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차피 저놈들이 군분데, 무기를 발포를 할 건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 이쪽에서도 무장을 할 수 밖에 없다. 무장을 하기 위해서는 이제 총, 다이너마이트 이런 무기들이 필요하지 않냐. 그러니까 예비군 무기고가 어디가 있고 이, 다이너마이트는 어디에 있구나 이런 것들 좀 파악하고 도청을 어떻게 점거하기 위해서 도정 주변의 도로를 어떻게 어디 쪽으로 몰려들고 포위를 해야 하고 등등 고런 작전도 세우고 좀 그래야겠는데. 그래서 이제 지도를 구한 거예요. 지도를 구해가지고 이를테면 지원도, 지금은 소태동 쪽인데 거기 나가다보면 거가 채석장이 있었어요. 다이너마이트 창고도 있고. 현장 답사도 하고. 양림동 파출소 뒤에 있는 무기고부터. 이런 것들을 확인하고 다니면서 내 나름대로 성명서를 대 국민용, 그 다음에 국제사회를 상대로 해서 아 우리는 처절하게 싸우다 깨진다. 한국인들 민주화를 위한 몸부림을 너희는 잊지 말아달아. 인제 이런 내용으로 해서 국제 사회에 호소하는 내용 또 크게는 두 가지로 성명서 초안을 구상을 하고. 그러니까 뭐냐면 조직이 비극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막을 수도 없고. 지금 하지 맙시다, 한 일 이년 기다렸다가 합시다 할 수도 없는 거고. 또 터지더라도 조직적으로 이걸 지도해낼 힘이 없는 거야. 그러니까 어떻게 하든지 여하튼 피해를 줄일 수는 없지만 피해에 따른 정치적인 성공은 거둬야 할 것 아니냐. 피 값으로라도. 근데 그런 입장이었지. 그래서 이러이러한 내용으로 혼자서 준비하고 다녀요. 그러다가 5월 1일 날 지금은 그 양반이 아바타 쪽...
면담자: 전홍준 선생님이요?
구술자: 응, 전홍준 선배지. 그때만 해도 의사였고. 근데 전홍준 선배는 광주에서 그 양반이 월남 파병 반대 운동 전개하다 감옥에 갔던 분인데, 선구자적인 분이지. 60년대에 그랬으니까. 그 양반이 인제 아버지가 월북 가셨기 때문에 그 사실 알고부터 운동일선에서 조금 빠진 거예요. 왜냐면 자기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옆에 사람까지 죽이게 되니까. 그런 선구자였는데. 그 양반이 애기 돌인가 백일인가, 나는 애기 돌 하고 백일하고 헷갈려가지고. 하여간에 식사나 하게 오라고. 그래서 거기에 간 사람들이 인제 8명이 갔어요. 8명이 갔는데 그걸 8인 모임이라고 그러는데. 나하고 정상용, 정용화, 이양현, 윤강옥, 김영철이 박용준이하고 윤상원이하고 이렇게 해가지고 8명이었어요. 인제 윤상원이는 항쟁 지도부 하다가 죽었고. 용준이도 시민군으로 27일날 YWCA앞에서 죽었고 영철이는 항쟁지도부 기획실장 하다가 고문의 후유증으로 18년간 정신과 치료받다가 죽었고 정상용은 항쟁 지도부 외무위원장 맡았고. 윤강옥이는 기획의원했고 이양현이도 기획위원이었고. 정용화는 인제 현대문화연구소에서 저, 했는데 정용화하고 나만 그날 광주를 빠져나왔던 거죠. 6명이 참여하고 그 중에서 결국 3명이 죽은 셈이 됐는데. 어쨌든 간에 그라고 앉았을 때 인제 그 자리에서 내가, 그때 막 민주화 성회가 진행되고 있을 때에요. 14 15 16일까지. 내가 그 이야기를 또 꺼냈어요. 지금 이라고 있을 때가 아니다. 광주 터진다. 대책 세우자. 또 이야기를 꺼냈는데 처음으로, 그 이야기 자세히 좀 해주쇼 이런 반응이 터져 나온 거예요. 처음으로. 그전에 나오자마자 또 쓸데없는 소리 한다고. 핀잔주고 그런 놈들이. 그래서 인제 쭉 설명을 했죠. 인제 월요일날, 그때가 5월 20일 국회가 소집이 되어 있었어요. 임시 국회가 하튼 21일인가 소집이, 21일. 임시국회가, 그 임시국회에서 김종필 공화당까지 포함해서 개헌해제 결의안응ㄹ 제출한다고 신문에까지 났어요. 합의가 됐어. 정당들 사이에. 근게 모든 정당이 합의한거지. 신군부 빼고는. 그러면 인자 국회에서 결의를 하게 되면 해제를 해야 하거든. 계암해제를. 계엄해제하게 되면 신군부가 물러나게 되는 거죠. 그럼 신군부가 물러난다는 것은 곧 죽는 일이여. 왜냐면 12.12때 이미 그 사람들은 너무 많은 법을 어겼기 때문에. 상관살해부터 시작해서 명령 불복중부터 완전히 반란이었으니까. 군사반란. 그럼 어느 놈이 죽을 짓을 하겠냐 이거죠. 안 물러난다. 고로 21일날 아니면 25일 그 정도로 내다 봤어요. 21일에서 25일 사이에 전면적인 쿠데타가 일어난다. 그래서 완전히 군사독재로 체제를 갖춘다. 전두환 일당이 완전히 잡는다. 그러면은 인제 광주는 터진다. 제일 먼저. 그러면 박살난다. 깨지더라도 정치적으로는 승리를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이러이러 해야한다. 이 이야기를 죽 한 거예요. 그러면서 이래도 내 말이 감이 안 잽히냐. 난 인제 안타까와서 그래서 아, 진지하게 인제 형님이 왜 그런 이야기를 그 동안에 했는지 조금씩 감이 좀 잡힌다. 그래서 나는 인제 신이 났지. 그래서 그러면, 인제 구체적인 이야기를 또 해야 하니까, 한 번 더 모이자. 내가 연락하겠다. (왜냐하면) 남의 집이고 어떤 계획된 모임 자리가 아니니까. 홍준이형이 들락날락 하면서 음식 가져다 나르고. 그 대신 언제 어떤 일이 터질지 모르니까. 우리는 조심을 해야 한다. 그리고 죽더라도 깨끗이 죽어야 하니까 목욕하고 속옷 갈아입고 쓰잘데 없는 문건 같은 것들 사진 같은 것들 전부 치우고 죽을 준비 하라고. 그리고 집에 들어가서 자지 마라. 먼 일이 터질지 모른다, 지금. 내가 봤을 때는 하루하루 상황이 우리는 살얼음판에서 살고 있다. 언제 얼음 꺼질지 모른다. 집에 들어가서 자지 마라. 신신당부를 했어요.

1-5. 광주항쟁 발발과 피신

그러고 다시 연락하마고. 그래 가지고 그날 모임이 끝났는데 그 이틀 후에 17일날 밤에 기습을 당한 거예요. 그러고 나서 나는 인제 그 말 그대로 이미 준비 다하고 있었어. 목욕도 하고 문건들 싹 사지도 싹 치워버리고 집도 뭐 내가 한 곳에서 다니던 사람도 아니고 동가숙서가식 하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냥 이집 저집 갔는데 17일날 19일에 있을 농민시위, 대규모 시위에 맞춰서 준비하기 위해서 농민회 간부들이 다 광주로 올라왔어요. 구례 최성호씨부터 시작해서 함평 각지에서 올라왔는데 그래갖고 그 사람들이 인제 카톨릭센터 같은데서 모여 앉아서 구호, 피켓 포스터, 프랭카드 뭐라고 쓸 것인가 논의하고 학생들 학생들대로 연대 시위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고. 그 문제 갖고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인제 연락이 왔어. 서울에서 서울역 회군 이후에 전국 총학생단들이 전부 이대에서 모여서 회의를 하는데 거기를 인제 신군부가 급습을 한 거지. 그래서 많이도 잡혀들어갔는데 용케 관현이랑은 피했다고. 그 소식을 들었지. 아 이놈들 벌써부터 움직이기 시작하는구나. 이 정도로 생각하고 그날 저녁에 나는 농민회의 간부들 최성호씨하고 누구 세명하고 정용화 내 후배하고 그 농민운동 간부들이 왔는데 광주에서 돈없는데 여관에서 잘 수 없을 테고 그러니까 문병란 선생님 집이 있으니까 문선생님 집가서 잡시다 그래가지고 농민회 간부 두 세명하고 용화하고 나하고 문병란 선생님 집에 갔어요. 가서 그때 12시가 다 되었을 땐데, 11시가 다 넘었을 텐데 티비를 보고 있는데 그때 인제 그 미스 월든가? 여자들 수영복 입고 왔다 갔다 하고 그럴 때인데 아니 후보를 선발할 땐가 하여튼 그거 비슷한 거였어 하여튼. 그래가지고 그거 보고 있는데 밑에 자막에서 계엄정국확대, 의회해산, 휴교령, 이게 나온 거에요. 그런데 그 전에 인제 전국 각 대학들이 만약에 휴교령이 내리면 그 다음날 몇 시까지 돌멩이 들고 그 앞에 모인다 약속들을 다 했었지. 그런데 이제, 딱 자막이 나오자마자 전화벨이 울리는 거예요. 열두시 되기 전이여. 인제 광주에서 집에다가 전화 놓고 있는 사람이 문병랑 선생 송기숙 교수 황석영씨 세 사람 밖에 없었어, 당시에는. 그리고 텔레비전 많은 집도 그렇게 많지도 않았고. 흑밸 텔레비전지만. 우리야 뭐 집도 절도 없는 놈들이니까. 그라고 인자 전화를 받으니까 누구 잽혀갔습니다. 깜짝 놀라가지고 조금 있으니까 또 누가 전화하고. 그러니까 여기저기 연락하다가 전화가 된 거예요. 형님 지금 눈에다 불을 쓰고 찾고 있습니다. 누구 잡혀 갔습니다. 근데 형선이, 내 매제지. 내 매제는 사업하느라고 보성건설에 들어가 가지고 사업한다고 뛰어다니고 있는데 갸가 잽혀 들어갔다고 하고 김상윤이 잡혀갔다고 하고. 근데 나는 뭐 안 듣고도 사업하고 있는 놈을 잡아갈 정도면 다 잡아간거다. 기습 당한거죠. 아 이거. 와 눈 앞에 캄캄해져불죠. 왜 그냐면 기습을 예측을 못했으니까. 뭐 뜬 눈으로 밤 새우고 새벽에 이제 집에서 빠져 나가 가지고 시내 용화 후배네 집에 가서 잤어요. 안전한 곳에 가서 동태를 살펴 보니까 엉망이지. 다 잽혀들어가불고. 전대 조대 할 것 없이 전부 접수되버리고 학생회 간부도 일부 도망가고 일부 다 잽혀불고. 긍게 인제 박살나분거야, 박살이. 아무 준비없이. 와 그때처럼 내가 후회스러웠을 때가 없었어. 왜냐면 나는 21일부터 25일로 봤지, 17일날 밤에 당할 것을 생각을 못하고, 기습에 대해서는 예측을 못했거든. 그래가지고 19일날 아침에 새벽에 빠져나갔지, 광주로. 뭐 인제 연락할 길이 없는 거야, 다 잽혀 들어가분 것은 파악되었기 때문에. 그때만 해도 전화도 없을 때고 전부 뭐 단칸방 자취하고 그랬는데 그래서 이제 나주로 가 가지고 나주에서, 도피하면서 몰려다니는 것은 바보짓이니까 용화는 어떻게 할꺼냐고 물어보니까 친구네 집에 돼지 키운다고 그럼 그쪽으로 가라 나는 일단 서울로 가서 보고 다음 대책을 논하자. 연락하마 하고 열차타고 서울로 향했죠. 가다가 아무래도 대전에서 내려가지고 대전 상황을 보고 올라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대전에서 딱 내렸더니 역에 그 검표하는데 딱 군인들이 서 가지고 명단 쭉 들고 벌써 그러고 있어. 인자 나는 바보짓했지. 거기서. 인자 내가 아조 복학했다 제적당한 학생에다가 감방살이 해가지고 꾀죄죄 해가지고 학생같이 안 보여, 이놈들이 보면은. 혹시 또 몰라가지고 바보짓을 했지 내가. 명단 뽑아가지고 뭐라뭐라 하드라구. 쓸쩍 명단을 이라고 본게 당신 뭐야~ 그래서 아니, 뭐, (엉거주춤한 행동을 흉내내심) 그러니까 빨리 가라고. (* 일동 웃음) 그래가지고 나와서 보니까 차를 두 대가 딱 대져있고 일부 수상하다고 생가하는 놈들 잡아다놨고 몇 군데 들렸드니 다방 같은데 사람들이 말이 없어 말이. 조용해. 가라앉아가꼬 분위긱. 침묵. 아이구야, 이런 상황에서 서울 가봤자 사람 만날 수도 없것다. 도로 어디로 갈까 하다가 우선 도로 내려가는 기차를 탔어. 그런데 한참 타고 가는데 내 가방이 똥가방인데 하도 내가 동가숙 서가식이라. 손톱깎이부터 속옷 한 벌 사전부터 시작해서 빗, 이빨쑤시개 등등 담은 가방을 항상 갖고 다니는데 올려놓고 이라고 앉았는데 저쪽 자리에가 저쪽 보고 이쪽 보고 맞보는 의자가 있었는데 나는 이렇게 앞쪽 보고 있는 의자에 앉았는데 갑자기 어떻게 하다가 앞에 사람하고 눈이 마주쳤어. 이쪽보고 있는 사람. 어디서 본 얼굴이야. 얼른 고개를 숙이는데 그 사람도 어? 놀래는 표정을 짓더라고. 저 사람을 내가 어디서 봤더라. 나보다 나이는 좀 많은데 궁리를 하다 보니까 목표를 내가 가끔 다닐 때 인제 버스 정류장에 내가 목포 딱 도착하면 나와있는 형사야. 여기서 차 타면 연락하고 그러니까. 항시 감시당할 때니까. 아이쿠야. 근데 마치 이사람들도 주말에 어디 갔다가 온 거에요. 일행들이. 그러니까 자기들끼리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저쪽 보고 앉은 놈들이 여리 돌아보고 그래. 고개 숙이고 있으니까. 와메, 어떡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자기들끼리 뭐 어쩌고 저쩌고 해쌌드만 한 사람이 일어나가지고 나를 이렇게 내려다보고 그러면서 가, 복도를. 통로를. 거기 공안들이 타고 있으니까. 아마 이야기를 할라고 하는 모양이야. 휴대폰이 있으면 그때 진즉 끝나버렸지. 근데 그땐 없을 때니까. 그러니까 나도 꺼구로 그 사람들 있는 쪽으로 걸어나왔지. 입구가 그쪽 이니까. 왜냐면 인자 내가 고등학교 때 유도부에 있었기 때문에 낙법을 좀 하니까. 여차해서 뛰어내려불라고, 영화에서처럼. 가방 놔둔 채로 지나오면서 그 사람들 얼굴 한 번 보고는 문 열고 나오니까 열차가 속도를 줄이면서 서요. 아이구야 살았다. 다 서기도 전에 뛰어내렸어. 내려보니까 장성역이야. 어딘지도 모르고 내렸어, 하여튼. 그대로 뛰쳐나가가지고 있는데 그 아줌마 한분이 애기 업고 차 잡을라고 이리뛰고 저리뛰고 있어. 같이 갑시다 타가꼬 광주로 들어왔지. 그래갖고 운암동을 거쳐 내려왔지. 가만있어봐, 운암동인가 어딘가 생각 안나네. 들어와 가지고 검문 한번 거치고 나서 택시 갈아탔어요, 아저씨, 그 내가 생각하는 것이 있어서 임동 쪽으로 갑시다. 그런게 그 쪽에 난리났는데요. 왜요 긍게 거가 머 붙어갖고 싹 쓸어부렀다고. 갑시다. 그래갖고 이제 임동 쪽으로 와가지고 8대 독잔데 농대 다니는 후배가 있었는데 그 애 집으로 가가지고 그래가지고 그날 밤 거기서 새고 그 다음날 낮에는 나는 쪽팔려가지고 도저히 인제 돌아다니지 못하니까 저녁부터 돌아다니고 있는디 MBC불타고 그럴때 시내를 갈고 다녔는데 연락을 누구한테 취해야지, 나는 시위가 문제가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내 동지들을 찾아내야 하니까. 그래야 뭘 준비를 하고 뭘 하니까. 아무리 연락을 할라고 사람을 찾아다녀도 없어. 그래서 문병랑 선생님 댁에 갔더니 거기도 아무리 불러도 없고. 알고보니까 다 지방으로 도망가부렀드라고. 그래 인제 의대 앞에 있는 내 동생 집에 갔지. 내 동생집에 갔더니 난리야. 옆집 대문 요만큼씩 칼로 막 파분 것처럼 그렇고. 내 동생은 집에서 난리고. 개죽음 당할라냐고 오늘 두 번이나 났다고. 내 사진 주라고도 오고. 옆집이 대문에 왜 저러냐 한게 군인들한테 돌맹이 던졌던 사람이 도망오니까 군인들이 쫓아들어와가지고 그 집 아저씬데 들어가서 문 잠그니까 문 부수고 들어가가지고 이불 둘러쓰고 잇는 것을 대검으로 찔러부렀다고. 인제 그러면서 나보다 난리야. 벽장에 나 너넣고 잠가불고 나가. 한참후에 우리 작은 형님이 오시더라고. 한봉아 너는 지금 잡히면 무조건 죽음이다. 개죽음이다. 너도 다음을 기약하기 위해서라도 빠져나가라. 그래갖고 인제 아침에 느닷없이 광장이 형님이 준 양복입고 내 조카 없는 내 여동생하고 같이 부부행세해가지고 빠져 나가가꼬 백운동쪽으로 가 가지고 거기서 또 택시타고 남평으로 나주로 이렇게 갔는데 그래가지고 이제 21일이지.
면담자: 21일
구술자: 21일 새벽에 광주에서 나왔어요. 그러니까 19일 날 다시 들어왔다가 19일 날 오전에 나갔다가 저녁에 다시 들어왔다가 21일 날 새벽에 나간거죠. 그러니, 그런것들은 여기(『운동화와 똥가방』을 가리킴)에 자세히 써 있어요. 그래가지고 21일 날 나주에 있는데 차량시위대가 도착해가지고 나주경찰서에서 무기탈취를 해요. 그래서 그거 보고 광주로 다시 들어오기 위해서 인자 구두, 나갈 때 양복입고 두구 신은 거 구두 버리고 운동화로 갈아 신고 얼굴 가릴 수건 하나 사고 그라고 인제 버스에 올라 탈라고 하는데 광주에서 온 차량사위대에 목포에 있는 전남 민주청년협의회 목포 지부장이었던 김남표라고 이 친구가 느닷없이 골목길에서 내 손을 잡는 바람에 얼마나 놀랬던지. 아, 왜 여기에 있어? 자기도 쫓겨 왔다는 소리를 하면서 그래가지고 그 친구하고 둘이 차를 타면 저쪽에서 집중 사격을 받으면 위험하니까 걸어서 들어갑시다 그래가지고 남평까지 걸어왔죠. 그때 남평 그 다리, 건너기 전에 왼쪽에가 조그마한 구멍가게가 있었는데 주막 비슷하니. 거기 앉아서 음료수 하나 마시고 있는데 헬리콥터들이 와가지고 월남전에서 많이 썼던 고구마같이 생긴, 흉악하게 생긴 게, 와서 다시 건너편에 산마루에다가 특수부대들, 공수부대들 투하해놓고. 그러니까 도로 요소 요처를 그렇게 해서 장악을 한 거예요. 기관총 가져다가. 그래가지고 못 들어가 버렸어. 그래서 화순 쪽으로 돌아 그래서 그쪽으로 화순 쪽으로 도는데 요소, 요소마다 전부 군인들이 장악을 해버렸어. 벌써. 21일 오후가 되면 그렇게 되요. 못 들어와 광주로. 다시 거기서 걸어서 세지지, 그 담에 거 뭐야 금정. 나주. 거리에서 길거리 정미소 집에서 하룻밤 자고 영암으로 나왔다가 영암은 그 광주 진출이 어려운 그 차량 시위대들이 다 영암에서 다 잤어요, 그날 남쪽지역은. 강진으로 가서 인제 김용근 선생님이라고 고등학교 은사 집에서 자고 거기서 용화 만나고. 거기서 다시 광주 진입을 하자. 용화가 그래도 공수부대 출신이라 기대를 걸고 나왔는데 저수지, 거기가 어디에 있는지 자세히 위치를 모르겠어. 지역은 잘 모르니까. 거기 저수지, 한쪽이 저수지 한쪽이 산인데 도로를 또 통제해놓고 차량시위대 몇 대 잡아놓고. 두들겨 패고 있더라구. 어디 빠져나갈 길이 없는 거야. 다시 또 들어갔다가 5월 27일 광주 함락됐다는 뉴스 듣고 성전, 강진을 거쳐서 버스타고 8번 검문 받고 순천으로 갔다가 부산이나 마산 쪽으로 빠질라고 했는데 딱 보니까 검문이 엄청 심하고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서 순천에서 열차타고 서울로 가가지고 서울역 앞에는 완전히 (총)들고 검문하고 있어. 그래 『어둠의 자식들』 썼었던 이철용씨 철용이 형 집으로 삼양동, 성북구 빈민촌에 있는 그 양반 집으로 갔어. 갔더니 이제 광주 후배들이. 한봉이형이 살아있으면 이리 올 것이다 해서 나름대로 도피처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2-1. 도피생활
그때부터 도피 생활을 시작했죠. 그래 1년간 서울에서 도피하고. 해외로 나갈 때까지. 그 과정은 여기에 다 들어 있어요. 다시 인제 그 정세분석 이야기를, 내가 도피생활 하면서 반성했던 게 어떻게 내가 정부 기습에 대해서는 예상을 못하고 바보짓을 해가지고 21일, 25일로 봤는가. 엄청나게 반성을 하다가 하여튼 괴로웠지. 도피생활 자체가 엄청나게 괴로웠지. 그런데 내가 도피생활 하면서 단순한 것이 아니라 그 전에 내가 이야기 했던 박정희 이제 암살해 불라고 했다고, 그 팀들 중에서 인제 정상용이하고 또 한 친구 또 한 친구 셋이가 도청 항쟁지도부에 들어가 버렸고, 박형선이는 예비검속 되어 있고. 그러니 인제 그 사건까지 아울러서 터질 가능성이 커지니까 거기다가 인제 내가 그 전홍준 선배 집에서 이야기했던 내용을 갖고, 인제 오수성 교수 같은 경우는 윤상원이 이야기를 들은 것으로 알고 있드라고요. 내가 무장투쟁을 하고 어쩌고 해서 도청을 장악하고 했던 이야기를 이 학생회 간부 애들이 들은 거예요. 그 이야기를 한 거에요, 자기들끼리. 근게 자기들 선배들이 무장투쟁을 준비하고 있으니 우리도 호응을 같이 해야 한다. 이런 내용을 또 ‘자유노트’라는 데다가 전부다 기록을 해놓은 거예요, 회의기록 같은 것을. 그게 자유노트 사건인데. 그 노트를 그 학생회 간부 중에 한 놈이 나중에 좀 숨어 있다가 자수하면서 갖고 들어가 버렸어. 다행히 수사가 일단락 된 다음에 그 노트가 나와 가지고 요 내용을 뒤집지를 못한 거예요. 이미 수사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이제 유야무야 했는데. 인제 거기서 송선태라는 친구가 자기가 그걸 작성을 했다. 상상력을 발휘해서 막 썼다. 생각 없이. 그렇게 오리발 내밀어 불고 끝났는데. 인제 고게 사전에 인제 준비한 것처럼 되어 버리다고. 폭력 폭동을. 거기다 박정희 암살 이야기 나오면 골머리 아퍼버리지 인제. 그런데다가 당시 수천 명을 잡아 넣어노니까 검찰력이 딸린 거예요. 수사력이. 그러니까 전국 각지에서 검찰, 군법무관하고 검사들을 차출을 해요. 그러니까 인제 이 지역 사정을 전혀 모르는 놈들이 많이 왔는데. 그 중에서 인제 이 지역 사람하고 아는 검사들이 정보를 흘려준거죠. 왜냐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윤한봉이는 이번에 잡히면 죽는다. 딱 죽여불라고 계획을 세우고 있더라. 나 그 사람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데 그 사람 잡히면 안 된다. 그 이야기가 인자 서울에 도피하고 있는 나한테까지 들려요. 그 다음에 우리 작은 형이 인제 잡혀 들어갔다가 그대 대동교 교사였는데. 학생들이 시위하고 그러는 바람에 수습대책위 관계했다고 나오는데 검사가 불러가지고 당신 동생 윤한봉이는 잽히면 무조건 죽인다. 다른 사람은 안 죽어도 그 사람은 죽는다. 당신 동생은. 그니까 절대 잡히지 않도록 해라. 인제 그때 당시에 오월 항쟁에 대해서 신군부쪽에서는 폭동으로 뭐라 뭐라 했지만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는 사람들은 마음속에서는 그게 아니었으니깐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죠. 철저하게 도피해라. 나도 그 사람 모른다. 그러나 내가 와서 보니까 그렇다. 그 정도로 (엄청난 거죠) 근데 그 다음에 인제 내가 한 두어 달 있으니까 사건이 수사가 일단락됐어요. 정동년씨를 수괴로 해가지고, 처음에 홍남순 변호사 송기숙 교수로 하려다가 도통 안되니까 인제 정동년이로 갔는데. 김대중씨 방문해가지고 방명록에 이름 써 놓은 것이 나온 바람에 인제 그렇게 됐는데. 다 끝났다 그런데 내가 잡혀불면 또 다시 시작 한다. 수사가. 그 다음에 광주에 남아 있는 그 나마의 운동영향까지도 싹쓸이 당해 버린다. 인제 나하고 얽히고 설킨 것이 너무 많으니까. 그러니까 절대로 잡혀서는 안 된다. 그러면서 인제 박정희 암살을 같이 이야기 했던 친구들 그쪽에서 올라온 이야기가 청산가리를 형님한테 올려 보내자 잽히게 되면 자살을 하라 운동을 위해서 자살을 하라고. 청산가리 이야기가 나왔어. 근게 이제 야 그건 너무하지 않냐. 형님이 어련히 알아서 하랴. 그래가지고 나한테까지는 안 왔는데, 청산가리가 안 왔는데 그 이야기까지가 들린 거야. 그런 속에서 내가 저번에 이야기 안했었나? 도피하면서 목욕하면서도 입에다 칼 물고 있다고. 그러니까 인제 혼자서 독방을 쓰면서, 방에 있으면서 옷 벗고 상의를 벗고 심장 부위를 이렇게 마커로 그려가지고 그 남민전 사건 때문에 내가 그 그랬는데 남민전 사건이, 폭동의 주범이 잡힐때 자살 시도 했잖애. 그 양반 이재문씨, 그렇게 해서 죽어 버렸으면 간단한데 가슴을 찔렀는데 잘못 찔러갖고 안 죽어분거에요. 그래갖고 이것저것 줄줄이 사탕으로 나와 부렀지. 인제 그것 때문에 내가 인제 여기다 거울 앞에서 심장을 이렇게 그려 넣고는 누가 이렇게 칼 물고 있을 때 잡으로 오는 것은 아니니까 잘 자다가도 급습당할 수도 있고 엎어져서 책 읽다가도 급습당할 수 있고. 똥 싸다가도 급습 당할 수도 있고. 그런 경우에 대비해서 이제 오른손이건 왼손이건 인제 칼을 잡고 정확하니 거기(심장)를 쑤시는 연습을. 여그다가 칼을 항시 꽂고 있었어요. 양말 속에다가. 그래가지고 저녁에 도피할 때 잠을 자더라도 양말을 벗지 않고 잤으니까. 그래가지고 무수히 연습을 한 거예요. 쑤시는 연습. 그 다음에 그거기 실패했을 때 인제 대동맥 경동맥 자르는 거. 그래가지고 이쪽에다가는 면도날 요쪽에다가는 긴 칼, 과도. 날카롭게 간. 인제 경동맥은 면도날 하나면 있으면 긁어버리면 되니까. 그래서 이제 목욕탕에 있을 때 깨 벗고 때밀이하고 이라고 있을 때 갑자기 들이닥쳐 불면 어떻게 할거이야 인자. 그래서 이제 칼 물고 그런 거라고(목욕했어요). 아니, 그때는 진짜 왜 그냐면 눈을 감아도 떠도 맨 피만 보이니까. 그때 그 절박한 처절한 상황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햐가 안 돼. 그런 도피생활을 약 1년 했지. 그래갖고 한 놈이라도 죽이고 나도 죽는다. 나만 죽는 것이 아니라 한 놈이라도 죽이고 죽는다. 그렇게 해서 광주를 지켜야 한다. 운동을. 한번은 하도 화가 나가지고 광주로 다시 내려와 가지고는 한번 다시 준비를 한번 할라고 광주로 나 내려갈라요 광주 도피처 좀 준비를 해달라고 하니까 여기 절대로 내려오면 안 된다고. 못 도와준다고. 못 내려오게 강력하니 막아. 그러다가 인제 그런 속에서 해외 망명, 이렇고 있을 바에야 나가서 싸우는 게 낫지 않냐(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좋아라 하지 광주에선. 그렇게 하시죠, 그렇게 하시죠. 그래가지고 이제 상의해서 해외로 나가게 된 거에요. 그래 해외 나가서 내가 미국 배안에서, 미국에 도착하기 전에 망명생활 어떻게 할 것인가 마음으로 정한 것들이 이제 그런 거지. 감옥 생활 하듯이 절대 침대에서는 안 잔다. 항시 도피한다는 생각속에서 긴장을 풀지 않기 위해서 내가 망명생활을 하는 중에 허리띠를 풀지 않는다. 그 담에 선원들한테 들으니까 미국은 맨 샤워를 그렇게 많이 하드만. 근데 나는 한달에 목욕 한 번씩만 한다. (웃음) 그리고 이승만이처럼 혀 꼬부라져서는 안들어 올라니까 영어는 안 쓴다. 미국생활에 적응하려면 운전을 해야 하는데. 운전 안한다. 내 것을 갖지 않는다. 등등을 안 한다고 아주 다짐을 했지. 그래갖고 고놈 지키는게 제일 힘들었던 게 다른 것은 괜찮은데 허리띠 안 풀고 자는 거. 이제 입은 이 채로 자고 살아. 12년은 그렇게 살았어. 그래서 인제 다른 지역은 괜찮은데 LA는 덥거든. 허리띠 안 풀고 양말 신은 채로 내가 12년 살았는데 인제 내가 허리가 아파 안 좋아가지고 이 수지침을 왕창 맞을 때에 한 일주일 내가 추리닝으로 갈아입었지 그 외에는 내가 허리띠 안 풀어놨어. 왜냐면 이걸 막 왕창 꼽아놓으니까 어떻게 이걸 할 수 없으니까 (*바지춤을 올리는 시늉을 함) 할 수 없이 추리닝을 입었지. 그리고 인제 통장도 없고 운전면허증도 없고 신분증도 없고 뭐 내 방도없고 민족학교 같은 디 세워가지고 인제 거기 한쪽에서 자고 동가숙서가식 하는 식으로 살고. 근게 내가 아무것도 안 가진 채로 옷은 이제 얻어 입고 주워 입고. 그렇게 살다가 비행기 타고 갈 때 식사시간 되면 뭐 먹을거냐 그러면 옆사람 봐 가지고 저 사람 꺼 주라고 저거 주라고. 911테러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에서 신분증 조사 같은 것은 거의 안 해요. 이를테면 인제 저임금 노동자들이 모여 있는 봉제공장이라든지 이런 곳을 그렇게 가끔 일년에 몇 차례씩 급습하는 형식이지 우범자 아니면 길거리 지나가는데 신분증 보자는 예가 없어. 내가 12년간 있어면서 신분증 보잔 소리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죠. 비행기 맘대로 타고 다니고 (누군가가) 공항에 있는 거 실어서 손 흔들어주면 타고 내리고 기다리고 있다가 태워갖고 가고. 그렇게 해서 인제 각 지역에 가서 조직 만들고 각 지역에 센터 만들고. 그래서 이름을 민족학교, 청년학교 그렇게 하고. 청년들을 의식화해서 인자 재미한 청년 만들고 나이 든 분들 모임 만들고 해외의 한 청년 만든다고 유럽 호주 이런데도 만들고. 12년 하다가 영삼이가 들어와 가지고 (대통령되어서) 귀국 허용해서 들어왔는데 우너래는 내가 87년 대통령선서가 끝나고 나서 88년에 총선이 있잖아요. 총선 때 이미 항쟁 지도부에 있었던 정상용이가 국회의원이 된 거에요. 또 518로 들어갔던 박석무씨도 국회의원 됐고. 다시 말해서 사면복권이 다 돼버린 거에요. 88년까지 해서. 5월 관련자가. 근데 나는 93년에 들어온 거에요. 5년을 더 있다 들어온 거지. 이유가 뭐냐. 인제 미움 탄 거지. 해외 활동이. 해외활동에 의해서 그 분들한테 미움타고 김대중씨의 방해. 내가 김대중씨 욕을 사정없이 해버리니까

3-2. 김대중

면담자: 아! 선생님 그 이야기를 좀 듣고 싶어요.
구술자: 지금 그 이야기를 터놓는 거예요. 에, 88년정도 되니까 평민당이 그때 여소야대지. 큰소리 칠 때지. 근데 518문제가 다 풀렸어요 인제 사면복권까지 다 됐어. 아 국회 의원 될 판인데. 인제 내 귀국문제가 나온 거예요. 다 간다고(귀국한다고) 나는 인사하고 다녔다니까. 미국에서 인자 몇 지역을 돌면서 인자 송별회 한다고 그래가지고 전별금이라고 얼마씩 주고 그랬어. 그라고 다니다가 중단했는데 왜냐면 느닷없이 인제 민정다에서도 동의를 한 거에요. 다 풀렸는데. 근데 이제 평민당에서 동의를 안 하는거야. 근데 동의를 어떻게 안했냐면, 재밌어. 내 매제가 박형선인데 박형선이나 민청학련 때 같이 고생을 했던 해찬이, 이해찬이. 이해찬이가 평민당에 있었는데 이해찬이가 국회의원이 됐어. 그건 5월 관련자는 아니지만 이해찬이가 형선이한테 전화를 해갖고 한봉이 형 귀국을 하는데 협조를 할 테니까, 우리 평민당에서도, 조건이 있다여. 뭐냐 그러니까 뭐냐면 광주청문회라는 것이 있었잖아. 88년에. 그 청문회 증인으로 내가 당연히 와야 한다는 것이 여기 주장이여. 518관련 단체들부터. 당연하지. 내가 있어야지. 내 이야기를 들어야 하니까. 근게 청문회 증인으로 민정당에서도 그러고 또 다른 당에서도 다 동의를 하는데 평민당에서 건거야. 뭐냐. 근게 말을 안 하면서 뒷구멍으로 흘러나온 게 이해찬이가 전화를 해서, 청문회 나가서 말을 할 때 우리 김총재 인격을 모독하고 명예를 훼손하는 발언을 안 해준다는 약속만 받아주라. 내가 청문회 나가서. 그러면 동의하겠다여. 이게 근게 뭐냐면 518전부터 나는 김대중씨를 사정없이 비판을 해부렀으니까. 미국에서는 말할 것 없고. 민족 반역자부터 친미사대기회주의자 만나면 대가리를 박살을 내분다고 개새끼 상놈의 새끼 욕하고 그랬다니까. 왜냐면 80년 518전에 김대중씨에 대해서 내가 각개표를 친 이유가 뭐이냐면 70년대 그 피나는 노력 끝에 어떻게 해서 인자 박정희 부마항쟁 박정희까지 암살당하고 12.12 신군부가 권력을 100%장악 못한 이유는 그 만크 민주화 열기가, 민주화 열망이 강했다는 이야기예요. 한꺼번에 못 먹었어. 그러니까 정치권이나 운동권이 전부 똘똘 뭉쳐서 밀었으면 신군부가 전면에 못 나선다고. 그런데 이 교활한 놈들이 김대중씨 딱 그 복권, 연금 해제 이걸 했잖아요? 그래 싸움을 시킨 거지. 김영삼이하고. 근데 당시 당수는 김영삼이야. 김대중씨는 연금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활동을 못했어. 그러면 실질적으로 당을 끌고 있는 사람은 김영삼이야. 그런데 뭐이냐면 적과의 사움을 앞두고는 철저하니 내분은 막아야 하는 거야. 피해야 하는 거거든. 분열은 안 되니까. 내부 분열은. 그러면 김대중씨가 자기는 연금당한 것은 억울하고 정치활동 금지된 것도 억울하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 어려움 속에서 영삼이가 그때 잘 했거든. 버텼거든. 당당하게. 그러다보니까 인제 제명도 당하고 그랬는데. 그러면 김영삼이를 존중을 해 주면서 멀리 보고 일을 해야 하는데. 자기가 뭐 대통령 될라고 운동한 것은 아니니까. 풀리자마자 김대중씨가 영삼이한테 조건을 내건 것이 뭐냐면, 입당하라 했거든? 근디 뭐라하냐믄 재야의 지분을 요구한 거야. 재야의 지분. 50%. 그 말은 무슨 말이냐면 이미 그 당내에도 김대중씨 사람이 있는데 자기 부하들 뭐 측근들 다 들어가 있는데 김대중씨 사람들이. 권노갑이부터 다 들어있는데. 근데 재야지분 50%를 요구하는 것은 당을 접수하겠다는 이야기야. 니가 나한테 넘겨라 그것이지. 지분 50%라는 것은 중앙의원들을 말하는 거라고. 대의원들. 당을 내놓으란 이야기야. 그러면 이 50%에 대해서 재야에서, 근게 재야라는 말 자체가 그래. 재야가 조직명이 아니잖아. 운동하는 사람이 전부 모여서 농민운동 노동운동 문화운동 각계각층 여성운동부터 다 모여서 우리가 이번에 선거를 통해서 민주정부를 수립하자. 첫째 그러기 위해서 야당의 통합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통합은 하되 신민 민주당이 그때 신민당이었으니까 그런 식으로 하되 우리들의 지분을 요구하자. 왜? 민주화 운동을 위해서 우리가 희생을 많이 했으니까 싸웠으니까. 그래가지고 그럼 거기서 50%를 요구하자. 이렇게 해서 논의를 거쳐서 합의된 안이라고 하면 내가 불만이 있더라도 김대중씨 욕을 그렇게 안하자. 그러나 그런 과정에 의해서 비슷한 거 일도 없지. 재야를 업어버린 거지. 자기가 재야의 대표자인양 행세를 한 거지. 지도자 행세를. 지분 50%를 요구하니까 김영삼이, 현실정치인 입장에서는 당 접수하자는 이야긴데 현실적으로 자기가 당순데. 그걸 받아들이겠어? 안 받아들이니까 어떻게 되냐 김홍일이부터 시작해서 아들들 동원해가지고 연정이란게 그때 생긴 거에요. 전국적으로 당 만들기 작업에 들어가버렸어. 신당. 그러니까 김대중씨 아주 유명하지. 그 뒤로도 십여년 생활에 걸쳐서 똑같이 보여줬지만. 일단은 기존에 있던 당에서 자기가 영향력이 약하면은 새당을 꼭 만들어. 쪼개서 나가서 만들든 먼 수를 쓰든지. 그걸 한두번 했나. 그래가지고 다음 조직을 들어갔다고. 또 당 조직 작업해. 그러면서 인제 이 거지같은 언론들 통해서 이를테면 동아기념 몇주년 기념 행사한다 그러면은 영삼이가 갔는데 국회의원 몇 명이 따라갔다. 김대중이 갔는데 국회의원 몇 명이 따라갔다. 맨 그 숫자. 그래갖고 누가 더 세력이 센가. 언론은 맨날 그거 보도한 거에요. 신군부에서는 그 방향으로 끌고 가니까. 압력을 넣어서. 그래가지고 둘이 경쟁하는 것처럼 나와가지고 야당 분열상을 강조를 한거지. 100%김대중씨가 거기서 주역을 한거지. 근데 마찬가지. 87년 대선때도 나는 김대중씨 미국에서 신당 만들어가지고 독자적으로 나가는 거 무지하니 반대를 했어. 전화비 그때 엄청나게 나왔는데 광주다 대고 김대중씨의 출마를 막는 것은 막을 수 있는 힘은 광주밖에 없다. 광주에서 이걸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 그러면은 이건 무조건 노태우 당선시키기밖에 안된다. 미쳤다. 이렇게 둘이 나가가지고 어떻게 이겨야 합해도 이길까 말까 한데. 그 논리로 악을 쓴 거지. 후보 단일화. 긍게 인제 김대중씨가 당연히 당권은, 그때도 똑같아 87년때도 그 때랑 똑같았는데 영삼이가 쥐고 있는데 실질적으로 김대중씨가 너 나와라 내가 할게. 되냐 이거지. 말이 안되지. 우선 영삼이가 나가야(출마해야) 한단 말이야. 그래야 싸움이 되지 싸움도 하나 마나다 이건. 그래가지고 이제 악을 썼는데. 김대중이 이 개새끼 말이야 피눈물로 그 수많은 사람들의 신음 속에서 피 속에서 이뤄논걸 김대중이 저놈이 정치적으로 이용해먹을라고 한다고 악을 쓰고 그랬는데. 결국은 떨어졌지. 광주도 그렇고 김대중씨도 그렇고 세월이 흐르고 지금도 시인 다 하지만 87년에 대선에서 분열했던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절대로 못 면해요. 호남 사람들하고 김대중하고. 바보짓이지. 바보짓이었으니까. 분명히 노태우 당선시킨게 누군데? 인제 그렇게 해서 내가 비판을 엄청나게 했거든. 광주에서도 김대중씨가 신당 만들라고 작업하고 있을 때 나쁜놈의 새끼가 없다고 말이야. 그 수많은 눈물과 비명과 피를 한 입에 털어넣으려 한다고. 악을 썼지. 근게 미국가서도 그랬고. 왜 그러냐면 미국 와 가지고 김대중씨가 오면서 전두환이가 특혜를 줘가지고 달라를 엄청 가져왔다고. 그래가꼬 워싱텅 D.C에서 집도 굉장히 좋은데서 살고 아파트도. 그거에 대해서 대한민국 노동자들 임금이 어떻게 외채가 얼만데 망명 정치인이 이렇게 좋은 아파트에 살면 안된다. 손가락질 받는다. 그런 지적을 그래도 좋 생각있는 측근들이 했다고. 김대중씨 왈, 미국은 자본주의 사회다. 꾀죄죄하니 내가 있으면 상원 하원 어떤 놈이던지 나를 인정을 안한다. 만나주지도 않는다. 대접을 안해준다 이거야. 근데 그건 또 맞아. 비슷해. 그말이 현실적으로. 왜 그냐면 원래 망명정치인이란게 망명객이라는게 꾀죄죄하게 되어 있다고. 아 낯선 땅에 와서 신세지고 있는데. 보호받고 있는데 고놈의 무슨 주류 사회에서 허리펴고 살거여. 근데 김대중씨는 거기서 대접받는 고걸 강조한 거지. 다른 사람들은 가난한 나라의 망명객 이래서는 안된다 이렇게 살아서는 그런 식이고. 근데 김대중씨는 호화롭게 살았지. 거기 있으면서 777일을 살았는데. 미국에. 단 한번도 민박을 안했어, 거기서. 왜냐면 우리 동포들이 여기서 가가지고 어렵게 고생해가지고 세탁소하고 청소하고 빨래방하고 아조 고생고생해가지고 돈 벌어가지고 제일 먼저 마련한 것이 집이여,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다음에 차. 임대? 아이고. 이런거 안 통해. 사야지 직성이 풀려. 그러면서 영화에서나 나온 저택을 사. 그럼 자랑하고 싶어. 그러니까 국내에서 유명한 목사 유명한 문인 유명한 정치인들 오면은 다 서로 싸움해. 자기집에서 모실라고. 그래가지고 인제 아침에 봉투 싹 넣어주고. 김대중씨 모실라고 한 사람들이 줄을 서 있어. 천지에. 그런디 민박을 한번도 안했어. 이유는 뭐냐, 신변보호 때문에. 호텔 같은디 특급호텔 들어가면 신변보호야 확실하지. 그라고 전부 특급호텔이야. 어떻게 다녔냐. 나는 그런데 안다녀봤는데 호텔에서도 가족들이 들어가는 룸이 있어. 스위트 룸이라고. 아예 아파트처럼. 요리도 해먹게 되어 있고. 그런 스위트 룸만 이용했다고, 김대중씨가. 보통 객실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제일 비싼거. 이승만이가 일제하에서 항일운동할 때 동포들이 접시닦고 농장에서 일해서 한푼두푼 모은 돈 가지고 각 지역에 다니면서 제일 좋은 호텔에서만 잤어. 그러니까 내가 시애틀 가면 저것이 주로 이승만이가 썼던 호텔. 시카고 가면 저것이 이승만이가 썼던 호텔. 김대중이가 그렇게 산거야. 특급호텔에서. 스위트 룸에서 부인 이희호 여사부터 싹 데고 다니면서. 민박 한 번도 안했어. 카스트로가 유명한 일화가 많은 사람인데 쿠바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있어. 그 동네 와서 허술한 집에 가서 자. 그러면 카스트로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 지역 주민들이 그 집을 그 주변을 다 둘러싸서 서서, 서서 날을 새버리는 거야. 어떤 놈들이 무기 들고 못 들어오게. 주민이 몸으로 인해전술을 막아부러. 그럼 김대중씨가 자신의 신변보호를 위해서 근다고 그러면 진짜로 동포사회에서 호남 출신들 청년들로만 해도 집을 몇 벽을 싸부러. 둘러 싸. 돈 주면 경호원들 얼마든지, 그 정도 돈은 다 내놔. 그런데 그 사람들은 차원이 다른 사람들이여. 그러면서 주한미군 철수 반대 강연 나오지. 버클리에서 어떤 일이 있었냐면 주한미군 철수를 반대한다고 그러니까 질문을 던지니까 왜 반대하냐고 백인이 하나 물은거야. 진보적인 백인이. 지금 코리아에서 미군이 나가면 독재가 더 강화되어버린다. 이 사람들이 다 자리차고 나가버렸잖아. 그럼 주한미군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어느정도는 유지시켜주고 있구만 이러고 나가버리고. 마르크스보다 더 못했다고 그랬다고. 맞아 맞아 누구냐 그 필리핀에서 암살당했던 친구 누구지? 마르코스 맞지?
면담자: 예, 맞는 거 같은데요.
구술자: 대환영을 했지. 환영을 했는디, 자유주의 수준에서 못 벗어나니까 손가락질을 받았제. 긍게 인자 주위에서 누가 당신이 살라면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가봐라. 니콰라과 여행을 권한거야. 그래갖고 그 친구가 니콰라과 가서 눈을 뜬 거여. 아, 나 귀국 하겠다. 가서 내가 우리나라 민중들과 함께 하겠다. 그러니까 미국 들어오지 말라는 거지. 들어가 가지고고 암살당해 브렀제. 그러니까 인자 마르코스는 정신을 차렸다는 거지. 근데 김대중이는 못 차린 거여. 그래가지고 미국의 자본주의에 대해서 요즘 말하는 전문 경영인들 쓰고 자본주들이 뒤로 빠져 있는 이런 거가 결정적인 LA강연때는 자리차고 중간에 나와 버렸는데, 자기가 감옥에 끌려가서 사전 예비 검속 돼갖고 들어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그것에 분개해서 518이 터졌다고 강연에서 나와버려. 518발발 배겨이 자기 예비검속이라고. 그러니 얼마나 화가 나겠어. 그래서 나와 버리고 그랬는데. 그래갖고 무지하니 내가 김대중씨 비판을 많이 했어. 그래서 내가 한번은 김대중씨한테 돈 모아갖고 볼보차를 사준 사람들에게 뭐라고 하나까 김대중씨가 차를 볼보를 아들 줘 블고, 홍업이를 줬제 그때. 자기는 비행기타고 다녀버렸는데, 내가 그 김대중 지지자들 앞에서 그랬어. 친일, 아니 친미 사대 기회주의자 내가 만나면 박살을 내버리겠다고 내 말 똑똑히 전하라고 나쁜 놈 새끼가 없다고. 나중에 들어보니까 전했다고 하더라고.(웃음) 시퍼래 지더라고(웃음) 거기서 김대중씨는 자기한테 돈 준 사람은 충신이야. 애국자고. 충언을, 직언을 하면 나쁜 놈이여. 반역자고. 그래서 자기 대통령 된 다음에 거그서 돈 준 사람들 국회의원부터 하다못해 경정, 무슨 국민생활 건강 공단 뭐 전부 이사, 간사 뭐 LA지역만해도 87명인가 그렇게 혜택을 보고 그랬다는데, 나눠 먹었지 그 일을 홍업이가 다 한 거지. 근데 어쨌든 다시 돌아가서 , 내가 인자 광주 청문회에 서게 되면 알거든 민정당 놈들은. 그러믄 살살 또 고놈들이 끄집어 낼 거 아니여. 증인은 김대중씨하고 사이가 안 좋다는 소문이 있던데, 왜 그랬냐고 막. 그러면 내 성깔에 인자 때는 요때다 하고 사정없이 쏘아대 버릴 수 있잖아. 그래갖고 그걸 막기 위해서 그 조건을 단거여. 그러니까 인자 형선이도 화를 내블고, 나쁜 놈의 새끼들이 없다고 말이야. 증언자한테 무슨 사전에 각서가 필요하고 무슨 약속이 필요 하냐, 소신대로 하는 거지. 감방에 있을 때 각서 쓰라는 소리하고 똑같은 거 아니냐. 나한테 연락했더라고 개새끼 지가 나 들어가고 말고를 지가 결정하냐고. 뭐 나중에 안께 진짜 김대중이가 결정한 셈이 돼 버렸는데. 말도 안되는 소리하고, 증인 채택에서 정당간의 합의가 안 돼갖고 나는 빠져버리고. 내가 빠져 버리니까 안기부에서는 입이 이만해저 브렀지. 들어오지 말라고, 그러니까 인사다니다가 중단했다니까. 그러니 전별금 받아 가지고 돌려주기도 그렇고 애매해서 혼났는데. (웃음) 그래갖고 오년을 더 살아버린 거에요, 망명생활을. 노태우 5년 전두환 7년, 그래서 12년. 영삼이가 들어와 가지고 귀국허용을 해가지고 그러니까 인자 앞에가 붙은 게 최후의 수배자 이렇게 된 거지. 오년 추가 수배자가 된 거지요, 정확한 표현으로 한다면. 오년 동안 해외에서 더 보냈으니까. 아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열나, 오년을 더 보내버렸다니까. 망명생활을. 아주 기분 나쁘고
면담자: 선생님 뭐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건 아니죠?
구술자: 내가 개인적으로 그 사람하고 원한 가질 기회가 없지. 내가 미국에서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까. 난 그 사람하고 원한 가질 이유가 없어 내가 뭐 정치인이면은 뭐 하다못해 공천을 받으려고 했는데 안 해줬다던가 그럴 수도 있지. 나는 정치하고는 첨부터 담 싼 사람이라, 나는 진짜로 정치에는 관심이 없거든 왜 그냐믄 내가 취미가 그래서가 아니라, 내 성깔을 내가 알거든. 내가 아주 그 뭐랄까 좀 치열한 스타일이라 이를테면 이를 죽이더라고 이렇게 죽이는 (손으로 으깨는 흉내늘 내심) 스타일이라 내가 권력을 잡으면 나쁜 놈들 손을 너무 심하게 볼 놈이라고 그걸 내가 알아. 피가 막 범벅이 될 가능성도 많고 그래 나는 아예 내 성깔이 그러니까. 예를 들면 내가 연속극을 보면서도 근다니까 뭐 사극이나. 요즘 신돈 보면서 화가 아조 머리끝까지. 저런 개새끼들이 나라를 끌어왔으니, 우리 민족이......그냥 때려죽이고 싶은 거야, 드라만데도. 그러니 내가 정권을 권력을 잡으면 쓰겄어. 아예 옆에를 안 가블라 하지. 그러니 성격 고약한 사람은 칼을 안 들어야한다고. 그러니까 나는 아예 정치판을 끼웃거리지를 안 해브니까 나는. 내 김대중씨하고 내가 개인적으로 원한을 가질 시간도 없고, 기회도 없었고. 근디 인자 나 보고 다 그러잖아. 김대중이 오년간 대통령 겪고 나서, 옛날에 민청학련 동기부터 시작해서 옛날운동권 동기들이란 놈들 중에서 들어와서 보니까 김대중씨 비판한 놈이 없는 거야. 하나도. 근데 나는 들어와서 내 스타일대로 하니까 누가 있건 어느 자리에서건 할말 하는 놈이야. 언론의 자유는 스스로 누리는 거지 누가 주는거 아니다라는 주장이니까 첨부터 나는. 사정없이 해 블지. 그러니까 못마땅해 죽겄지 대들지는 못해. 왜 그냐면 논리적으로건 박살이 나지. 나만 광주에서 맘대로 말하고 산다고 그랬는데, 근데 사람들은 거기서 못 벗어나. 그러다가 김대중5년을 겪고 나서야, 아이고 20년을 앞서 살았습니다, 인제 형님이 옳았던 것을 인정합니다. 다 그래 지금 뭐 그래서 옛날 김대중이 편들고 그랬던 놈들 슬슬 눈치보고. 또 엊그제 얼마 전에는 도청 문제 나오고 그러던데 그 사람은 정치 전문가여. 운동가 아니야 그 사람은. 내가 민족의 지도자가 아니라 저 사기꾼이다. 나쁜 놈이여. 김대중씨가 우리나라 정치인들 중에서 김구 선생, 장준하 선생 제 명에 못 돌아가신 분들이 많지만 야당 지도자는 비주류지도자는 탄압을 받기 때문에. 김대중씨 그 사람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는데 한마디로 말해서 그 사람 정치 정치인이야 정치인. 그렇고 그런 정치인이야 좀 뛰어난. 끝. 인자 호남이 518이 김대중씨 때문에 엄청나게 손해를 봐브러. 호남의 권위, 명예, 518의 권위, 명예, 김대중씨한테 다 바쳐브렀지. 이 지역 518로 남아버린 거 아니야. 전두환, 노태우 사면 받고. 아이고메 말도 안돼. 어떻게 찢어 죽여 버릴까 하다가 어느 날 사면 받고. 화해와 용서 그러니 종교도시로 바뀌었지. 또 갑자기 평화도시로 바뀌노 난리 장방구지 그래갖고 문화도시. 인자 그 이야기 고만하고.

2-3. 귀국 후 활동 - 518기념재단과 들불열사기념사업회

그 다음에 귀국해가지고 여기에 518재단 만드는 것까지 여가 나와 있어. 엄청나게 욕 먹었지. 아마 나처럼 욕 많이 먹은 사람 없을 거야. 5월 관련단체들이 많잖아. 419도 그렇고. 이렇게 보면 뭐 상이유공자회니, 전몰유공자회니 머 많잖아 이런거 이. 근데 아주 극소수가 인제 그런 조직을 실무 집행기그를 장악해가지고. 먹고 살지. 그런 사람들 입장에서는 나 같은 사람들 죽이고 싶지. 하여튼 518 기념비 만들면서 욕 무지하게 먹었지. 그래 어쨌든 만들어져가지고 지금 중요한 역할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연구소 만들어서 그거 그렇게 하고, 주로 강연 다니고, 글 쓰는 것은 싫어하니까. 들불열시 기념사업, 518자유공원에 거기 추모비 세웠는데 봤죠? 대한민국에서 제일 멋진 거여 그게. 내 평가가 아니라 타 지역 사람들이 와서 그렇게 해주라고 얼마나 많이들 그러는데. 그 요즘 들불 기념사업에 사단법인 만들어서 이제 내가 초대 이사장 맡아서 있는데, 들불상 제정해 가지고 일 년에 천만원씩 상 주는 거. 그 작업 지금 하고 있고. 지금 한 일억 오천 모았는데, 이것도 우리나라 운동 관련 상으로는 제일 큰 거여. 천만 원짜리라. 우리나라 상 아주 남발돼갖고, 백만원짜리 상, 이백만원짜리 상, 삼백만원짜리 상. 그리고 옛날부터 상은 내리주는 건데 올려주는 거여. 손자가 할아버지한테 상주고 그런 식으로.
면담자: 들불상은 어떤 사람한테 주는 상인가요?
구술자: 들불상은 들불관련해서 일곱 분이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신 순서대로 들불 박기순상 모범적인 여성 노동운동가. 윤상원상 모범적인 남성 운동가. 박용균, 이건 고아거든. 그래서 모범적인 소년소녀 가장. 박관현, 모범적인 인권운동가 인권일반. 신양일이는 소수자 인권. 김형철, 이건 빈민운동가 모범적이고. 박효선, 모범적인 문화운동가. 이렇게 해서 매년 그분들 이름을 써 주고, 일년에 한번씩 주는 천 만원.
면담자: 한 명씩당 천만 원을 준다는 거예요?
구술자: 응. 큰 상이야. 긍게 인자 그러기 위해서 기금을 2억을 마련하고, 회원들 회비를 일념에 만 원짜리 회비를 대한민국에서 제일 싸 만원이면. 한 달에 거 8백 7십원 씩 내니까. 그래갖고 운영비를 이를테면 일 년이면 백만 원도 안 써. 왜 그냐면 전부 자원봉사. 내가 주축이 돼 갖고 문건 작성해 버리고, 전화비 외에는 거의 안 나가지 우편비하고. 그렇게 해서 인제 주고, 목표액이 5억이여 일단계가 2억인데, 5억 모으면 일 년에 두 명씩 그래가지고 들불 박기순상을 하나는 국내, 하나는 불쌍한 동남아시아,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 흔히 옛날 제3세계 운동가하고 같이 주는 거지 두 사람에게, 천 만원 천 만원씩. 근디 이런 다른데서는 가난한 나라에 대해서 만 불짜리는 엄청 큰 거여. 근데 우리나라에서는 뭔상뭔상 많아. 아 늦봄문익확 통일상 뭐 오백만원도 안돼. 통일 문화상 한겨례 상 칠백만원, 칠백만원이 큰 거라고. 들불 것이 인제 제일 큰 것이 돼. 그런데 인제 내 건강 때문에 요것까지만 하고 나는 끝 손 뗀다고. 일부 단체도 후원하는 거 그건 하고.
면담자: 선생님 민족미래 연구소는요?
구술자: 아 민족미래 연구소는 95년에 열었고, 그것도 뭐 인자 주변에서 후배들이 전시회금 마련해주고 우당탕탕 해갖고 꾸며주고 어쩌고 시방 에 주로 인자 나는 거기서 강연 같은 거 다니고 그랬어요. 공부하고. 그 동안에 인제 감옥살이 할 때마다 공부를 했었는데, 감옥을 뜸하게 한 십여 년 안했으니까 옥살이를 공부 좀 많이 했고.
면담자: 그러면 지금은 문 받은 상태인가요?
구술자: 아 12월 31일부토 닫았지. 왜냐믄 거기가 3층인데 올라 다니기도 힘들고 내 호흡이 저 산소 발생기라고 전기분해로. 병원에서는 하루에 열다섯 시간 이상 이거 꽂고 있으래. 산소 호흡기를. 귀찮은데.
면담자: 선생님 이렇게 건강이 안 좋아지신 이유가 뭔가요?
구술자: 이게 지금 한방에서는 심화, 화 많이 내고 양방에서는 흡연, 담배 많이 피워서. 이게 폐기종이라는 게 한 이삼십년 진행이 된 거예요 지금. 어느 날 갑자기 생긴 병이 아니여 지금. 천천히 폐가 나빠 파괴 되는 건데, 인제 내가 94년에 발견을 했는데.
면담자: 들어 오시자마자 발견했네요.
구술자: 지금 내가 정상인의 호흡에 5분의 1밖에 못해. 긍께 5분의 1가지고 사는 거지. 산소로. 그러니까 인제 계단, 육교 같은 데 올라가면 한참 숨을 헐떡거리고 고르고나서 내려오고. 그러니까 아침에 3층에 있는 연구소 출근하다가 올라가면 바로 열쇠를 못 열어. 한참 숨 고르고 나서 열고. 하다 보니까 저항력이 약해지니까 겨울 되면 감기 걸리면 감기는 나한테 저승사자지. 그래 안 해도 호흡량이 적은데, 인자 가래가 기도를 막아 버리니까 그 다음에 인자 열이 생기면 염증이 생겨서 부어, 허파가. 인 또 호흡이 안되지. 자칫 저번에 폐렴으로 가버리니까 119에 실려서 가버리고. 인자 사람을 안 만나. 인자 오늘 여그 왔을 때 감기 걸린 것 같으면 쫓아냈지 내가. (웃음) 그러니까 인자 바닷가로 집짓고 살려고 그러는데 공기 좋은데 가서. 아 어떻게 나는 그런 거 잘 모르니까 누가 옆에서 땅을 샀는데, 길이 없는 땅을 사 갖고 길 문제 가지고 불량한 놈들이 돈을 많이 주라한 거지 인제. 불량해갖고 안 돼. 속상해. 무안 쪽으로 아파트 12평짜리 얻어가지고 우선 인자 광주는 공기가 너무 나쁘니까 옮겨가서 책이나 보고, 인자 또 기공으로 치료 해본다 해가 지고 기수련을 97년부터 시작했는데, 그리고 책 보고, 산보나 하고. 그려. 또 얼른 얼른 해. (웃음) 아 참 내가 책은 줬었지? 하여튼 여기 책에다가 다른 거 안하고 그 야기만 빠졌어. 그전 박정희 암살관계로 심리적으로 부담이 컸었다는 비하인드 이야기만 빠졌지.
면담자: 선생님 정확히 들어온 날짜가 언제예요, 선생님.
구술자: 93년 5월 20일엔가 일단 들어왔다가, 일주일 있다가 나가가지고 인자 보따리 싸갖고 8월 달에 들어왔지. 8월 17일인가에 들어 왔을 거여. 갑작스럽게 5월 행사에 참여해달라고 그래가지고 일단 들어왔다가 나가가지고 보따리 싸 갖고 들어온 거지. 보따리 싼단 이야기는 각 지역에 인사 돌고, 보따리란 게 있나 가방 하나 들고 다니는.

2-4. 정치활동, 정당에 대한 견해

면담자: 선생님 들어올 때 굉장히 언론에서.
구술자: 아 그거야 언론의 생리이지. 생리니까 그렇지. 아 뭐 주변에서 다들 나를 아는 사람들 전부 나는 정치판으로 나가는 것으로 순서가 그랬지. 김남주 시인이 죽었어. 인제 그때 김대중씨가 선거에서 92년 선거에서 실패하고는 정기 은퇴선언 했잖애. 그리고 영국 갈 거 그럴 때지. 김남주가 죽었어. 그 장례식장에 빈소 옆에 서 있는데 갑자기 김대중씨가 온 거야.
면담자: 94년도죠 김남주 씨가 돌아가신 게.
구술자: 그렇지. 긍께 그 갔다 왔는가 가기 전인가 하여튼 기억이 확실치가 않애. 그라고 인자 박석무 선배가 국회의원인데 김대중씨 온다니까 나는 저 짝으로 숨어 브렀어. 이 조화들 뒤로.(웃음) 계면쩍지. 좀 짠하기는 하지. 김대중씨 짠하게 됐잖아. 다들 불쌍해갖고, 광주 사람들 울고 그랬잖애, 은퇴한다고 하니까. 근데 인자 박석무선배가 야 한봉아 한봉아 김대중씨 오셨다 인사드려. 할 수 없이 인사를 했지. (웃음) 내가 그 동안에 인자 미국에서 있었던 일들 왜 인자 날개꺾인 사람인데 짠하지. 불미스러운 점 있었지만 이해하시라고. 나도 마찬가지라고. 김대중씨가 꼭 집에 한번 오라고. 글더라고. 예, 그러고 안 가버렸지.(웃음) 다들 그랬다고. 내가 김대중씨 찾아가면 글로 끝이라 이거야. 무조건 공천, 그럼 무조건 된다는 거지 이거. 국회의원. 미쳤어 내가 정치할라고 하겄냐고 그걸로 끝나버렸지. 하긍게 인자 내 가까운 초등학교 깨복쟁이 친구들 다 모지리, 머저리, 굴러온 것을 왜 버리냐 왜 그러냐고. 오란디 안 가냐고 그랬 샀고. 한나라당이 저번 선거 때 손학규가 전화해갖고, 아 이제 맘 좀 열어. 안 들은 걸로 합시다.
면담자: 요즘 선생님 민노당 활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구술자: 민노당은, 내가 여기 사람들(필자와 일행을 가리킴)있는 사람들 정치적 성향을 내가 좀 몰라. 이거 말하기 그런데, 나는 인제 아까 87년 대선 때도 독자 후보 주장하다가 안 돼. 아니, 후보 단일화. 그래서 백기완 선생 독자후보론으로 갔다고. 그럴 바에야 멀리보자. 진보정당을 만들어야 된다. 백선생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지. 그 뒤로 계속 내 주장은 뭐냐면 우리는 분단냉전특수상황 때문에 우주에서 유일하게 진보정당이 없는 나라다. 그 다음에 김대중 씨와 그것이 다 거슬러 올라가면 한민당도 그러는데, 대한민국 야당은 의사 진보 특수를 누렸다. 내가 맨날 하는 이야긴데. 진보정당이 아닌데, 진보정당을 대중들은 갈망하는 거여. 자신들의 권익을 대변해줄 정당이 없으니까. 찾는 거야. 그러니까 그런 정당인양 하는 거지. 가짜지. 그래갖고 선거 때마다 재미를 본 것이 우리나라 한국의 야당사야. 노동자 농민 옛날에는 노동자 소릴 못쓰니까 농민, 근로자, 서민의 정당의 한국 야당의 의사진보특수라고 그래요. 그래가지고 선거 때마다 언제든지 진보 표를 얻어 묵어. 김대중씨가 그걸 아주 이득을 무지하게 봤지. 그래서 진보정당을 만들자는 움직임에 대해서 여당보다는 항시 야당이 사이비야당 진보정당이 더 박해를 가했다고. 훼방부리고. 왜, 있는데 또 뭐 만들라 하냐고. 쉽게 말하면 광주에서 전국에서 제일 약한 진보 민노당 표가 적게 나오는데 대한민국에서, 긍게 민노당이 숨을 못 쉬어.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 합법화됐으니까. 내가 와서 보니까 불쌍해서 못 봐 브러. 진정추 애들 진보정당 좌파 애들 대한민국에서 제일 약한 데야. 좌파. 사회 경제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봐서는 여가 좌파가 제일 강한 데여. 강해야할 곳이야. 그런데 왜 약하냐. 김대중씨의 표를 갉아 묵는 놈들이라 이거지. 인자 나쁜 놈들이야 쥐새끼같은 놈들이야. 근데 대중들은 무조건 독자정당 진보정당 이야기만 갖고 나오면 인자 죽일 놈 살릴 놈이여. 왜 그냐믄 저놈들이 한나라당이나 민정당표를 갉아먹는 것이 아니라 공화당을 꼭 김대중씨 표 갉아먹는 놈들이야. 사실이 맞거든. 한나라당 찍을 놈들이 민노당 진보정당 찍을 리가 없지. 그러니까 쪽수가 적다 이거야. 저쪽보다. 경상도보다. 그러니까 인자 저가 에를 들면 투표율이 80퍼센트면 우리는 99퍼센트를 해야 이길까 말까한테, 거기서 새끼들이 구멍을 내 갖고 갉아먹고 있다 이거야. 요놈 나쁜 놈의 쥐새끼 같은 새끼들이 이렇게 돼 갖고 여기서는 무조건 진보정당은 욕을 먹어. 비판 흔히 말하는 배신자 반역자 프락치. 이 프락치 소리 무지하게 많이 들었지. 백기완 선생부터 영삼이 돈 묵고 나왔다느니 통일교 돈 묵고 나왔다느니부터 시작해서 무지하니 박해를 받어요. 의사진보 특수를 누린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 특수를 깰라고 누가 불쌍한 사람들을 대변하는지가 드러나 브니까. 그걸 깰라고 그런 거여. 그러니 나는 들어오자 마자부터 여 내가 독자후보 지금 진보정당을 주장한지 알고, 내 귀국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한 7만 명 받았는데, 5만명인가 7만명인가 받았는데 그걸 진정추 애들이 받았다고, 좌파애들이. 긍게 자기 성향이 같은 줄 알고, 내가. 그래갖고 국회에도 제출하고 그랬지. 내 귀국 전에. 그러니까 들어와서 보니까 얼마나 웃긴 줄 알아. 이거 일환데 나는 인자 십여 년 만에 왔으니 광주 떠난 지 십삼 년이지. 도피생활까지 하면은 누가 누군지를 모르는데, 여기에 NL계에 전국연합회 계통에서 딱 인자 비서처럼 한 사람 붙였어. 그래갖고 인자 일정을 관리를 해. 나는 인자 뭐 누가 누군지를 어떻게 알 것이여. 친구들 얼굴을 잊어버려 가지고고 한참을 보고 알고 그랬는데. 근데 이라고 있는데 저기 누가 와갖고는 저 진정춘데요. 어 그래. 저희들하고 이야기할 시간을 좀 내주세요. 약속해. 무조건 갈게. 인자 어디 끼어들어갖고 진정춘데요. 그럼 이게 뭐 물어봐. 운동하는 친구들한테 거 민청 민청부터 요즘 그 진정추 애들 어떻게 지내? 그러면 뭐라 한 줄 알아? 자기들기리 서로 얼굴 요러고 쳐다보면서 요즘도 걔들이 있나 그래. 광주가 현실이 그래. 요즘도 그 애들이 있나야. 있는지 없는지도 몰라브러. 관심 밖. 그래서 내가 그 애들 만난다고 하니까 그래? 만나서 뭣할라고? 이런 식이지. 그래서 내가 무조건 후원회장이 되었지 내가. 민노당 후원회장 이었어. 광주. 그래갖고 선거 앞두고 후원의 밤. 얼마나 비참한 줄 알아? 여야 국회의원들 하면은 무등산 관광호텔, 이런데서 해. 한복 입은 여자들도 수없이 동원 많이 되고, 거기서 몇 천장 빌려서 해. 시 전체가 다 나와. 시당 차원에서 지구당이 아니라. 거 얼마나 모이냐 돈이. 내 돈 사십 만원 냈다, 내가 누가한테 이야기해서 백만원 내라했다, 백사십 만원 빼고 나면 오백만원이나 모여. 최고 많이 모일 때가 팔백만원이라니까. 시당 후원의 밤 행사에. 없어. 글고 인자 비참한 것이 NL계는 그렇게 탄압받았어도 분단 냉전 특수상황 때문에 맥이 있어 맥이. 민족을 내세우니까 그 민족이 갖는 신비감 때문에라도 사람들에게 감동을 일으킨다고 그것이 작용을 해 갖고 그 속에서도 맥이 이어져. 긍게 NL계는 국회의원도 있고, 장관도 있고, 여그 저그 들어가 있어. 이 뽈갱이는 싹쓸이를 해 버렸거든. 좌파는. 그란께 선배라는 사람이 없어, 그러니까 NL계 놈들을 얼쩡얼쩡하다가 선배한테 차도 얻어먹고 짜장면도 얻어먹고 취직자리 부탁도 하고 다니는데, 70년대 이후에 학생운동권에서 배출한 뽈갱이들은 노동운동쪽 나이가 지금 많아도 50이야. 지금 노회찬이 그 세대들이야 중심이. 그리고 그 위에 권영길씨니 모두 뽈갱이가 아니거든 중간이지. 중도야 거기는. 긍게 지금 40대 후반 정도가 1세대들이야. 맥이 끊겨 브렀으니까 일제하에서부터 싹쓸이 당해갖고. 걔 밥 사줄 선배도 없어. 취직 부탁할 사람도 없어. 예를 들면 내가 와서 보니까 진정추 애들이 한 것이 뭐하냐면 만화방, 그 다음에 생수배달, 목공소, 두부장사 대개 이래. 자본도 없겄다, 뒤 봐줄 사람도 없겄다, 취직도 안 되고 그래갖고 뽈갱이 누가 취직을 해. 그래가지고 바닥 박박 기는 거지. NL계 애들은 달라. 근데 하여튼 어떻게 어떻게 해갖고 민노당에서 인제 지방자치단체만이라도 비례로 해 가지고 처음에 인자 광역에 한 명씩 들어가고 그랬지. 내 조카가 지금 윤난실인데 거기 하나 들어가고 그랬는데. 조금 살만해지지. 그런게 인자 70년대부터 진보정당 수립 이야기만 나오면 운동권에서 브레이크를 걸어 븐게 NL계였다고. 무슨 소리하고 있어, 아 당 중앙이 있고 어쩌고 노동당 이야기죠. 조선노동당. 이러니 뭘 또 따로 만드냐 이것이야. 혁명소조처럼 하라면 하라는 대로 하지 말이 많이 이런 식이지. 비슷한 논리를 사이비 진보정당 그러니까 의사 진보 특수를 누렸던 애들이 그걸 또 강조한다고. 김대중 장학생이었던 김근태부터 시작해서. 김대중장학생이지. 국회의원 되기 전부터 한 달에 오백만원씩 줬는데, 문익환 목사하고 둘이. 그 사람들 입장에서 시기상조론 무용론 아주 교묘한 논리, 민주대연합론 이렇게 애매한 소리 하면서 그걸 계속 막아왔잖아. NL계가 아주 이를 갈았지. 애국자 중심으로 모여야 한다 김대중, 김대중.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나머지 뭐 특별히 할 거 있나.

3-1. 요즘 근황

면담자: 선생님 토요일 날 무안 내려 가신다구요? 이번 주 토요일날요? 장기적으로 가 있을 생각이세요?
구술자: 거기서 산다니까.
면담자: 이 집은 처분하신건가요?
구술자: 아니 여그는 내 아내가 살고 주말에 만나는 거지. 주말에 내려오고.
면담자: 아 선생님 결혼이야기도 들어야 되는데. 그것만 듣고 끝내면 안 될까요? 선생님의 연애사도 잠깐.
구술자: 뭐가, 쓸데없는 소리하고 있네. 한가로운 소리 하고 있어. 이 총체적 난국에.(웃음)
면담자: 아니 분위기를 좀 바꿔보기 위해서 (웃음). 선생님 그러면 아예 그쪽으로 터 잡으시려구요? 그러면 지금 하시던 것은 들불사업회.
구술자: 아 요것만 하고.
면담자: 선생님 은사님 있잖아요. 김용근 선생님
구술자: 그 회장직 다 내놨어.
면담자: 다 내놓으셨어요? 그럼 이거(들불사업회) 하나만 하시는 거예요?
구술자: (들불기념사업회 글을 읽으심) 저의 폐기종과 천식이 갈수록 악화되어 더 이상 사회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들불 기념 사업회 활동만 빼고는 모두 일에서 손을 떼고 요양생활에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민족미래연구소도 7월 31일을 기해서 문을 닫습니다. 모금액이 2억원을 돌파하면 이사장직도 사퇴하고 요양에 전념할 계획입니다. 저의 요양생활을 도와주는 셈치고 모금활동에 조금만 더 힘을 써주시기 바랍니다. (웃음)
면담자: 가슴 절절히 쓰셨네요. 선생님.
구술자: 아 인자후원만 내가.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실상사 작은 학교, 민족문제 연구소, 뭐 등등 그런 일 한달에 얼마씩 보내는 것만 하고.
면담자: 선생님 수익이 있으세요?
구술자: 내 아내가 벌지. 내 아내가 버는데 우리 집은 이중경제야. 북하고 비슷한데, (웃음) 가정경제는 내 아내가 꼬마들 영어 갈쳐 그룹과외해서 우리는 먹고 살고. 내 활동비, 품위유지비, 그런 것은 인자 후원해준 사람들 있으니까 그걸로. 근디 나를 우습게 보지 말어. 내가 비록 동가숙서가식 했지만 518전부터 국내에서 봉급생활 안하면서 자급자족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유일한 사람이야. 운동권에서. 나는 YMCA에서 근무한다던가, 어디서 근무한다던가, 출판사를 한다든가 그런 것도 아니고 이 사람 저 사람 책 사보라고 얼굴이 그게 뭐냐 보약 사먹어라, 속옷도 좀 갈아입어라, 그렇게 준 돈들 모아서 내 활동비 쓰고, 옥바라지도 하고 주변에 후원 활동비도 도와주고 현대문화연구소 꾸려가듯이. 고런 생활을 이미 70년대부터 했었다고. 미국 가서 칫솔하나 달랑 차고, 가가지고 12년 살 동안에 나 밥 굶은적 없고, 얼어죽지 않고, 각 지역에 센타 만들고, 지금 민족학교 같은 경우는 일년 예산이 몇 십만 불씩 돼 지금. 그렇게 돌아와서 재단 만드는데 3억 4천 모금하고부터 이거 2억 모금 김남주기념사업회 들불 추모사업회 모금하고 그런 거 내가 앞장서서 하지. 인자 그거야 돈이라는 것은 사람보고 줘. 프로젝트 보고 안줘. 전두환이가 하면 돈 안준다고. 믿을만한 사람이 해야 돈 주고. 그래서 나는 이를테면 설 되거나 추석 되면 형님 설 쇠는데 보태쓰쇼 그라고 이렇게 봉투 내 논 사람이 꽤 많고. 이번에도 병원에 들어가 있는데, 대외적으로 절대 비밀이여 챙피하게 뭐 폐렴으로 쓰러져갖고 감기 옮은게 아무도 오지마라 그랬는데 어떻게 아는 사람들 어떻게 어떻게 투병에 보태 쓰십시오, 입원비 쓰고도 돈을 상당히 벌었어. 나는 그렇게 살아. 인자 그렇게 번 놈 갖고 후원도 하고. 내가 술을 안해버리니까 그라고 내가 잡스런데다는 돈을 안쓰는 사람으로 소문난 사람이거든. 화투를 친다던가 술 퍼먹고 객기 부려갖고 노래방 가서 악 쓴다던가 그런 것도 없어. 내가 옛날에는 승부욕이 강했다고. 바둑, 장기 같은 거 지면 밤새도록 두자고 하고 못 자게 하고 그런데 운동하면서부터는 진짜 큰 승부가 뭔지를 안거야. 한 나라의 운명을 가지고 민족의 운명을 가지고 밀고 당기고 싸우고 있는데 바둑갖고 쌈하고 앉었고 이런 거 우습게 보여가지고 그 다음부터는 인제 누가 심심해서 두자하면은 즐기면서 두지. 이길라고는 안하고. 그러다보니까 나한테 돈이 오면 쓸데없는데다가는 안 쓰는 사람이라는걸 아니까, 인자 그런 신뢰가 쌓이니까. 그 다음에 내가 뭐 양복입고 머리에 뭐 바르고 폼 잡고 다녀야 그런데다 돈을 쓰는데, 지금도 나는 구두부터 시작해서 전부 얻어입고 그라고 옷은 겨울 되면 골덴바지 얼마나 따뜻하냐고. 속에는 양동시장에 만 삼천원짜리 내의 보온메리라고 해갖고 옛날 70년대 나온 두꺼운 내의가 있어. 인자 고거 떨어지면 품절되면 안 될 것 같아갖고 지금 세 벌을 사놨어. 지금 죽을때까지 입어블라고. 그놈 입어블고. 내가 그러고 산디 누가 뭐라고 할거야. 여 집도 내 여동생이 사준거라고. 금호지구에 12평 영구임대 아파트에 살았거든. 요(TV)받침 요것은 양동 가구시장에 가갖고 여기가 이라고 상처를 입어갖고 여기 한쪽에다 쳐 박아 뒀드라고. 반품한다고. 싸게 산 놈인데 우리는 그 시절을 잊지 말자고 하고 악착스럽게 이사하면서 갖고 와 갖고 살아.
면담자: 선생님 미국쪽에 선생님이 아직까지 관여하고 있는 것은 없는거죠?
구술자: 나는 인자 일종의 고문이지. 그래가지고 맨날 회원들 오고 가고. 일 년에 내가 한번씩은 가고. 그리고 여기 들불은 현재 1억 5천 얼마 모았는데 미국에서 재미동포들이 천 백 만원. 천 이백만원 모았구만. 같이 해. 북녘 동포돕기 운동 하게 되면 내가 여그서 돈 모아서 보내고. 내가 한 삼천만원 모금했을거야. 우리는 유엔 통해서(보냈어).
면담자: 선생님 518관련해가지고 선생님 보상받거나 그런 거는.
구술자: 응 받았어. 나는 인자 안할라 그랬는데 우리 작은 형님이 신청을 해 놔가지고. 할수 없이 내가 건강이 이래버리니까. 저거 두 개가 슬로우 쿠커 여그다가 인자 도라지 더덕부터 시작해서 온갖 폐에 좋다는거 모과, 한 열 댓가지 넣어서 여덟시간 중탕을 해가지고 짤순이 이 쓰레기 물짜는 건데 한약 짜서 마시고 요런 것만 해도 한 달에 한 사십 만원 들어가. 약재로. 환자가 돼 노니까.
면담자: 선생님 일년 내내 이러신건 아니죠?
구술자: 겨울이 힘들어. 겨울이. 그렁께 내가 보온메리가 어쩌고 추위에 신경을 쓰는 거야. 다섯 겹을 입어. 내가 나갈 때. 감기는 저승사자야 나한테는. 담배연기는 독가스고.

3-2. 518과 재단에 대한 평가

면담자: 마지막으로 518이랄지 재단이 잘하고 있는가랄지 선생님에 대한 견해랄지 선생님이 저희한테 해주고 싶은 이야기들 해주세요(웃음).
구술자: 근데 아니 인자 518이 어차피 거의 다 해결됐어. 518은. 진상규명부터 시작해서 전두환, 노태우 광주사람들, 518단체들도 사면 복권에 동의해버렸으니까 더 이상 할말도 없고, 역사적으로 이렇게 정리 잘 된 것이 없어 지금까지. 가장 가까운 시기에 일어났던 거 아녀. 과거사 진상에서도 광주가 제1호가 돼 버렸지. 나머지 부분은 미진한 부분들은 작가들 문인들하고 언론인들 중에서 학자들 중에서 더 파헤치고 할 사람은 있겠지만 이미 골격은 완벽하니 나와 있다고. 그런데 그 동안에 518이 정치적인 거품이 많이 끼였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우리민족 항쟁사에서 유일한 봉우리처럼 만들어 브렀지. 이걸 518을. 나머지 것들은 다 죽지. 그러나 여러 봉우리들 중에서 큰 봉우리일 뿐이지. 그 거품도 김대중 정권이 물러나면서 인자 빠지기 시작한 거거든. 정리가 되기 시작하고. 아마 정치적 비중은 다음 정권까지 유지될 거예요. 왜 그냐믄 현재로서는 한나라당이 다시 집권을 하게 될 건데, 그 사람들이 호남옹호 차원에서라도 자기 집권 내내 정치적으로 이걸 이용을 할거라고. 그러고나면 정치적인 거 하품이 빠지지. 인제 역사적으로 정리가 되고. 이번에도 새로운 자료들 나왔다고 하던데 518자료는 별거 없어 내용보니까. 비밀에 묻혀버리고 말지 핵심적인 부분들은. 하여튼 작가, 언론인, 학자들한테 맽기고 끝. 5월 단체들 부분도 이제 비극이지만 일단 보훈단체로 바꾸었다고 입지가. 그래서 인제 그것도 정치적 위상이 이제 바꾸었고, 이제 내는 기념사업 할 때도 강조해지만 결국 남는 게 이제 재단이야. 5월 기념하는 활동에서는 정신계승 차원에서. 518기념재단이 이제 잘해나가도록 고 부분은 내가 죽는날까지는 신경을 써야지. 왜 그러냐면 지금 내가 무안으로 병이 깊어가지고고 내려간다고 하니까 호시탐탐하고 있는 못된 사람들이 지금 준동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는데, 그 사람들 착각하고 있지. 못된 놈들이 이사장 되거나 상임이사가 되거나 사무국장 되거나 어떻게 해갖고, 일종의 권력처럼 기득권처럼 휘두르려고 하는데 그거 용납을 안 할거니까 그래서 5월이 제대로 기틀을 잡도록. 앞으로 5년 정도만 잘 나가면 기틀이 잡혀질 거라고. 왜냐면 이게 사학재단같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치적인 농간만 없으면 여기서 돈 빼먹을 수도 없는 구조고, 재단이. 그래서 그것만 한 5년 잘 막아주면 지금 출범 십년에 엄청 자리 잡았어. 초기에는 날마다 싸움이었지 싸움. 왜 그러냐면 저게 광주에서는 비정치권에서는 최고의 권력이었거든. 대통령이 되거나 어쩌고 하면은 시장하고 같이 대우를 해주니까 총장이 저 아랫니까 국립대 총장이. 이러고 대통령 앉히고는 한쪽에 518재단, 한쪽에 시장 이 정도니까. 그러고 전국 어디 가서도 해외에서도 518재단 이사장 그러면 위상이 있다고. 근데 그걸 노리고 장난을 많이 한 놈들이 있었다고. 내가 악착같이 저승사자가 돼가지고, 싸워서 욕은 내가 다 먹고. 그러고 재단은 이사진 선출 절차를 제도화 시켜 버렸기 때문에 이를테면 인제 부마항쟁쪽에서 한명, 거기서 추천을 해서. 제주 43에서 한 명, 그 다음에 민주 민변에서 한 명,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들 모임. 그 다음에 이제 유가협에서 한 명 그 다음에 이제 부산, 대구, 전북 이런 식으로 돌아가면서 그 지역 518단체들에서 한 명. 이 민언련 기자협회에서 한명, 시민단체 협의회에서 한 명 그 다음에 시 선출직이니까 시 의회에서 한 명 도의회에서 한 명 이런 식으로 이사진 선출 자체를 특정 세력이 좌지우지 못하도록 해버리고 거기에 이제 마지막으로 특정세력이 탁 들어갔지. 재단 창립을 했던 모임이 이제 창립 모임이 후원회로 바뀌었어. 이 후원회에서 네 명. 그 다음에 인제 유가족에서 한명, 부상자에서 한 명 구속자에서 한 명, 후원회에서 네명 이렇게 해갖고 열다섯 명이거든. 그러니까 이제 후원회 네명 구속자, 부상자, 유가족 서이 합해서 일곱명 밖에 안돼. 열다섯 중에서. 5월 관련 단체 관련자들이 과반이 안 되는 거지. 미달이지. 일곱 명이니까. 부산 대구 이렇게 돌아가면서 한다는 것도 후원회 네 명목 중에 한명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그래버리니까 5월 관련자들이 5월이 자기들 전유물인양 재단을 전횡을 할 수가 없게 돼있어. 그 다음에 그 단체들에서 추천해 오기 때문에 완전히 전두환 스타일이라던가 사기꾼 같은 애들이 이사장 되거나 그럴 수가 없어. 왜냐면 이라고 딱 보믄 보이는 눈을 가진 사람들이야 대부분. 산전수전 겪은 사람들이라 운동권에서 인제 사기꾼이 못돼. 그 다음에 이제 그런 사람들에게 이번에 이사장 뽑는데 신경을 좀 써야합니다. 누구누구요. 이런 사람입니다 하면 알아들을 사람들이야. 타 지역에서. 그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니까. 원로들. 그러니까 미치고 자빠지는 거야 이 5월 단체들이. 왜 그냐믄 저 5월 구속자에 누군데요 하면 모두 모르거든. 그 다음에 인자 이사회 할 때 보믄 요놈들이 그냥 무식한 소리 해쌌고, 말도 안되는 소리나 해쌌고, 그리고 광주 지역에서 이사장을 돌아가면서 주로 맡으는데 광주지역에서 원로라는 사람들이 순서대로? 어림 반 푼어치도 없어. 형편없는 사람들. 그냥 50대 초반으로 내려왔는데 금방 금방이지 세대교체가. 노인들은 다 해봤자 바로 우리들 윗 선배나 이홍길교수 그래 박석무씨 거기 63세대들이고. 지금 그 세대로 내려 온 거야. 그라고 또 한 몇 년 있으면 민청세력으로 내려오지. 지금 우리 세대들 60이 돼 가지니까. 그 다음에 긴급조치 9호 세대. 이렇게 내려가지. 그래서 보면 열다섯 살에 518에 참여했던 애들도 벌써 40이여. 40넘었다고. 인자 그 애들이 금방 50이야. 근데 그 애들 중에서는 재단 이사장감이 없어. 왜 그냐면 완전히 총 들고 뛰었던 시민군들이 인자 악바리들만 있는데 재단을 끌어갈 인물들이 없어. 인제 젊은 고등학생들이나 그 애들이 일부 참여한 애들이 있는데 애들이 곱게 못 커브렀어. 너무 굽어버려서 안되지. 그러면 완전히 새로운 세대들로 인자 바뀌겠지. 어떻든간에 재단 이사진 구성 자체 구조가 그렇게 딱 제도화 됐기 때문에 이제는 함부로 못하고. 정치권에서도 우리나라 정치권에서 여건 야건 유명정치인들이 자기 사람으로 재단을 장악해블고 이런 꿈을 못꿔블게 돼 있다고. 다른 공공 기관이라든가 정부 산하기관이라든가 사회단체 중요한 것들은 법인들은 벼라별 문예진흥위원회 어떻고부터 시작해서 전부 정치권 입김을 낙하산 타고 내려온다고. 여그는 못해 왜냐면 시에서 만든 것도 아니고 정부 돈으로 만든 것도 아니고 도에서 만든 것도 아니고 완전히 한 푼 두 푼 모아갖고 만든 개미재단이거든. 재단 설립에서 이런 경과를 거쳐서 만들어진 재단이 없어, 아예. 목돈은 내놓지. 큰 돈이라고. 전부 한푼 두푼 모아서 만들었거든. 해외 동포들까지 해서. 그러니까 개입을 못해. 정부권에서고 뭐고. 시장도 지 맘대로 못하고. 그래서 전망이 좀 있지. 내부에서의 문제점들은 거의 없어. 그 다음에 인제 직원들도 좀 맘에 안든 직원들이 많긴 하지만 공채 형식으로 했기 때문에 노조결성도 이사장부터 시작해서 노조 결성을 권했으니까. 인자 신분 보장하고. 당연하지 518정신이 뭔데 권위적으로 너 나가 그럴 수가 없지. 그렇게 해서 안정됐지. 재단이 희망이 있어. 그리고 인제 기금은 80억 정도 되는데, 부족하지. 다행히 정부 예산으로 해서 매년 20억 이상이 올해는 25억 정도 나왔다대. 나오니까. 대한민국에서 제일 커. 운동관련으로는. 여기 활동 자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운동이야. 범위가 좀 넓긴 하지만. 광주에서도 이렇게 재정적으로 물적 여유를 갖고 운동한데가 어딨어. 이것이 인제 말썽 없이만 잘 하면은 예산이 잘 안깎이거든. 말썽이 생기야 깎이제. 잘 해나가. 그러니까 요즘 아조 흡족해. 왜냐믄 나한테 뭔가 문제가 생기면 바로 나한테 들어오거든 그래갖고 나보고 인제 이것 좀 처리해주시오 부탁하는데 요즘 나한테 연락 없는 거 보면 아 잘 돌아가는구나. 인자 선거 때 되면 인제 이 후원회에서 이사 네명을 뽑아 올려. 그 속에 한 사람은 이사장이고 한 사람은 상임이사야. 이것이 내규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관행이 됐어 이제. 개똥씨를 우리가 이사장으로 추천합니다. 그러믄 인자 상임 이사는 또 인자 이사장이 또 추천을 해서 하니까 셋트로 해서 그라고 올려. 그라고 요 네명 이사 뽑을때 여그서 인자 표대결을 해갖고 낄라고 장난하지. 여그서 갈라져브러. 재단을 만들 때, 5원 단체들 관련자들한테서만 돈을 모았던 것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 그러니까 시민운동단체들이나 운동권출신들한테 참여를 종용을 했거든. 그래갖고 인자 참여를 했어. 근데 요 사람들 숫자가 5월 관련자들 숫자에 반 정도 돼. 반정도 되는데 이 5월 관련단체들 속에 또 전남대 총학생회생부터 시작해서 운동권 출신들 숫자가 많아. 그래갖고 합해보면 요쪽하고 과반이 돼. 그러니까 인자 선거 앞두고 이번에 개똥이 말똥이 닭똥이 소똥이로 하자, 그러면 그렇게 돼. 그러니까 인자 그걸 어떻게 뒤집어볼라고 나머지 애들이 별 짓을 다했는데 몇 차례 깨졌어. 그러니까 인자 포기. 긍게 내가 없어지면 닭똥 소똥이로 결정을 해도 통일적으로 안 움직이리라는 기대와 희망 속에서 못된 것들이 봄 되니까 벌레 나오듯이 이렇게 고개 내밀고 있는데 코뼈를 좀 분질러버려. 재단은 희망이 있어. 이제 한 오년만 있으면 안정 될 거야. 그렇게 되고. 인제 다만 프로그램을 생산적으로 잘 개발해서 나가야 하는데, 돈은 있는데 그것을 알뜰살뜰이 못 써버리면 문제가 있을 거야. 몇가지 성공적으로 안착된 프로그램이 있지. 예를 들면 518마라톤 같은 거 아주 성공적이야. 짧은 거리 마라톤이지만. 꼬마들부터 끌어들이라고 젊은애들 글짓기를 하는 것부터. 하여튼 나는 처음부터 기념은 계승이다. 계승은 교육을 통해서. 교육은 젊은 세대들을 상대로 미래를 내다보는것......
면담자: 선생님 앞으로 계획 같은 거.
구술자: 가서 도 닦고 건강관리하고.
면담자: 선생님 건강하세요. 다음에 또 기회가 되면 선생님께 정세교양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구술자: 정세는 나는 앞으로 그러기로 했어. 하도 남들이 비올 것이다 그러는데 해뜰 것이다 그래갖고 얼마나 그것이 외롭고 고달픈 것인지 몰라요. 이를테면 518때도 그렇고. 87년 대선에서도 그렇고. 그런 그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여 내가. 다들 저쪽이야 동쪽, 나는 서쪽. 세월이 흐른 다음에야 옳다는 것이 증명이 돼. 그믄 그 사이에는 증명 될 때까지는 고달파. 그래서 나는 5년 이후의 이야기는 안하기로 했어. 너무 고달파. 그것은 이론으로 되는 거 아니여 전망. 거기는 조끔 직관이라든가 통찰력이라든가 타고난 게 있어요. 정세분석 해보면 똑같은 정보자료를 제공했는데도 전망에서는 확실하게 차이가 나더라고. 그것 보면은 옛 사람들이 얘기하는 통찰력이든지 직관이 필요하다는 것이자.
면담자: 선생님 그 동안 몸도 안 좋으셨는데 세차례 인터뷰 하시느라고 너무 홀가분하시죠? (웃음)
구술자: 홀가분하지. 무안 내려오면 연락해.
면담자: 알겠습니다. 선생님 핸드폰 없으세요?
구술자: 있는데 번호는 안 갈쳐줘. 이번에 내가 응급실에 실려 가면서 겁이 나가지고 휴대폰을 준비했다고. 어디 가다가 문제가 생기면 얼른 119를 눌러야하니까. 이제까지 없이 살았다가 할 수 없이 이번에 했지.
면담자: 감사합니다.

윤한봉 구술녹취문(2차)

윤한봉 구술녹취문(2차)

■ 개요
구술자: 윤한봉
면담자: 박현정
면담주제: 5․18 항쟁사 정리를 위한 인물사 연구
면담일자: 2006년 1월 24일 오후 2시-5시(3시간)
면담장소: 두암동 자택
면담차수: 2차

■ 상세목록
1.
1-1. 신년맞이 등반대회
1-2. 민주구국선언과 구속
1-3. 두 번째 징역살이와 공부
1-4. 박정희 암살계획
1-5. 에피소드-간첩단 사건
2.
2-1. 생계유지를 위한 노력
2-2. 함평고구마사건과 쌀생산자대회
2-3. 황석영과 여성운동가 조직-송백회
2-4. 1978년 민주교육지표사건
3.
3-1. 민주세력결집
3-2. 동지애
3-3. 현대문화연구소
3-4. 문화운동-극단 광대
3-5. 방화사건 주모자로 연행과 물고문
3-6. 박기순의 죽음












1-1. 신년맞이 무등산등반대회
면담자: 오늘이 2006년 1월 24일이죠. 선생님 두 번째 인터뷰를 시작하겠습니다. 선생님 어제 75년도까지 해주셨죠.
구술자: 제가 75년도까지 했는데, 어제 이야기할 때 구속자 협의회를, 전남 구속자 협의회를 75년 봄에 만들어졌다고 했는데 4월 경이에요. 전남 구속자협의회를 만든 것이 4월인데, 잘 알듯이 4월 말일날 베트남전이 끝나고 그 다음에 통일이 되었죠. 그 이후로 이제 얼마 안 있어서 긴급조치 9호가 나오죠. 박정희 죽음 이후에야 해제가 되는데. 긴급조치 9호화해서 전국이 숨을 못 쉬게 된 거예요. 운동부터 모든 게. 그렇지만 구속자회 하나만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때 그 어려운 시기에 아까, 어제도 말했지만, 독으로 버틴거지. 이제. 서로 의지하고 격려하고. 하튼 그런식으로 버티면서 그 외도 그 정보기관의 그 못된 탄압과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주 지속적으로 학교를 들락거렸어요. 헤헤헤. 제일 많이 간 곳이 이제 도서관 앞이지. 그때는 거가 분수 같은 것이 없었는데, 연못이 없었어. 그때, 잔디밭이었어. 그래서 가끔 토끼도 뛰어다니고 쫓고 그랬는데.
면담자: 그럼 그때 용지는 있었나요
구술자: 용이는 있었지. 그렇게 갓을(겉을)꾸미거나 그러지 않고 그냥 흉측하니 못이었어요. 거기 가서 앉아있으면 인제 후배들이 지나가다 보고 하나둘씩 모여들어가지고 꼭 그옆에 둘러앉게 되요. 지금 생각해보면 일종의 노천학습 같은 것이지. 정규조직을 갖추기 보담도 요즘 말로 말하면 동아이라든가 그런거을 따로 안 정해놓고. 자연스럽게. 그러니까 저쪽에서는 계속 못하게 방해를 했죠. 내가 계속 나가는데 어떻게 해. 내가 뭐 어쨌냐, 내가 다니던 학교에 왔는데, 아니 그러면 교문에서 못 들어오게 막는다든지 자유롭게 드나드는데 잡상인도 드나드는데 왜 내가 다니던 학교에 못 들어와야 이런식이지. 계속 후배들하고 서클들을 여러 갈래들로 만들어가지고 접촉해서 학습하고. 그런 활동을 계속 했어요. 학교에서 보면 눈엣가시지. 이거 죽이도 살리도 못하고. 예를 들면 어제 이야기했던 아이스케익 판다고 악을 쓰고 다니는 거나 초지에 풀을 벤다든가 다 학생들을 자극하는 거고 교수들 자극하는데 하여튼 계속 그걸 했어요. 그렇게 해나가다가 76년으로 넘어가는데 거기에게, 내가 인자 미국에 있으면서 깜짝 놀란 건데 이, 신년, 1월1일이 되면 광주 시민들이 오일팔 이후에 무등산을 많이 올라간다고, 엄청난 숫자가 올라간다고 신문에도 나고 그러더라고. 씨익 웃었는데. 그 시작이 76년이에요. 76년 1월1일날 두암동이었는데, 그때는 여가 완전히 시내에서 동떨어진 시골 마을이었는데 윤강옥이라는 회원이 집을 가지고 있었는데 여기서 모여서 두암동에서 송년회를 하고 새벽에 걸어서 무등산을 갔어요. 입석대까지 올라가가지고. 해맞이 하고 악을 쓰는거지, 이제. 그리고 거기는 그때만 해도 어느 교회 청년부 같은데 교회 청년들이 한팀이 올라와 가지고 우리하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는데 우리가 그때 구시렁거렸던 것이 기억이 확실하게 나는데, 하여튼 모퉁이 돌고 나면 이 친구들은 모여서 기도하고 올라가고. 젠장 우리는 기도 안 해도 잘만 올라오는데 뭐 기도냐 구시렁 구시렁 하고 올라오는데 그 사람들은 해돋이 보면서 기도하고 우리는 저쪽에 떨어져가지고 박정희 꺼져라 유신철폐, 아 듣는 사람 없으니까. 새해 첫날 새벽에 악을 악을 썼어요. 그렇게라도 울분을 토하지 않으면 못 견딜 정도로 그랬었는데 이 76년 새해 첫 아침에 무등산에 올라간 것이 그 뒤로 계속 된 거예요. 그래가지고 80년 초 같은 경우는 아니다, 79년 초 같은 경우는 숫자가 단위가 200으로 올라갔죠. 우리는 민주가족이라고 그랬는데 교수들도 막 올라오고. 그렇게 규모가 계속 커져갔는데. 그것이 이제 이를테면 광주시민들의 무등산 새해 첫 아침 등반의 시작이었어요. 그런 정치적인 의미가 있었어요.

1-2. 민주구국선언과 구속
구술자: 그래 새해를 맞이했는데 이거 운동하다 보면 어떤 계기나 전기가 있는데 이 긴급조치 9호로 숨을 못 쉬고 있을 때 그걸 거기에 이제 숨구멍을 터준 게 3월1일 구국선언이었어요. 민주구국선언. 그때 당시 함석헌, 김대중씨 등등. 내노라하는 유명 인사들은 거길 다 들어갔죠. 이제 윤보선씨라든가 해서. 그래서 이제 이 구국선언이 발표가 됐는데 문제는 언론에서 그것을 다루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79년 10월 17일 유신체제가 선포딘 이후에도 언론들이 그렇게까지 숨이 막히지는 않았는데 베트남전 끝난 이후 긴급조치 9호가 내려진 이후부터는 모든 언론이 숨을 못쉬어, 숨을. 기사를 못쓰고. 인자 각지가 술렁술렁 해져요. 소문으로 들려오고 다 구속되고 그랬으니까. 그래 구국 선언 내용을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이제 북쪽 방송을 듣고 그래봤는데 내가, 도저히 안 되겠어. 좀 확실하니 전문을 입수해야 할 필요가 있는 거 같아서 어떻게 서울에 가가지고 나상기한테서, 거기는 이제 기독학생운동하는 친구라 민청학련 출신이고 인제 상기한테서 교회 쪽이라 캐나다 토론토에서 발간되는 우리 동포, 캐나다 동포 전충민씨라는 사람이 발행하는 뉴코리아타임즈라는 신문이 있었어요. 주간지인데. 그 주간지에 인제, 해외에서는 발표가 됐으니까. 해외 언론에서는. 거기에 실린 민주 시국 선언 전문이 실려 있드라구요. 그 신문을 입수했어요. 그걸 가지고 내려와 가지고 그런 것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그때는 긴급조치9호가, 9호가 되니까. 여러 가지로 교회 저쪽 성결교회. 성결교회에서 마침 기독학생회 그쪽에서 이제 학습을 하는데 나보고 이야기 좀 해달라고 해서 가가지고 내가 그걸 좀 읽어줬어요. 알고는 있어라 나라 원로들이 참다 못해서 이러고 있다. 백발 휘날리는 노인을이 이라고 있는데 우리 젊은 놈들은 멀쩡해가지고 있으니까 영 그렇다. 뻔하잖아요. 자극적인 이야기좀 해주고. 그게 4월 중순일건데. 그후에 4월 19일날, 4월 19일이 돼서 또 학교를 나갔죠. 4월 19일 날 되고 그랬으니까 더 가고 싶죠. 거기 가가지고, 문리대학교에 묘가 있었는데 그 묘 부근에 앉아있으니까 또 후배들이 모여들어서 이런 저런 이야기 하고 있는데 그 학교 출입하는 서부 경찰서 형사 하나가 얼굴들을 알지, 자꾸 보니까. 날더라 나가주라는 거야, 학교를. 그래서 왜 또 그러냐고 그러니까 오늘이 4월 19일인데 염려된다. 서로를 위해서 우리를 도와준다고 생각하지 말고 자신을 위해서라도 학교에서 나가주는 것이 좋겠다. 이라고 인자 잘못했으면 잡아가라, 그러고 있는데 문리대 앞에 벽돌, 빨간 벽돌로 된 문리대 벽돌 건물있죠? 헐려고 하다가 못한 거. 그 앞에서 학생들이 모여서 웅성웅성하고 누가 선언문을 읽고 어쩌고 하고 있어. 그리고 딱 보니깐 기독학생회 나왔던 김영종이라고 나중에 사계절 출판했던 친군데. 이 친구가 여기서 성명서를 읽고 앉았는 거야. 그러니 형사고 뭐고 그리고 튀고 난리가 났지. 순간에 아차, 이거 내가 잘못 걸렸구나 얼른 나와 버렸어. 학교에서 웬걸, 이놈잡아다가 족치는데 이 친구가 경험이 없어노니까 인제 또 인제 민주구국선언 이야기를 이 친구가 취조 받는 과정에서 한 거야. 원로들이 이렇게 해서 내가 참다못해서 이렇게 했다. 너 그걸 어떻게 알았냐. 어쩌고 하다 보니까 내 이름이 나온거지. 그러다보니까 서부경찰서 정보과장이 보자고 한 대. 그래 좋다고 가자고. 좋다고 갔는데 딱 들어가니까, 이래저래 했다매? 그래서 그냥 깔깔거리고 있었제. 어처구니가 없지만 어떻게 할거야 안했다고 하기도 그렇고. 후배들이 이야기 해버렸는데. 아이고, 바깥생활 안 그래도 고달프고 그런게 한 오년 푹 썩다가 나와야겠소, 갑시다. 한 오년 쉴라요. 그렇게 해가지고 들어가게 됐는데, 그게 인제 두 번 째 들어간 거예요.
면담자: 아, 그래요? 이게 부활절 사건이라는 건가요?
구술자: 그게 그때 기록들이 엉망이에요. 무슨 부활절 사건이야. 그러니까 교회쪽에서 운동사를 70년대 운동사 같은 것을 만든 것이 있더라구요. 거기 보면 나는 교회에 대해서, 교회에 다닌지 어쩌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징그럽게 싫어하는 것이 이를테면 열명이 모여서 일을 했어요. 그런데 거기에 교인이 한명 끼면 종교계가 주도한 것으로 꼭 이걸 왜곡해서 써먹어요. 꼭 그래. 아주 못된 풍토가 있는데 그게 뭐가 부활절이야, 4월 19일 날이 부활절인가, 그래가지고 그때 이제 끌려간게에요.

1-3. 두 번째 징역살이와 공부
구술자: 그래가지고 졸지에 인제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해가지고 1년6월 선고받았죠. 그래가지고 통산해서 손해 본 것 합치면 20달 살고 나왔는데. 두달 더 살아서. 20개월 살았는데 광주교도소에서 2심 끝날 때까지 징벌방에 독방에 있었고. 그 다음에 대구교도소에 가가지고 나머지 기간 채우고 79년 12월 7일인가 8인가 석방 됐을 거야. 근데 인제 그렇게 해서 내가 들어와 있는데 영종이 그놈도 들어오고 영종이 그 친구는 1심에서 집행유예로 나가고 그럴 때 인제 이를테면 아까도 말했지만 계기가 된 거죠. 구국선언이. 그래서 그 교회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그래서 전국 도치에서 인자 긴급조치 9호 위반 사건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는데, 광주에서도 8월달에 목사님들이 모여서 구국기도회니 뭐니 해가지고 그때 윤기성 목사, 강진에 계신 윤기성 목사. 무안에 조홍회 목사 강신석 목사 이런 분들이 교도소로 9호 위반으로 들어오고 왜냐하면 3․1 구국선언에 문익환 목사랑 교회사람들이 많이 들어가 있으니까 그리고 그걸 계기로 해가지고 기장 청년회, 구국 기도회 하고 뭐 하고 그래가지고 이 사람 구속, 저 사람 구속 그래가지고 교회운동이 확산이 됐죠. 하여튼 민주 구국 선언사건은 원로들이 제 값을 한 거예요. 어떤 계기를 만들어줬으니까. 어떻든 그렇게 되고 나는 이제 독방생활 하면서 충전을 하자 해서 죽어라고 책만 봤죠. 내가 면회 온 후배한테, 내가 하루가 24시간밖에 안된다는 것을 그렇게 아쉬워할 수가 없다. 48시간 내지 72시간으로 늘었으며 좋겠다, 매일. 책보는데 미치것다, 시간이 짧아서. 그러니까 아주 오래오래 잘 사쇼 공부만 많이 하쇼. 나보다 성질 내더라고. 내가 어느정도 책을 봤냐면 여가 부어버렸다고, 눈이 부을 정도로 공부를 했어요. 눈두덩이. 인자 백열등 희미한 걸 높이 달려노니깐 눈이 시럽고 난리야. 화장실 뒤에가, 창도 닫아불고. 자살 못하게 하려고. 밑에가 환기통 요만한 것이 있는데 고 밑에서 인제 그 자연 햇살 좀 받아볼라고 한디 직접 들어오진 않지. 반사광이긴 하지만 거기다 놓고 보고. 운동시간 빼놓고 죽어라고 책을 보니까 돌아다니던 간수가 무슨 고시준비할라고 들어온 것 같다고 맨날 그랬는데. 그때 인제 역사 공부를 한번 체계적으로 하는데 내가 언제 체계있게 공부를 한 적은 없었으니까. 그래서 인문사회쪽이 구멍이 많았는데 또 내 스타일로 역사 공부를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가? 그래가지고 좋았어! 하루종일 내 역사공부를 어디서부터 시작해냐 하가지고, 우주 역사부터 시작하자. 우주의 역사에서부터 좁혀오자. 세계사, 동양사, 국사, 국사에서 고대사부터 해가지고 현대사까지. 그래가지고 책을 넣어주면 별들의 역사부터 책을 넣었지 역사를 하다보니까 또 고대사를 하다보니까 고고학분야의 용어가 너무 모른 것이 많아요. 고고학 책을 넣어라 해가지고 고고학을 하고, 종교부분도 내가 스님들하고 목사님들하고 신부님들하고 이야기하고, 내가 뭐를 모른 채로 몇 마디 들은 것으로 해가지고 기독교에 대해 뭐라고 떠들고 불교에 대해서 떠들어봤자 그 사람들이 척 하면 알죠, 내공을. 경전 하나를 안 읽고 무슨 소리를 하나. 비웃어버리면 내가 말이 먹혀들 수가 있나. 또 그 전문가들한테 들은 이야기하고 내가 한 이야기하고 비교했을 때 아무래도 신도들이 내말에 끌려올 리도 없고, 의식화의 절대적으로 무장이 필요하다. 전부 경계를 해가지고 교회, 기독교 경전, 그래가지고 내가 신구약을 8번까지 읽었는데 거 신학서적도 보다보니까 어려운 말이 많아요. 무슨 신학사가 불교부터 시작해서 야튼 우리 천도교까지 고루고루 인제 죽어라고 봐가지고 머 나는 누구 지도받은 적도 없고 혼자 내 나름대로 읽으니까. 내 나름대로의 관점을 갖게 된 거지. 근데 그게 나중에 나와서 이야기를 해보고 그러면 고게 좀 신묘하더만, 효력이. 왜 그냐면 전혀 생각지도 않은 이야기를 맨날 빵빵하니깐, 그랬는데 하여튼 지도받지 않은 내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그런 내 나름대로의 견해나 관점이 상당히 효력이 있더라고. 근데 어떻게 밖에 나가서 다시 운동하는데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보자 그렇게 해가지고. 공부를 체계 있게 많이 했죠 두 번째로. 내가 그 출소한 이후를 생각, 대비해서 두 번째 공부를 했던 이야기여. 그러다보니까 어제 이야기 중에 바진 것 중에 첫 징역살면서 출소한 이후에 나가서 무엇을 할 것인가 준비할 과정에 뭐가 있었냐면 우리 큰형님이 듣고는 에끼, 징한 놈이라고 그랬는데 이제 75년 초가 되니까 교도관들이 와서 귀뜸도 해주고 면회갔다온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곧 석방이 될 거 같애. 나가서 바로 활동을 시작해야 할것 같다. 근데 그럴라고 보면 뭐가 제일 필요하냐. 나는 이제 민청학련 사건 준비과정에서도 뼈저리게 느꼈지만 돈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요. 맨날 운동가들을 자동차에 비유하는데 휘발유, 가스 없이 자동차는 굴러갈 수 없다.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서 나가서 학교 다니니까 부모님이 뼈빠지게 학교보내노니까 딴짓거리 하고 징역이나 살고 나오니 자식들한테 부모님들이 용돈 줄 일도 없고, 쉽게 돈 벌 수 있는 기회도 없고, 당장 운동을 할려면 비상 자금이라도 필요하지 않는가 해가지고 영치금 엠네스티에서 넣어준 놈, 윤보선씨가 넣어준 놈 이런 것들이 넣어준 놈 별 먹고 싶은 찐빵 뭐 통닭 짜장면 죽어라고 안 먹고 그 돈을 모았어요. 출소하고 나가서 활동할려고. 돈을 상당히 모아 갖고 나오니까 이 먼 돈이냐 그런게 모았다고 하니까, 예끼, 징한놈. 두 번째는 돈보담도 운동하는데 필요한 이론 무장이죠. 그런 준비를 했죠. 나는 사상무장이라는 차원에서는 별로 노력을 해본적이 없어요. 이론무장을 했지. 그러다가 내가 대구로 이감을 갔는데, 대구에서 충격적인 경험을 했던게 거가 좌익수들 비전향장기수들 전용사동인데 거기가 인제 긴급조치 위반 정치범들을 같이 섞어 놓은 거죠. 그때당시 환경운동 개척했던 최열이라든가 있었는데 이제 장기수 할아버지들이 이제 나한테 가르쳐준게 있는데 그게 뭐냐면 어느날 이제 독방에 앉아있는데 또을 푸는 친구들이 이제 출력하는 친구들 중에 그걸 하는 친구들이 옆방, 옆방 장기수 할아버지한테 묻는 소리가 들리더라고. 할아버지, 여그 독방생활 얼마나 하셨어요? 그니까 고독하니까 꼭 똥 풀때 내다본다고, 나가서 사람들이 보고 싶고 그러니까. 거기도 뒤가 막혀있고 밑에 구멍 있고. 그니까 그 안에서 한소리는 안들리지. 그 물었던 일반수가 충격 받아가지고 떨리는 목소리로 되묻는 목소리가 들리더라고. 28년이요? 그러더라고. 28년간 독방생활 했다니까. 인제 그말을 듣고 내가 막 상당한 충격을 나도 받았어요. 그니까 내가 민청학련사건 때도 15년 받을 때도 씨발 다 살야 정치적인 것이니까 언제라도 나갈 것, 또 쉽게 나왔고. 받아봤자 이번에 1년6월, 77년 말이면 나가고. 28년이라! 그게 전향한 사람은 독방에 안 있거든요? 일반수 방에 함께 있으면서 출력하는데. 자기 신념, 사상을 지키기 위해서 28년간 적지에서 북에서 넘어온 사람인데, 이렇게 지킬 수 있는가. 이미 인제 민청학련 사건 때 들어가가지고 우리가 들어오기 직전에 폭력적인 살인적인 전향공작이 진행된 직후였어요. 우리가 민청학련 들어갔을 때, 그걸 들었거든. 그 소리를. 대전에서도 듣고. 얼마나 혹독한 고문들을 했고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구가 되거나 죽거나 자살을 했는지. 적지에서 그 모든 전향공작에 고문부터 회유가 엄청 났을 거고. 특히 인제 그 당시 70년만해도 조금 먹기가 나았는데 전행 전후 이런 시기, 특히 50년 때 그런 때는 밥도 형편없이 적었다는 것을 다 아는 이야기고 일반 사람들도 다 아는데. 인간 이하의 어떻게 보면 대접을 받으면서 극도의 그 영양결핍 속에서 철저하니 고립된 적지에서 모진 고통고문을 이겨내면서 적지에서 28년을 살아낼 수 있을까, 나 같으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봤어요. 그리고 28년으로 끝난 것도 아니여. 앞으로도 계속 될 거고.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이 저렇게 28년 30년 40년 저렇게 자신을 지켜낼 수 있읆나한 확고한 내 나름대로의 신념의 체계가 서지 않는 한, 사상 이념적으로 서지 않는 한 함부로 내가 무슨 주의자니, 마니 하는 그런 류의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 내가 할 수 있는 자신이 확실히 섰을 때만이 내 사상에 대해서 구체적이고 공개적으로 사람들에게 호소하겠다. 그러한 다짐을 했어요. 그래서 함부로 그 사삿ㅇ 이념에 대해 뭐라 뭐라 이야기 하는 것을 철저히 조심하고 있어요. 그 다음부터.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더란 거여. 그때 혼자 독방에서 종일 그 생각을 했거든요. 그러니 거기서도 죽어라고 이제 공부만 했는데 교도소가 좋은 학교라고. 최열이는 죽어라고 그때 공해문제에 대해서 공부했어요. 다른 거 안하고 그것만. 그래가지고 나와서 공해문제연구소 차려가지고 한국 운동사에서 환경운동에 개척자가 된 거에요. 그쪽으로. 나는 인자, 어느 한 부문 운동하는 것이 체질에 맞는 성격이 아니라 온갖 것을 다 손을 댔는데 일종의 조직운동가 스타일이죠, 내가. 그래서 나는 뭘 하다가 요분야가 내가 필요하다 그러면 그것을 집중적으로 파는 이런식으로 공부나, 그래서 나는 주로 상정을 했어요. 이러이러한 사람을 만났을때, 내가 그 사람을 과연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무슨 전도사들 연습하는 식이지. 그런 입장이었어요. 하여튼 거기서 장기수 할아버지한테 받은 충격이 상당히 컸어요. 그때 이제, 우리 어머님이 건강이 어쩌냐고 면회를 오고, 와서도 이해를 하고 부모님에 대한 그 효도, 효도 문제를 가지고도 이것도 정리를 확실히 하자. 대전 교도소 있을 때 교도관들이 효도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 그래서 어머니의 얼굴 부끄럽게 하는게 불효고 떳떳하게 하는 것이 효도라고 그런 식으로 하고 넘어갔는데 이 효도 문제도 내가 넘어야 할 산이다 그래가지고 이제 고부분에 의해서도 이제 낑낑거리면서도 정리를 한 것이 이제 아주 내가 어머니라는 시를 쓴 것이 있는데. 「나의 어미니」를.
면담자: 봤습니다.
구술자: 봤어요? 그런 식으로, 어머니도 그렇게 정리하는 거예요. 제일 뒷부분은 518이후의 것을 덧붙였죠. 거기에. 모든 어머니들, 이땅의 역사 속 어머니들은 모든 이따으이 고난받고 수탈당했던 어머니들은 나의 어머니다 이렇게 정리를 했어요. 그런, 그 당시에 진짜 그렇게 알차게 했는데, 이 요놈들이 나보고 전향을 하라는 거에요. 내가 무슨 전향이냐고 그랬더니 국가보안법이 민청학련 사건 때 들어있으니까 그때 당시에 전향 안ㅎ고 나왔다 그거에요. 그러니까 전향을 하라 이거죠. 미쳤다고 쏘아 부렀는데, 보안과에 가서 악쓰고 그랬는데. 나와 부렀는데. 근데 그게 어떻게 되었냐면 당시 상황이 에, 민청학련 사건 때 들어가 가지고 받은 형 집행을 정지해가지고 나왔거든요? 구속집행정지로? 형이, 그니까 형 집행정지지. 그러지 형이 종료된 것이 아니거든. 근데 지금 장영달 열린 우리당 의원이 긴급조치, 민청학련 사건으로 우리랑 같이 들어갔었는데 석방됐다가 2․15조치로 석방됐다가 긴급조치 9호로 들어가 가지고 수사과정에서 대들고 어쩌고 저쩌고 하다가 형 집행정지가 취소되어버렸어요. 그래가지고 장영달이가 졸지에 7년인가 더 살아버렸어. 남은 외상 값을 갚은 거지. 그런 선례가 있었어. 내가 알고 들어갔거든 이제. 장영달이가 목포에가 있었는데. 이놈들이 위협을 하는 거에요, 이게 당신 전향 안하면 형 집행정지가 취소된다 그거여. 그러면 남은 14년 외상까지 살아야 하니까 당신은 앞으로 16년 정도를 더 살아야 한다. 와 이새끼들 아조 신경질나게 하데. 근데 말은 맘대로 하라고. 50년이 아니라 100년 뭐시 어쩌고 뻥을 쳐놓고 이제 들어오긴 했는데, 찜찜하제. 하도 단호하니 전향이라고 해서 대체 내가 어디서 어디로 전향을 해야, 내가 자유민주주의잔데. 그러면 저쪽은 사회주의로 전향을 해야. 전체주의로 전향을 해야. 뭐 어쩌것냐 그런 식으로 하고 인제 오고 끝냈는데 그런 상황에서 이제 엉뚱한 일들이 터져서 난리가 났는데.

1-4. 박정희 암살계획
구술자: 이게 어제부터 지금까지 광주 운동사에서 있었던 일을 공식적으로 사석에서는 몇 군데서 이제 이런 일이 있었다 말하고 넘어갔는데, 공식적으로는 이제 언급하지 않은 사건이 하나 있어요. 이 사건을 말을 할까 말까 하고 생각을 많이 했는데. 어차피 내 건강도 그렇고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또 이제 공소시효가 지났어요, 이게. 인제 말해도 돼. 에. 76년 7년 사건이나까 음...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의 공소시효가 15년이거든. 그래봤자 2002년 정도 되면 다 끝난거야. 근게 공소시효가 한참 지나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데. 그래도 할까 말까 하다가 518기념 재단이 임의단체도 아니고 두고두고 이런 활동을 할텐데 기록을 남길 필요가 있겠다 싶어서 관련자들의 동의는 내가 안구하고 에. 심정적으로 충분히 동의를 할 몇 사람 이름을 거론하는 것으로 하고 그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먼 일이 있었냐면은 어제 내가 이야기할 때, 4월 9일 75년 4월 9일. 인자 전남대 도서관 앞 잔디밭에 앉았다가 인혁당 관련자 8명 사형당한 이야기를 듣고 내가 악을 썼다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그걸 계기로 해가지고 어떻게 마구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던지 아, 요 정권에게 유인물이나 뿌리고 시위 집회나 하는 식으로 하고 도저히 엄두가 안나. 참아낼 수도 이겨낼 수도 없고 오래걸릴 것 같고. 그래서 봐불라면 적장을 보라고 박정희를 암살을 해야겠다는 독한 마음을 먹은 거예요. 그래가지고 박정희 암살 계획을 세웠죠. 추진을 했죠. 한명 두명 이제 끄집어들였죠. 우리 이래가지고 어느 세월에 이 무지막지한 학살 정권, 독재정권을 꺼꾸러들일 수 있겠느냐. 적장ㅇ르 봐블자. 그래가지고 인제 한 일곱 명, 일곱 명 정도 끌여 들였죠. 나까지 해서. 근데 그 중에 나를 포함해 네명은 이름을 인제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 사람이 인제 5월 항쟁 당시 지도부에 외무부장을 맡았던 그 사람인데, 정상용 국회의원도 했었죠. 71년 교련반대 시위 때 강제 입영되었던 친구죠. 학교도 그냥 자퇴를 해버렸어요, 이친구가. 교수들한테 교수님의 기름기 낀 얼굴과 튀어나온 배를 보고 강의를 계속 듣는다는 것이 곤혹스러워서 그만둡니다 그런 식으로 해가지고 자퇴를 해분 친구들이 둘이나 있어요. 강제 입영당했던 친구 중에. 그 친구주 하나가 정상용, 하나가 이양현 그런데. 인제 어쨌든 간에 정상윤하고 내 매제인 박형선이하고 그 다음에 이제 농민운동하다가 나중에 남민전으로 들어가서 혼나고 나온 조개석이라고 있어. 거리해서 나까지 네명, 나머지 세사람이 있는데 인제 추진했는데. 세 사람은 동의를 구해야 하는데 공직에 있기도 해서. 그때 내가 이야기를 하기를 우리가 무슨 특수 훈련을 받아가지고 저격할 수 있는 그런 능력 있는 사람도 없고 그런 사람 찾기도 어렵고 그런 성능 좋은 총도 구입하기 어렵고, 영화에서 나오는, 그러니까 그런 정밀한 방법으로의 암설은 포기하고 너 죽고 나 죽자 식으로 해서 폭탄으로 봐버리는 방법을 찾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제 수류탄하고 다이너마이트를 구해서 가까운 거리에서 자폭 형식으로 안고 뛰어드는 그 방법밖에 없다. 확실하니 봐불라면 그 방법밖에 없다. 그래서 그것에 동의해갖고 내가 그 중에 한 사람을, 인제 물었어요. 어디서 이걸 구할 수 있는가. 이렇게 저렇게 구할 방법이 군대 밖에 없어요. 수류탄. 그래서군에 입대해 있는 좀 말이 통하는 선후배 친구들을 찾다가 어떻게 어떻게 해갖고 이제 찾아서 수류탄을 세 개 확보하고 인자 다이너마이트를 두 박스 뇌관까지 해서 확보하고. 준비를 해놨는데 근데 그때 양이 덜 차. 더 많이 준비해서 하나가 실패하면 또 봐불고. 이런 식으로 할라고. 이제 그 작업을 비밀리에 진행하고 있다가, 그러면서 내색 전혀 안했지. 그 쪽에서 갑자기 내가 활동을 안하고 딴짓거리 하는 것 처럼 보이면은 저놈들이 이상하게 생각해가지고 집중적으로 또 사찰을 다닌다 그래가지고 계속적으로 평상시에 하던대로 움직이면서 그 작업을 조용히 추진하다가 인자 (교도소에)들어가버린 거예요.

1-5. 에피소드-간첩단 사건
구술자: 인제 나는 나가서 그 작업을 해야 하니까 준비해놓은 것도 있고. 그러고 있는데 어느 날 인제 우리 형하고 하튼 누가 면회를 왔어요. 근디 이제 직계가족이 아니면 면회를 안 시켜줬기 때문에, 대구에서는 형선이가 내 메가 왔는데 이 친구가 못 들어오고 창문 밖에서 이라고 손만 흔들고 갔어요. 면회를 했는데 인제 그때 그래요. 형선이가 책 가져와서 책 넣었다. 알렉세이『뿌리』 들어왔는데 아 인제 당연히 그날로 책이 들어와야 하는데 책을 안 넣어줘요. 독촉을 했지. 왜 안 넣어주나. 안 넣어주고 그날 넘어가. 그 다음날 또 안와. 막 문을 차고 왜 책을 안 넣어주냐고. 그런게 이제 책이 들어왔어. 그래서 이제 재미난 소설부터 먼저 읽는다고 해가지고 알렉시이 『뿌리』를 보는데 한참ㅂ 읽다보니까는 볼펜으로 활자 사이에다가조. 딱 하나 쓰였어. 예감이 이상해서 살펴가면서 보니까는 조. 그 뒤에 글짜 써진거 보니까 적, 의, 명, 령, 이, 오, 빨리 나오시오. 그래놓고 뒤에다가 인자 자기들 별명을 늘어놓은 거에요. 이 원수들이. 하마, 참새, 이러니 뭐 이러고. 그러니까 그 때 교도소에서는 이 책을 돌려보거든. 보고나서 다른 사람 주고 그랬는데. 근데 누가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그런디 나는 또 생각없이 볼펜으로 째깐한 글씨니까 지위부써 이제. 그래갖고 이제. 그랬는데 그 다음날 운동을 갔다 왔는데 그 시간에 이놈들이 들어와가꼬 책을 글씨를 어떻게 했는가 본 거에요. 내가 안지웠으면 넘어가는 건데 지위노니까 문제가 된 거에요. 나중에 사건이 끝나고 보안과에서 가서 기록을 보니까 처음에 책에 대해서 대장에게 ‘불허’, 그래갖고 ‘낙서’. 근데 그 다음에 이걸 끗고, ‘허가’ 그래놓고는 가로 해놓고 ‘공작상’ 그라고 써 있드라고. 공작상 어떻게 된가 하고 넣어본 거에요. 거기에 내가 걸린 거죠. 아, 이거 뭐가 있다 이렇게 생각한 거에요. 우연히 그놈들한테 걸린 거지. 아니면 형선이가 바깥에서, 거기서 썼대. 나중에 들어보니까. 면회서 앞에서 소파에, 벤치에 앉아가지고 이러고 쓴 거야. 딱 그날 오후에 사복 입은 놈들이 들이가 와 가지고 나오라 해. 뭐 먹은 약이 있으면 가져오라고. 없다고. 따라나가서 대구 정보부 지하실로 끌려갔지. 가가꼬 뭐 뻔하지 뭐. 거기야 뭐 의자 딱 콘크리트에 박혀있는 고정된 팔걸이 의자에 딱 앉으면 양쪽을 채워버리면 옴짝달짝 못하지. 그 앞에 책에 녹음기, 백열등, 강한. 저쪽에서 쏘아버리면 저쪽에서야 내가 훤히 보이겠지만 나는 모습은 안보이는. 목소리만 들리는 식으로 갖춰져있는 것이지. 침상하나 있고, 갔더니 박형선이가 뭐라했냐고. 내가 무러 알것이여. 갔더니, 하나 둘 셋 한 열명이 들어와 가꼬 앞에 서고 책상 옆에 서고 뒤에 서고 그라고 나만 보고 있는 거야 이렇게. 꼴아보고 있어. 째려보고 이러고 앉아 있는거지. 뒤에서 몇 명이 보고는 옆에서 앞에서 보고 그라고 이제 그 숨 막히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나서는 본적 이름부터 묻기 시작해서 몸담고 있는 조직에 대해서 다 이야기하라고. 나는 뭐 끌려올 때부터 아이쿠야, 이젠 전부다, 눈앞이 캄캄하지. 그래, 초등학교 동창회 그 다음에 동창들끼리 맺은, 묻는다고 하지, 계모임. 그 다음에 전남 구속자 협의회. 그거밖에 없으니까 나야, 나야. 그래가지고 그것에 대해서 하나 하나 동창 계는 누구누구 들었고 뭐 하고 언제 만들었고 어쩌고 구속자회는 뭐가 어쩌고 여기(책) 왜 지웠냐, 이게. 나한테 이런 모임이, 조직이, 동창이 이런데서 명령이라는 용어를 쓸 수 잇는 조직이 있냐. 구속자회는 니가 회장이었지 않냐. 그게 무슨 협의회들, 친목모임 같은 건지 우리가 다 아는데 먼 명령이냐. 그러니까 이사람들이 하마, 참새 뭐 이런 것들을 이제 일종의 간첩들 접선할 때 이름 그렇게 생각한 거에요. 딱 그놈들 입장에서는 그렇게 보이게 생겼지. 모르것다고 이제 나 나믈대로 인자, 내가 월부책 장사를 잘해서 에, 돈 좀 벌어보자고 제안을 여러 친구들이 했었는데 그래서 참새는 정상용이라고 하는데 꼭 참새같이 이쁘장하니 생겨갖고 여자들 잘 후리게 생겨갖고 그래서 제비라고 부르고 하마는 하마같이 생겨서 하마라고 그러고 박형선이는 어쩌고 저쩌고 해가 지고 인제 같이 나와서 장사하자는 이야긴지 운동을 계속 같이 하자는 이야긴지 내가 여기 안에서 알 수가 없다. 인제 그런 식으로 변명하는데 요놈들, 흔적 안 남게 하느라고 여기 저기 치는 거지. 숨 막히게 치고 여기가 급소거든. 길길이, 물어본 것 또 물어보고 그래갖고 인자 내가 3일간을 출소 일주일 앞두고 에요, 일주일을 앞두고. 인제 이미 그때는 출소한다고 그래갖고 머리 깎았던 것도 두달 반 전부터 길어갖고 두발이 상당히 길었을 때에요. 그러니까 인제 묻는거지. 그렇게 계속. 그런데 그 시간에 인제 나중에 인자 확인해 본께 먼일이 있었냐면 딱 내가 이걸 지운 것이 드러나자 정보기관에서도 그러더만. 수평적으로 광주 정보부하고 협조하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서울 본부에다가 이야기를 해가지고 헬리콥터가 떠버린 거에요. 급히 광주로. 조직을 잡을라고. 와가지고 광주 정보부 한쪽 칸 비우라고 그래가지고, 정보도 안줘블고 여기다가는, 그러드마 그놈의 시키들. 그니까 자기들이 일종의 비상 수사관을 하는 거야. 그래가지고 여기서 이제 형선이를 찾은 거여. 내가 형선이가 이 책을 썼다. 책이 왔다, 면회가 왔었다. 그래, 내 여동생은 결혼한 여동생은 끌고 형선이를 찾으러 다닌 거죠. 아니, 결혼이 아니라 사귀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 내 여동생은 어떻게 먼 일인지는 모르고 도망가버려야 하니까 시간을 끌라고 자꼬 헛간데를 데꼬 다니는 거에요. 끌고 그것이 나한테는 고통인데. 원수들이. 헛간데를 끌고 다니는데, 형선이 뿐만 아니라 그 구속자협의회 회원들을 요놈들이 찾으니까 한놈이 없는거야. 광주에 인자. 어디를 가도. 근게 이놈들은 더 이상하게 생각한거야. 하마도 없고 참새도 없고 누구도 없고 누구도 없고 끝까지. 그 사이에 이 구협 맴버들은 광주 왼가 담양인가 모여서 자기들 나름대로, 요즘 말로는 수련회같이 이박 삼일인가 일박 이일인가 먼 모임을 하고 있었어. 그러니 인자 들어날 수가 있어야지. 안보이지. 인제 내 동생은 인제 알면서도 숨겼고. 그러니까 빨리 찾았더라면 내가 쉽게 나올 수 있었는데 그 바람에 내가 3일 생똥을 싸분거지. 그래갖고 요놈들이 진짜로 간첩단이라고 생각한거야. 그래가지고 있는데 나중에 인제 그 소식이 전해졌었어. 그니까 이제 그 친구들이 하마부터 참새 다 정보부로 간거여. 그래갖고 문 뚜드리고 요리 들어와갖고 나를 왜 찾소? 너 누구여 그런게 아 내가 당신들이 찾는 하마요. 왜 날 찾았소? 왜 날 찾어. 넌 누구여. 같이 간 것도 아니고 따로따로 들어가갖고. 내가 참새라는 사람이오. 어째 참새같이 안 생겼소? 누구같이 생겼소? 이 사람들이 기절해버리지. 아이쿠야, 이거, 간첩단은 커녕 이거 황당한 녀석들이구나. 나가 한 이야기하고 말이 맞어분거야. 근디 인자 재미난 것이 결정적으로 유리했던 것이 뭐냐면 구속자회에서 그 전 모임을 한번 가졌는데 그 자리에서, 구속자협의회에서 어 인자 한봉이 형이 고집피우고 각서 같은 것을 안 쓰면 잘못했다고 하는, 민청학련 때 그 외상까지 살아야한다. 그러면 인자 운동도 못하고, 광주 운동도 못하고 인자 타격이 크니까 어떻게 하든지 적당히 써주고 나오도록 해야 한다. 근게 일부는, 에이 한봉이 형도 눈치가 있는데 알아서 쓰고 나오시겠죠 무러 그런 걸 걱정하냐고. 아이, 그래도 고집이 보통이 아닌게 충분히 우리 뜻을 전달을 해야 한다. 그래가지고 그 전달책임을 박형선이가 맡은 거여. 내가 면회 갈 때 따라갈란다. 그러면 영선이가 면회할 때 적당하니 각서라도 쓰고 빨리 나와라 해라. 그러니까 형선이는 고걸 빙자해가꼬 그렇게 애매하게, 조직의 명령이오, 빨리 나오시오 써버린거여. 그래놓고 그렇게 됐던 거에요. 그러니까 그걸 보고 이 친구들이 있어 노니까, 조직이라고 하면 아니, 한봉이 형이 이거 각서 안 쓰면 외상까지 살고 나와야하니까 적당히 살고 나오라고 그 말을 전달하라고 해서 내가 가가꼬 면회를 나는 못 들어간다고 해서 그냥 책에다 썼다. 그 밑에 가까운 후배들 이름도 쓴거다. 그렇게 해부니까 이 친구들이 황당하지. 다 맞아 떨어지거든. 다른 사람들 다 불러다 조회해도 하실이라고해. 회의 때 그 이야기가 나와서 형님 면회가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 면회 와가지고 전했으니까 안 되니까 책에다 했다 이거지. 그래서 이 사람들이 허허, 이 새끼들아 느그들 때문에 윤한봉이만 죽어분다, 윤한봉이가 죽어. 나는 인자 그때 죽고 있었으니까. 교도소에 저녁이면 데려다 주는데 일단 법무부에 묶여 있으니까. 인자 이침에 데려가고 이런식이제. 그래가지고 3일째 되는 날 이제 오후에 정보과장이 나와가지고 공산주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보고 쓰래. 그래서 내 나름대로 생각을 했던 것을 그들이 기대한 대로 야무지게 써준 게 도 이놈들이 놀랜 거야. 나는 내 나름대로 관점을 쓰는 것이니까. 아, 대단히 깊이 생각한 것 같다고. 아 머, 하도 빨갱이로 몰아싸코 하니까 내가 솔직하니 내 심경대로 쓴거라고. 그러더니 갑자기 먼 밥을 시켜주고 그러믄서 대우가 달라져. 그러면서 앞으로 나가면 어떻게 하겠냐. 그래서 뭔가 감이 좀 잡혀서 아, 내가 더 늙은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님은 돌아가셨으니까 결혼해서 가정을 꾸려서 평범하게 살아가면서 어쩌고 저쩌고 그냥 듣기 좋은 소리를, 빨리 나가서 어떻게 돌아가는지 머리끝이 쭈뻣쭈뻣 스니까 빨리 나가야지, 나가서 이 일을 수습해야지, 큰일나게 생겼다. 그렇게 해서 살겠다고. 법도 잘 지키고, 그래가지고 몇일후에 석방되어서 나갔어요. 그런데 첫날, 첫날 가서 수사를 받고 들어와 가지곤 밤에 잠이 안와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아이구야 큰일났다. 지금 틀림없이 밖에서 난리가 났을건데. 이거 보통사건이 아니다. 자칫하면 천지가 쑥밭이 되고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해. 에라. 너무 절박해분거죠. 너무 심각해분거에요. 사건 자체가. 그래서 자살기도를 했는데. 그대 뻔히 혼자 독방에서 방법이 있나. 화장실을, 기둥 모서리가 이렇게 각이 진 기둥인데. 정확하니 여기(이마정수리)를 중앙으로 해서 들어 받아블면 머리가 쪼개져서 죽을 것 같다고 판단이 돼서 고놈을 잡고는 그냥 그대로 받었는데 그래갖고 정신을 잃어븟지. 난중에서 일어나보니까 교도관이 지나가면서 정면으로 안 맞고 옆에가 맞았는데 머리카락 위쪽으로 여가 이렇게 붓고, 안 죽은 거에요. 인자 보니까 와 사람 머리가 그렇게 단단한지 몰랐는디. 쭈욱 들어가부렀더라고. 아이고 죽는 것도 마음대로 안 되는구나. 그래가지고 아침에 나갈 때 머리에 혹난 것 같고 이상하게, 너 왜 그래 물어보면 곤란할 것 같아서 철문열고 나가다가 나가는 중간에 철문이 있고 또 나가는 중간에 또 철문이 있는데 그 철문 조그마한 쪽문으로 열고 교도관들이 거기를 뛰어가면서 찍어부렀어, 여기를(이마를). 그니까 당장 소리가 나지. 철문 자체가 흔들거리고. 밀폐된 철문이 아니라서 그러니 교도관들이 이 자식이 미쳤나, 박을라면 임마. 축구한지 아냐고 어디서 뭘 박는거냐고. 그래서 한번 봐주쇼 그래가지고 고걸로 한 것처럼 해놓고 머리 이래가지고 갔는데. 와 그다음에 아조 곤욕을 치르고 나왔는데 나와서 알아보니까 이제 그런 사연이야. 구속자회서 이렇게 이러헤 해가지고 이렇게 됐다고. 그래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큰일 터져블뻔 한거야. 그래갖고는 아이, 이것저것 그 일을 더 추진하기가 불가능하더라고. 알아보니까 인자 나 들어가부니까 내 후배는 인자 고기 잡아블고, 다이너마이트 가지고 물고기 잡아먹어블고.(일동웃음) 수류탄을 어떻게 그렇게 처리를 해버리고 그래갖고 그게 백지화 되버린 거에요. 그래놓고는 조심을 당분간 해야한다 그래가지고 증거는 없어졌지만, 증거물, 아이고 정말 조심하면서 다 변함없는 모습으로 뛰기 시작했어요. 저놈들이 내가 나가면 법을 지키고 어찌고 한께는 혹시나 해가지고 전향은 아니지만 내 각서같은 것을 아 이자식이 진짜로 그러나 하고 보는디 뻔하죠 뭐. 나오자마자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 그렇게 된 사건이 있었는데 고 사건이 이제 5․18이후에 어떻게 되냐면은 항쟁지도부에가 그 사건에 관련된 살마이 세사람 있었어요. 항쟁지도부에가. 근게 또 이놈들이 예비검속된 사람중에 형선이도 들어있고. 그러니까 이놈들이 오, 요 새끼들 봐라. 또 이렇게 된 거에요. 이제. 응 이상하게 생각한거지. 그러니까 또 형선이가 또 꾀를 내가지고 요가를 많이 했는데 이불을 둘러쓰고 요가를 해가지고 심호흡을 해가지고 온 몸에 땀이 줄줄줄 새부러요. 그렇게 되니까, 짠거지, 그래가지고 헌병을 물고 해싼게 땀이 막 비오듯이 쏟아지고 이러니까 이불 들러쓰고 그 무더운 여름에 그러니까 병원으로 와서 우리 전남대 병원으로 와가꼬는, 전남대 병원오면 맨 광주일고 선후배들이 의사들이나 이놈들이 어마어마한 위기의 상황인 것처럼. 이 보안사놈들이 와서 보면 아조 큰 병인 줄 알아고, 좀더 지켜봐야 합니다 어쩌고 해가지고 그 위기를 넘겨버리고 그런 적도 있었는데. 나는 이제 그때 당시에 수배죠. 만약 잡히면 그 사건까지 한꺼번에 나올 거 같아서 더 마음 졸이고 그러고 있었는데. 야튼 광주에서 그런 비사가 있어요. 하기야 그게 그런 사건으로 끝나서 다행이죠. 진짜로 그 일을 추진했다가 던졌는데 박정희는 안죽고 그래블면 난리 나부러. 생사람 수없이 죽을 판인데. 에 어쨌든간에 그렇게 해서.
면담자: 박정희는 어쨌든 그렇게 죽을 운명이었네요, 선생님.

2-1. 생계 유지를 위한 노력
구술자: 하하하. (일동웃음) 20개월만에 석방이 돼서 나왔어요. 그게 두 번째 징역이었죠. 그 두 번째 징역은 참말로 공부를 많이 하고 알차게 보낸 시간이었어요. 그리고 s와서 이제 또 인제 뭐 움직이기 시작했죠. 그게, 78년으로 넘어가가지고 나와서 이제 맨 먼저 관련됐던 사건이, 어떤 사건이었냐, 78년 4월이에요. 함평고구마 사건. 내가 나와 보니까 20개월 만에 나와 보니까 이제 광주의 민청세대의 중심은 구협 회원들 신상에 여러 변화가 있드라구요. 그래서 에 사회운동 차원에서 분화가 일어난 거에요. 이강씨하고 박형선이가 이제 농민운동 쪽으로. 이제 강이씨는 직접 농사를 안 지으면서 카농(카톨릭 농민회)교육담당으로 하고 형선이는 고향 보성으로 내려가서 직접 지게지고 쟁기질 하면서 농사지으면서 카농 회원으로 활동을 하고 있고, 이양현이 그 친구는 청계천쪽으로 올라가가지고 노동지역에서 일종의 현장체험을 하고 내려와 가지고 노동운동 교육을 하고 김상윤이는 책방 차리고 있었고 녹두서점이라고 안에 방 하나 딸린 거기서 독서모임 하면서 후배들 키우고 있었고, 이학영이도 서울로 가서 현장으로 피복공장에 들어가 가지고, 위장취업해서. 인자 그 살길 찾아서 가는 거지. 학원 강사로 들어가 있는 사람이 서너명, 문덕희, 이홍기, 정안춘, 뭐 이런 친구들이 학원에 들어갔죠. 이 친구들이 세월이 좀 가고 그러니까 그 전에는 과외도 못하게 했었는데 조금씩 이제 봐준거죠. 다들 먹고 살려고 뭐 사업한다고 꼬마시장이라고 구멍가게를 열어서 체인으로 해가지고 꼬마시장 여기저기서 열었는데 강이씨도 꼬마시장을 했는데 손해보고 정상용이도 꼬마시장하다가 망했고 좌우간 다들 빡빡빡 긴 거에요. 지금 보성건설 대표이사로 되어갖고 지금 어, 대한민국 운동권 출신으로는 제일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이기신인데, 보성건설 대표이사로 이기신이하고 윤광옥이라는 친구는 이제 주월동에다가 복덕방을 열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복덕방이란 것은 영감님들이, 영감님들이 용던벌이 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복덕방. 다들 먹고 살려고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어요. 학교로 돌아갈 수 있는 길도 안 보여블고 가정에서 압력은 계속오고 그러니까 다들 이제 먹고 살 길을 찾기 시작한 거에요. 그런게 나는 인제, 나와서 광주 올라와야 하는데 옛날부터 나는 동가숙서가식 하고 가방하나 들고 다녔기 때문에 복덕방 그 방에 안에가 사무실 있으면 안에가 방 딸리잖아요. 그 방에서 인제 상당기간 머물렀어요. 나도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다들 이제 먹고 살려고 뛰는데 나만, 나이 좀 더 먹은 나만 또 EHd가방 메고 여기저기 돌아다닌다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부담스럽고. 옛날하고 달리 잠자리가 불편해요. 왜그냐면 거기 들어가기 전에는 결혼들을 안했기 때문에 빈대붙어서 자고 그랬는데 인자 모두들 결혼해가지고 상하방 같은 데를 얻어서 살고 그래서 이제 복덕방 건너편에가 이름이 뭐라드라, 석공이란 비석, 글씨 새기고 그런 거 하는데 아침부터 떠들어서 저것이 정신집중도 되고 먹고 살기도 좋겠다 나도 저런 일이나 하면서 기본적인 생활을 하면서 운동을 해볼까. 그러고 나서 일하는데 책임자한테 나 여기서 일하는 것 좀 시켜달라고 그랬더니 씨익 웃으면서 나이가 몇이요 하니까 저게 쉽게 보이요, 힘으로 한줄 아요. 손이 굳어버린 나이 먹은 사람은 못하는 일이요. 손이 부드러울 때 시작을 해야지. 지금 이렇게 하다가 저 큰 비석 글자 하나 잘못 파불면 어쩌요. 지금은 컴퓨터로 해버리지만. 그래가지고 내가 또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봤더니 보신탕, 구탕집이라고 하드라고요 친구들이. 그때만 해도 보신탕집이 상당히 깨끗하니 차리곤 했지만 그때만 해도 보신탕집이 으슥한 뒷골목같은데 단골들만 들락거리고 개고기 먹는 게 일반화가 안됐을 때에요. 그래도 돈은 번다고 대인시장에 가가지고 개고기집에 가서 아저씨한테, 아저씨 내가 나도 보신탕집을 좀 하려고 하는데 여기서 봉급 안 받을테니 여기서 기술지도 좀 몇 달 해달라고 요리법들을 배우고 싶다고 그런게, 결혼했어? 결혼 안했는데요. 그럼 가쇼. 왜요. 총각이 보신탕집 해갖고는 나중에 결혼도 못하고 그리고 작은 자본으로 이런 식당 같은 것을 하려면 부부가 몸으로 때워야지 사람쓰는 거 아니요. 아예 상식이 없소. 어디서 그것도 모르고 왔소? 당신은 묻는 것 부터가 틀렸소. 안되겠다. 그래서 거기서도 퇴짜 맞고 쫓겨났어. 그래서 나도 나름대로 뭔가 생업을 가지면서 운동을 해 볼려고 그랬는데 그게 안 되는 거야. 안되는데, 김남주가 카프카 서점을 망해묵고 시골에 내려와 있다가 다시 올라와서 또 먹고 살려고 후배들 일어지도를 했어요. 일어지도를 하는데 이 친구가 이제 교재를 ‘파리 꾜뮨’으로 택한 거에요. 일어판 파리 꼬뮨. 근디 그 사실을 아는 친구들 사이에서 어떤 놈이 밀고를 해버렸어요. 중정(중앙정보부)에다. 그래 가꼬 갑자기 인제, 남주가 수배가 되요. 그리고 남주하고 좀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 끌려가고 이강씨도 잽혀가고. 근게 또 내가 눈이 뒤집어졌제. 그래가지고 이제 정보부 가가지고 왜 잡아갔냐, 내 놔라부터 어쩌고 쭉쭉 하다가 다시 또 운동에 뛰어들게 된 셈이 됐죠.

2-2. 함평고구마 사건과 쌀 생산자대회
구술자: 그러다보니까 이제 4월이 되니까 함평 고구마 사건으로 북동성당에서 단식농성을 하는데, 전혀 내부에서 준비도 없이 치약 칫솔 하나, 소금 한 줌 준비 안한 채로 친구 하나도 없이 갑자기 준비를 해버린 거에요. 단식농성에 들어가 버리거든요. 인제 성당측에서 동의를 안 할 것 같으니까 성당 교육실, 교리실 같은 것이 있었는데. 그런데 강이씨가 카농에서 간부로 활동하고 있고 형선이도 있고 조계선이도 그러고 있고. 이게 함평 고구마 사건이지만 함평 농민들 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막 간부들이 오고 그랬는데. 그래 단식농성이 딱 들어가 버리니까 농민들이 또 일하니까 밥은 이만큼씩(많이) 먹던 사람들이 갑자기 이제 예비단식 과정도 없이 아무런 준비없이 시작하니까, 침구도 없지. 세면도구도 없지. 소금도 아무것도 없는거야. 그 다음에 이제 거기에다 누웠다 해서 일이 해결되는 거 아니거든? 이제 증폭을 시켜야 하는데 단식효과를 정치적으로 높이려면. 그러면 밖에서의 흔히 말하는 재야나 청년 학생들 쪽에서 호응을 해줘야 하는데 인제 그 일을 갑자기 내가 맡게 된 거에요. 근게 침구 구해 날리고 세면도구부터 몰래 솔래솔래 타먹으라고 미숫가루부터, 해가지고 완전히 경찰이 봉쇄를 해버렸기 때문에 복동성당 뒷골목으로 해가꼬 경찰들이 모르는 골목으로 담 넘어서 인제, 들여보내고 이제 그런 일을 하고나서 인제 바깥에서 모임을 주선해가지고 지지격려차 북동성당 방문을 해야한다. 시위가 아니라. 그런 식으로 양림동 성당에서 모여가지고 그런 음모 꾸미고. 동원하고. 그래서 진짜로 청년 학생들이 밤에 북동성당 위로차 간다 그래가지고 걸어오고 경찰이 막고 뛰고 엉뚱한 방향으로 사건이 번지게 되니까 저쪽에서 항복! 그래가지고 피해배상한다 그러고 농협에서 횡령했던 놈들 대폭 해임하고 구속하고 그런 엄청난 사건을 겪었어요. 끝나버리고, 이겼는데. 이긴 다음에도 그 침구부터 시작해서 다 실어다 주인들 갖다 주고 나르니라고 고생했는데 고 일로 해서 인제 갑자기 농민운동쪽하고 굉장히 가까워졌죠. 신뢰도 얻고. 서울에 연락하고 그런 일을 다 했기 땜에. 고거를 인제 계기로 해가지고 느닷없이 11월에는 인제 계림동 성당에서 전국농민쌀생산자대회를 했는데 추곡수매가인상 등 다양한 요구들을 쌀생산자대회를 했는데 이제 농민회 간부들이 함평고구마사건 이후로 나에 대한 신뢰가 생겨서 쌀생산자대회를 하는데 여덟끼를 먹는다. 1박2일에. 아니다, 2박3일이구나. 그래가지고 2박 3일동안 800명이 잘 수 있는 숙소 마련. 그니까 그때는 방법이없어요. 계림극장 뒤에 지금 개발이 안되어서 완전히 옛날 그대로 안되았고 쉽지가 않는데 거가 엄청나게 준 옛날 창녀촌 비슷했거든 거가. 그래가지고 여인숙이 많았어요. 여인숙. 싸구려 여관. 가장 낮은 급의 그런데 농민들이 돈이 없으니까, 그런 여인숙에다가 어느 여인숙에는 몇 명 어느 하숙에는 몇 몇 고런 일만 하고 그 다음에 그것만 부탁을 해. 그래서 EH 다른 것은 필요없냐 했더니. 없대. 알았다고. 그러면서 날더러 800명 8끼 식사를 맽길만한 믿음직한 도시락 만드는 식당 같은데 아느냐 그래. 순간에, 야 이거 우리가 맡아야 겠다. 그거 왜 식당에 맡길라고 하냐. 식당 아니면 맡길 길이 없다여. 800명의 밥을 어떻게 할 수 있냐. 그 밥, 우리가 맡으마. 인자 우리라 글지, 내가 맡아서 청년들하고 여자들하고 동원해서 할란다. 그러니깐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한다는 같잖다는 투로 전부 나를 봐. 밥 할 줄 아요? 자취를 내가 중고등학교 때 해봤지 않냐고, 그 자취가 팔백명 밥하고 같은 건지 아냐고. 800명 밥할라면 솥이 몇 개가 필요한지 아요? 깍두기 먹을라도 깍두기를 지금 얼마를 담아야 하는지 아요? 국은? 시작해서 그릇? 젓가락, 숟가락 80개부터 거 어떻게 할라고. 잔소리 하지 말고 들어보라고. 요걸 식당에다 맡기면 반이 그 사람들 손에 들어간다. 그것이 상식이거든. 50%를 먹으니까. 근데 그러고 따뜻한 밥 따뜻한 국을 못 먹는다, 도시락으로 하면. 직접 내가 광주 운동권 사람들 동원해갖고 성당 마당에서 솥단지 걸어놓고 밥을 해서 항시 밥과 국 따듯하니 먹고 훨씬 도시락으로 먹는 것보다 맛있느 반찬에서 먹을 수 있게 해 줄테니까 나를 믿고 나한테 맡겨라. 자기들끼리 행사에서 가장 중요한게 식사라는 거에요. 왜 그냐면 고게 잘못 되 버리면 다른 프로그램이 전부 엉망이 되분다는 거에요. 제 시간에 시작 못하고 뭐 어쩌고. 그래도 책임질 수 있냐고. 일초 안틀리고 여유있게 시간 맞추어서 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까 이제 되냐 안되냐 한디 윤한봉씨가 할라고 하면 할 수 있다. 근게 맽겨봐야 한다는 사람도 보이고. 내 이야기를 어서 들었는가 어쨌는가 그래가지고 내가 그걸 맡게 된 거에요. 그래가지고 엉뚱한 일을 벌려가지고 나 혼 났는데. 그래가지고 쌀생산자대회를 하게 되었는데.

2-3. 황석영과 여성운동가 조직-송백회
구술자: 그 이야기 하기 전에 여자들을 동원할 수 있었던 배경은 인제 설명하는데. 그때 두 번째 징역을 살고 나왔더니 고생했다고 그래가지고 구협 동지들이나 시골로 강진으로 가 있으니까 찾아와서 이말저말 부탁을 하는 거에요. 두 가지 부탁을 하더만. 긍게 여러사람이 이야기를 한디 일치된 것이 두가지여. 하나는 지금 해남에 장길산을 쓴 황석영씨가 왔다. 장길산을 감옥 안에서 재밌게 읽었거든요. 연재가 다 끝나진 않았지마는. 그런데 자지들이 본 바로는 이거는 원광석이다. 이걸 갈고 닦을 사람이 없다. 야생마 같은데 갈고만 닦으면 멋진 보석이 될 것 같은데. 그 일을 맡아주라 그러야. 근디 그것이 첫째고. 두 번째가 인자 나 안에 있는 동안에 여자들, 여성들, 여성운동단체를 만들어보려고 남편들이 이제 여러차례 시도를 했던 모양이야. 결혼들을 하게 되고 그러니까 왜냐면 자꾸 갈등이 생기는 거야. 근데 이건 의식의 차이 때문에 빚어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자들도 모여서 나름대로 학습도 하고 공부도 하고 그래가지고 의식의 공유가 필요하다. 그러기위해서는 이제 모이게 해야 한다. 그래서 몇 차례 시도를 했어요.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그런데 모이면 남자들 성토장이 되고 남자들에 대한 정보교환장이 되어가지고 왜 집에 돌아오면 남들은 발을 한번 닦는데 당신은 일주일에 한번밖에 안닦냐 이런 것부터 시작해서 쓸데없는, 생일 선물 누구는 줬다는데 당신은 뭐했어? 그런 엉뚱한 쪽으로 튄다는 거에요. 그래서 실패했단 거에요. 그래서 나가지 말라고 해가지고 이렇게 다시 또. 그러니 날더러 여성들 조직 좀 해달라는 그것이 대표적인 두가지. 알았다 그래가지고 황석영씨는 해남으로 찾아가가지고 하룻밤 이야기해가지고 확 휘어 잡았죠. 나 나름대로 황석영씨하고 저녁 내 이야기를 해보고 이 사람이 서울 무대에서 활동하다 내려왔기 때문에 서울지역의 재야 쪽, 문화, 문학 예술 분야 이런데 발이 넓어요. 우왕꾼이라. 그래서 이제 구라도 좋고. 그래서 아, 전남 운동과 서울 운동의 교류협력하는데 있어서는 이 양반이 상당히 역할을 할 수 있겠다 판단이 되고. 이 지역의 운동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판단이 되고. 앞으로 이양반을 잘 접촉을 해야겠다. 죽어라고 계속 그걸 그렇게 해나갔죠. 황석영씨하고 서울서 나를 아는 사람들이 황석영씨가 성깔이 괴팍한데다가 변덕이 심해요. 넘의 말을 이상하게 하는데. (면담자 웃음) 성격이 쎄요, 상대적으로. 인제 그 꼬라지, 그 죽끓듯한 변덕을 끌어안고 가야 하는데 나는 그걸 딱 각오를 했기 때문에 장점도 강점도 많은분이고 재주도 좋은 분이고 정치감각도 뛰어난 사람이에요. 어쨌든 그렇게 황석영씨 문제는 풀어갔고. 그 다음에 여성들 문제는 어떻게 접근해야 하나 그래가지고 인제 그때 당시에 여성운동 관계 서적이라는 게 신비의 여성, 여성 시리즈가 몇권 있었어요. 지금 이름도 잊어버렸는데, 자유로운 여성 뭔 여성 어쩌고 하여튼 그런 책들이 어서 구해다가 보고 하이고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가 너무 많고, 에이씨 내식으로 하자 그래갖고, 구체적인 실천을 통한 일종의 결집. 이런 이렇게 내세우고 는 이 털양말짜기를 시작했어요. 털양말짜기 이게 뭐냐면 민청학련 때도 경험했고 두 번째 들어갔을 때도 경험했지만 한 시월 정도 되면 벌써 재소자들이 동상에 걸려요. 콘크리트 건물이라 여름에 달아오를 때는 못 견딜 정도로 덥고, 춥기 시작하면 냉해가지고 온기가 없으니까 햇빛 안 받고 약해져 놔서 발 손 인제 여지없이 인제 동상에 걸리는데, 그런데 이거 나일론 양말 이런 것은 두 개 세 개 신어도 이차가운 기를 못 없애요. 그런데 내가 그거 좋다고 털양말이 한겨울 동상 걱정 없이 넘어 가니까 발이 따뜻하니까 몸도 좋고. 그래서 내가 나와서 인제 알아봤더니 인제 그걸 사는 거냐 그랬더니 털양말을 판 데가 없다는 거에요. 짜야한다고. 그래서 내가 이 털양말을 가지고 가방에 담고 다니면서 신고 다니던 놈 갖고 교도소에서 겨울나기가 얼마나 힘든가부터 동상약이야기 하다가 털양말 이야기 끄집어내서 이놈을 하나 신어노면은 한겨울 동상도 안 걸리고 넘어간다. 기가 막힌 거다. 그게 빵은 한겨울 동상도 안 걸리고 감기 안 걸리고 넘어간다. 기가 막힌 거다. 그게 빵 넣고 사과 넣고 그런거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거지. 양말하나 넣어준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가 그래가지고 양말좀 짤 수 없냐, 양말 좀 짜서 넣자. 그럼 여자들이 대부분 단 한사람도 나 안할란다 하지를 않아. 그런데 하긴 하겠는데 양말짜본 적이 없다 이거여. 어떻게 짜는지를. 그러믄 짤 줄 아는 사람들이 있을 거 아니냐 이거 보면 모르냐,부터 해가지고 어찌어찌 하다보니까 누가 짤지를 안대. 어떻게 짤지 서로 연결을 해갖고 짜는 기술을 배운 거예요. 그럼 처음에 내가 털, 털 순모를 사다 줬어 이제. 사다줬더니 다음부터는 이제 털실 필요없다, 우리가 다 샀다고. 그래가지고 나는 처음에 광주교도소에 있는 장기수부터 정치범들 한 40명 있었을 땐데. 여기만 생각을 했어요. 너 줄라고. 그래서 자기 샂ㄱ했는데, 이를 테면광주 운동권에 관계된 사람 부인들 또 애인들, 그다음에 YWCA에 이해신 돌아가신 이해신총무부터 김경천 간사부터 안희옥 총장 뭐 이런데 간사부터 아예 일하시는 여자분들, 안성례씨를 비롯해서 저쪽 기독병원 일하시는 분들 하다못해 목포에 한산촌 결핵 요양원이 있는데 여기까지도 부착을 하고 황석영씨 부인부터 시작해서 뭐 목사님들 부인부터 천지사방에다 인자 내 여동생부터 또 교회운동 하는 기독청년회 여사들부터 이렇게, 그래서 어떻게 인자 짜고 있으면 같은 직장 동료가 뭐하냐, 그럼 또 자랑을 하는거죠. 의미 있는 일을 하니까 이래저래해서 짜면 가만히 들어보면, 양심수들이 어쩌고 저쩌고 감기도 안 걸리고 나도 한 번 해볼까 이런식으로 해갖고, 나중에 147갠가가 나왔어요. 147컬레, 실값만 해도 꽤 많은 건데 나는 인제 딸랑 하나 인제 황석영씨 부인 지금은 이혼해갖고 계시는데, 빨리 좀 짜주라 그래갖고 완성된 놈 들고다니면서 봐라고 말이야 인자 또 이렇게 해가지고 딴딴하게 짜게 만들고 그렇게 해서 많이 짰어요. 그래서 그 짠 놈을 나를 준다고 가져가라고 그래서. 다음단계로 짠 것을 나한테 줄 것이 아니라, 몇 월 몇 일날 광주교도소 앞에서 만나자. 다 자기가 짠 놈 가져오고 주민등록증 가져오라고. 직접 넣어라, 그러면은 내가 또 이런 이야기를 했죠. 감옥 안에 있으면서 남자들이 와서 빵사고 옷 넣는거하고 여자들이 온 놈하고 또 다르다. 받을 때 기분이 다르다, 그랬어. 그래갖고 그 여자들이 넣으면 냄새도 다르고 향수도 있고, 뭐 어쩌고 저쩌고 기분도 좋아하고 그러니까 그리 오라고 그래가지고 교도소에서 인제 내가 미리 장기수들 하고 정치범들 명단을 입수한 놈을 놓고 한 명당 다섯 명씩 고르라고. 그래갖고 골라서 나는 정씨니까 정 뭐 어쩌고 다양하니 그렇게들 해갖고 그 이름들 넣게 하는 거죠. 자기 이름으로. 그것이 이제 송백회 결성 1단계작업이었어요. 그래갖고 남은 놈하고 전북 교도소 전주에서까지 전주교도소 전주교도소까지인자 소문이 나니까 보내주라고 그래가지고 보내고 그랬는데, 고걸 끝내고 나서 인제 그때가 인제 추워지기 전이거든요. 추워지기 전에 넣어야 한다고 그래가지고 넣은 거것이 그때가 한 10월 달엔가 넣었을 거에요. 그러고 인자 쌀 생산자 대회 밥일을 하는 과정에서 또 인자 묶에 세울 수 있겠다 판단해서 남자후배들 뿐만 아니라 여자들 힘도 동원할 수 있게 되니까 자신이 서서 내가 밥을 하겠다. 그래갖고 인자 모든 책임을 준다 그러더라고. 근게 인자 여자들만 그때만 해도 송백회라는 조직을 만들기 전잉요. 만나갖고 이야기를 한거에요. 이래저래해서 이 지식인 운동과 민중운동, 농민운동과 여성운동, 청년 학생회운동의 연대차원에서 연대연합을 위해서 이번에 우리가 이사람들에게 여덟끼 따뜻한 밥과 국을 맛있게 끓여줘야한다. 그런데서 신뢰가 싹트는 거지, 시위한다고 같이 악스고 그런다고 해서 되는게 아니라는 말이야. 깊은 신뢰는 이런데서 오는 거니가 일하자, 여자들이 나보고 하이고 일 또 저질러 논다고 말도 팔백명 밥이라는 게 또 똑같은 소리하는게 남자들이 했던 이야긴데 거기다 덧붙ㅇ이더라고 여자들이. 깍두기 담을라믄은 얼마나 필요한지 아냐고 남자들은 묻는디 여자들은 뭐라고 하냐면 무가 리아카로 몇 개가 되냐부터 다라이가 뭐 어쩌고 저쩌고. 그래좋다 그럼 어려우니 만큼 의미가 큰거 아니냐, 우리가 하면은. 그러니까 같이 하자. 그라믄 인자 마당에 파같고 솥단지를 인자 솥을 아 솥은 내가 구한다. 국통은 아 구한다. 왜그냐믄 집에가믄 다라이다 있지 않느냐. 목욕한다고. 집에 집집마다 있는 솥단지부터 빌려오면 될거 아니냐. 그러믄 거기서 땔 나무는. 아 학생운동 출신중에서 여그 전남전남에서 대학다닌 애는 아닌데 영석이라고 그 친구 지그 아버지가 제재소를 해요, 광주에서. 제재소에 가면 인제 나무 목재 빼내고 남은 껍데기 피죽인가 그런것들이 많이 있어요. 고거 리아카로 실어나르면 되지 않느냐. 고놈 때믄 된다. 그릇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해봤더니 대인시장 같은데 가면 하루에 얼마씩 해서 수저 젓가락 국그릇밥그릇전부 빌려준. 그러다 분실하면은 배상하는 거죠. 하여튼 다 책임질테니까 하자. 그래갖고 인자 설득했더니, 그라믄 이미 그렇게 약속해브렀다. 해보자고. 한사람 두사람 이렇게 끄집어 내고 남자들 콱, 여자들 앞장서서 남자들 잔심부름 다해. 실어나르고 리어카에다 피죽 실어나르고 대인시장에 가갖고 이것저것 사는데 재밌어요 인제. 영수증이 필요한거 아닌가 돈을 받았으니까 증거가. 그 영수증이 어딨어, 꼬추장에다가 도장 이거 해갖고 아줌마들거 받고 거 거름종이 찢어가지고 꼬추장 그래갖고 얼마 그래갖고 일벌렸다고 난리여. 다라이들 밑에다가 문병란, 쓰고 그래갖고 괭이로 북동성당 앞에 마당에다 파고 솥단지하고 국단지하고 걸고, 국솥걸고, 하여간에 난리를 꾸몃어. 그래가지고 밥을 하는데 밥국을 하는데 그릇 씻을 때 내가 앉아서 인자 여기서는 대충 붓고, 여기서 대충해갖고 여기서 비누칠하믄 넘기믄 행구고 이런 식으로 그때 인자 총 동원이 됐어. 43명이 동권해서 인제 빵잽이들부터 대학후배들까지 전부다 동원해갖고 나 근데 인자 국통 들고 난리다가 잘못해서 손이 빠져갖고 엄지발가락 빠져브렀는데 하여간에 그래가지고 첫날 무사히 딱 마치고 그 다음날 여관에서 자고들 여인숙에서 자고 왔는데 밤에 눈이 와브렀어요. 첫눈이 나무가 다 젖어블고 그랬지. 근데 그만큼 일찍도 나갔어. 젖은 나무막 불어가면서 밥을 해가지고 농민들이라 일찍 일어나요. 일찍들 와. 밥이 예를 들어 7시부터 8시사이에 먹는다 그러면 6시 경부터 와브러. 오는대로 이미 준비 되는대로 해갖고 따뜻한 국에다가 인자 간부들이 자기들끼리 회의하고 워 인자 오늘 큰일나븟다 인자 밥 제때 안될 것 같은데 눈까지 와브러가지고 그라믄 우리 회의 일정에 뭔 차질이 있나 자기들이 온거예요. 와서 보니까는 여기저기서 있고아이고미 아직 밥 안됐고만. 그래와서 딱 보니까 이미 밥다 먹었다는 거에요. 자기들이 늦게 온셈이 되는거지 인자. 그래갖고 인자 놀라고. 여덟 번 밥을 받았는데, 안에서 밖에서 싸늘했었지 추워가지고 고생한 놈들 악쓴다고 여덟끼 따뜻한 밥주고, 국주고, 남은 쌀가지고 떡을 만들었어요. 인절미를. 그래작고 또 인자 마지막 끼니 인절미를 딱 나눠주고. 한푼 안남기고 한거니까. 그전에 인자 도시락 깍두기 담고 여자들 난리 꾸미고 남자들은 인제 씻어 날리고 실어 날리고 잔심부름 다하고 설움까지 당했는데 여자들한테. 인자 그걸 끝내고 나서 자연스럽게 우리 모여서 뭔가를 앞으로 해야 되지 않냐 그래가지고 송백회라고 뜬 거에요. 그것이 인제 내가 맨날웃으면서 조선 엠네스티라고 그랬는데, 옥바라지, 근게 양심수뒷바리지하는 조직원들 이렇게 뜬거에요. 그것이 인제 11월 말인가 12월인가 하여튼 78년. 그래가지고 인제 거그 현대문학연구소 78년 6월에 아 79년이구나 현대문학연구소. 나중에 인제 송백회 사무실 겸해서 현대문학연구소에서 쓰게 됐는데 거 현대문학, 송백회. 인제 송백회 결성하고, 그 다음에 거기 인자 교사들이 여자교사들이 중고교 교사들이 여러명 들어왔어요. 와이에 있는 정명화부터 이윤정이 거기도 인제 나중에 송백회 된 다음에 와이로 들어갔는데. 그 다음에 인제 뭐 강목사 사모님 초대회장 맡어쌌고 하여튼 운동관련 부인들은 뭐 아내들 다들 고생을 하죠. 교사들이 또 들어왔는데, 인자 송백회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2-4. 1978년 민주교육지표사건
구술자: 그러고 인결집78년에 인제 중요한 게 그 6․27 민족교육지표사건이에요. 그때가 한 5월이나 됐나. 인자 슬그머니 정보가 들어오더라고요. 긍께 서울에서 성내원 교수랑 백낙청 전교수가 중심이 돼가지고 광주에 이제 전남대는 송기숙 교수가 맡고 조대는 문병란 선생이 맡고 문병란선생은 인자 그때 학원강사였지 교수가 아니었는데, 조대는 맡고 그런 식으로 해갖고 전국적으로 이제 유신헌법을 개탄하고 민족교육지표 아니 국민교육헌장 이걸 비판하는 성명서를 준비한고 있다. 얼마나 인자 흥분되는 사건이었어요. 드디어 인제 교수님들이 움직인, 교수님들 움직이믄 학생들이 가만있나. 그래가지고 인제 나는 주변에다가 이 일이 아주 은밀하게 진행됐기 때문에 학생들하고 접촉의 창구가 조끔이라고 있는 친구들한테 인자 이러이러한 것이 준비된다 그러면은 교수들이 발표를 하게 되면 뻔하니 연행되고, 해직 투옥될 건데 그래갖고 교수들만 피해보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된다, 이거 운동으로 운동에너지로 이걸 증폭시켜야하니까 학생들이 바로 뒤따라서 쳐줘야한다. 눈치것들 움직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해주고 교수님들 만나면 슬금슬금 인자 자극 주는 그런 정보는 일제 이야기하지 않고, 지금도 송교수님은 가끔 그 말씀 하시는데, 그 발표한 몇 일 앞두고 우연히 인자 저녁에 만났는데, 내가 학교 교수님 어째 하시는 일 잘 돼가세요? 나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랬더니, 깜짝 놀라더라고. 금방 또 표정을 바꾸면서 뭔일? 나 하는 일 없어. 그러고 가시더라고. 하여튼 잘하셔야 합니다 어째 좀 이상한가 자네 우리집 가서 차나 한잔 하세 좋습니다 하고 따라갔지 안자. 집이 중흥동인가 됐을 건데 따라가서 자네 뭘 알아? 그래서 아니 내가 모르는 일도 있어요? 그래서 교수님 한 열명 조끔 넘겼죠? 그러니까는 깜짝 놀라더라고 그러면서 어떻게 알아 이사람아. 아이고 눈치로 아는 거죠. 뭐 어찌고 하면은 내가 맞춰볼까요? 이 양반이 얼굴색이 딱 굳어지면서 서명한 교수들도 누군지를 모르고 한다는 거여. 자네가 어떻게 알어? 내가 맞춰볼가요 그래갖고는 세었어. 하나둘 누구 누구누구 여덟명째 세 가니까 송기숙 교수 얼굴이 완전히 굳어블드라고. 그래 갖고 인자 세사람이 틀렸어요. 아 어떻게 아냐고 아니 나는 간단하다고 평상시에 내가 대학 들어다니면서 교수님들 이렇게 만나뵐 때 뭔가가 미안해하고 괴로워하는 교수님들하고 내가 월부책장사한다고 75년에 뛰어다닐 때 사라고도 안했는데 사람 시켜서 학생 시켜서들 찾어 오라 해갖고 사준 교수들이 있다. 그런 교수들이 있었어요. 잘 모르는데 블러갖고 가면 뭐 책 판다며? 내가 사줄게 그래갖고 사주고. 그런 교수님들을 내가 쭉 해갖고 세사람이 틀렸어요 인제 한 사람은 싸인은 한다는데 그 사람이 해외로 지금 연순가 문가나가게 돼서 뱄다, 고 한분 틀리고 나머지 그랑게 세 분이 틀렸어 하여튼. 그 내가 그때 틀린분이 홍승기교순가 하고 김두진. 하셨는데 내가 모르는 분들. 그분들, 깜짝 놀래. 내가 인자 직접 배왔던 사람들이 김현곤 교수는 불어, 해서 내가 알고 이석원 교수는 문화사, 뭐인자 직접 나를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인제 뭐 이제 이홍길 교수라던가 이방기교수라든가 이런 분들은 내가 인자 개인적으로 알고. 어쩌고 어쩌고 해갖고 와 하여튼 어디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교수님이나 알아서 잘 하십시오. 나는 밖에서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라고 인자 27일 날 밤에 발표해서 미리 그런 것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송기숙 교수님 댁에 그날 27일 날 밤에 발표해서 미리 그런 것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송기숙 교수님 댁에 그날 27일부로 연행이 됐어요. 정보부로. 교수님들이 이 송기숙 교수님 댁에다가 대책본부를 꾸몄어 인자 그래갖고 서울에다 다 전화하고, 서울서들 내려오고 그때 백낙청 교수도 내려오고 그랬어요. 그러고 인제 30일부터 학내에서 인자 기도회부터 시작해서 아니 저 30일이다 28일부터 시작해서 29일 날 이제 대규모 교내 시위가 벌어지고, 30일, 7월 1일 시가지를 벌이고 까지 발전한 거죠. 근게 인자 거기 있으면 송기숙 교수님 댁에 전화가 있어갖고 미리 이야기하는데 학내에서 29일날 막 시위하고 그럴 때 지금 어디로 이동하고 있고 지금 어디서 경찰하고 붙고 있고 실황되다시피 전화가 오고인자 그랬는데, 긍게 안기부 이놈들이 골목길에다가 아예 딱 정보과 계장하고 직원하나하고 둘이 차에 타고 있더, 내가 들락거리고 있다가 정말 이래도 되는거야? 이게 이래도 되는거여! 왜그냐믄 다른 지역에서 안 난 사건이 여기서 터져브니까 전남대에서 자기들도 책임이 있지. 그러다가 31일, 31일인가? 이제 사모님이 송기숙 선생 사모님이 막 싫은 눈치를 하는 거여 우리들한테. 저놈들이 인자 뻔하지 당신 남편 조용히 있으면 나올 건데 저놈들이 이용해먹는다 상식이지. 그러믄 당신 남편 진자 못 나와븐다 이런 애기. 그래서 사모님이 사정없이 미운표정을 지어블고 막 눈치를 주고 하더니 쫓겨나브렀지. 그러고 정보부에서 부장이 정보부장이 지부장이 만나고 싶다고 그래갖고 인자 황석영씨하고 내가 정보부에 갔어요, 갔더니 아니 이렇게 뒤에서 장난을 할 수 가 있어요? 어쩌고 저쩌고 시치미 딱 치고 무슨 장난이요? 아 우리는 송기숙 선생님 인자 석방을 위해서는 노력했을 뿐이라고. 올바른 발언을 한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어쩌고 인자 이러지 맙시다 좀 막 그라고 인자 갖짠다는듯이 한방 놔블 듯이 인상을 써갖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성질 내쌌드라고. 어쨌든 그렇게 되고 마지막날 그 박석삼이라고 박석률이라고 민청학련세댄데 석률이 동생인데, 그 박석삼가 나중에 즈그 형하고 같이 남민전에 연류돼 갖고 고생했는데, 그 박석삼이하고 죽은 박기순 둘이를 불러갖고, 인자 석삼이는 인제 학생들 시위준비 과정에서부터 자기 가게에 모여서 음모도 꾸미고 그런 친구 중에 하난데, 둘이 모여서 인자 그동안의 일지를 작성했어 인제. 이렇게 해서 27일부터 죽 해갖고 학생들이 어떻게 모여서 어떻게 하고 학내에서 시위할 때 경찰들이 진입해갖고 거기서 막 치고박고 할 정도였으니까. 시내에서 뛰다닌 것부터 그대당시에 거 광주시내 좀 높은 빌딩 옥상에 군장교들이 올라가서 고막 뭐야 충장로 등등 골목골목 누비고 뛰어다닌 것을 전부 그 사람들이 에 내려다보고 있고 그랬는데, 고런 이야기 다 쓰는데 마지막에 와서 형님 장갑차가 나왔다네요, 그래 그래서 확인도 안해보고 장갑차 출현 써가지고 차비 줘서 서울로 와서 문익환목사님 만나갖고 그게 인자 언론에서 보도를 안하니까. 외신에서 나왔어요, 그 성명서도. 성명서도 외신으로 내 보내가지고 광주가 이런 상황이라는 것을 빨리 알려드리라고 그래갖고 인자 보냈어요. 그랬더니 석삼이가 거기 가서 전했더니 이 양반이 장갑차 출현에 충격받아갖고 기자들한테 이야기 해가지고 신문사 기자들이 내려온 거예요. 근디 인자 장갑차 출현했는디 지나가블믄 볼 수가 없지. 그래갖고 영 난처해갖고 있는데 벌교 쪽 농임회에서 무슨 땅문제 갖고 그동안에 무슨 집회시위했었는데, 이 팀들이 도지사실을 점거해갖고 난리를 꾸민거여 그시간에. 그거 그 현장을 대신 인자 인도해브렀어. 근게 인자 기자들 말이 글더마 도대체 이놈의 광주는 민주 교수들도 그렇고 학생들도 그렇지만 농민들까지 이게 도대체 완전히 다른나라라고 놀란거여. 서울에는 그런것이 없는데, 근게 인자 도청앞에 가니까 난리가 인자 전경들 서있고, 도청 안에서 악을 썼쌌고, 이층에서 그 벌교 농민들 투쟁현장을 그분들이 와서 보고 그랬는데. 이 석삼이는 그것땜에 수배되고 그래갖고 못 내려오고 서울가 있다가 즈그 형님 꼬임, 꼬드기는 바람에 남민전에 들어가지지고 날벼락맞아가지고 지금까지 서울서 살고 있는데, 기숙이는 인제 그걸 계기로 해서 7월 초에 기장인가 어디 교회 청년들 모임에 거기 나가가지고 그 629시위 627민족교육지표사건에 대해서 폭로하고 징계 먹을 것에 대해서 미리 자퇴를 해버렸죠. 자퇴안했으면 무기정학이지. 인제 밖에서 박기숙열사 양력에는 무기정학이라고 지금도 그렇게 해요. 그때 자퇴 안했으면 무기정학이지. 인제 밖에서 박기숙열사 양력에는 무기정학이라고 지금도 그렇게 해요. 그때 자퇴 안했으면 무기정학이었으니까. 7월11일 전후해서 있었던 전준가 전북 어디서 있었던 거 교회 청년회 모임에 가서 언론에서 안 다루니까 민족교육지표사건에 대해서 쭉 이야기 한거지. 그래가지고 인자 들어간 친구들도 일제히 옥바라지 시작하고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것이 인자 민족교육지표사건이죠. 인제 그때 그래요 그사람들을 송기숙 교수가 얼굴이 굳어질 정도로 놀랬던 게 뭐냐면 어떻게 아냐 이거지, 왜그냐믄 당시에 학생들이 시위하고 성명서 발표하고 참여하는 것하고 교수님들 하는 거 하고는 차원이 다른 거예요. 왜이냐믄 이 학생들은 기득권이 아니거든, 기독권자가. 교수는 어떻게 보면 이 사회에서는 기득권인데, 특권계급인데 사회적인 지위, 명맘, 모든 것을 봐서나 소득으로 봐서나 정말로 좋은 자리 아니에요. 그걸 포기하고 그것도 투옥될 각오를 하고, 교수님들이 거기에 서명을 한다는 것은 보통 결단이 아니거든. 정말 보통 결단이 아니여 그거. 그전에 내가 다른 이야기이지만 전남대 구 본관에다가 518기념문화 기념관? 518 기념관 만들고 그 안에 인자 들어가서 보믄 학생운동사 나온데 그 최영태 소장한테 내가 아조 강하게 이야기를 했는데, 민주교육지표사건이 너무 적게 다뤄졌다. 거 가서 보면은 이거야 말로 큰거다. 큰 사건이다. 전국적으로 봐도 큰 사건이다. 전남대만 유일하게 했으니까. 그런데 너무 비중이 적드라, 두 번째 민주 교육지표사건이 있는 전남대학 저 그 사건을 현장인 전남대학교에서 민주교육지표사건에 대한 기념사업이 전혀없다는 것은 사진 몇장 걸어놓고 인제사 그 부끄러운 이야기다. 우리는 들불 열사 추모비도 세우고 그러지 않냐. 근데 느그는 뭐하냔 말이야. 그역사적인 사건이다. 근게 나름대로 좀 신경을 써야 할거 아니냐 나중에 야길 들어보니까 전남대에서 저 조형물도 만들고 그러자고. 그런데 인자 교수들부터 서운한게 뭐나면 나이든 자신들이 자기가 나서갖고 자기를 기념할 순 없는 거 아니요. 누가 해줘야써. 근디 기념사업이라는 게 힘들어. 왜그냐믄 돈이 들어가니까. 근디 가만히 말을 못하고 체면에 가만히 있는데, 다른 하다못해 학생들 중에서 투신한 애들 뭐 시위하다가 죽은애들부터 시작해서 강경대 기념사업회가 어쩌고 뭐 박승희 기념사업회가 어쩌고 다 있는데, 이 민주교육지표사건 기념, 사업이라는 것은 아예 없는거여. 20년이 흘렀는데도. 20년이 뭐야 30년이 흘렀는데. 속상하지 근디 자기를 자기가 기념한다고 할 순 없고, 그러니 인자 내가 나서주고 싶은데, 나도 이제 뭐 김남주 기념사업회 김용근 선생 기념사업회있고 인자 들불 여기까지 하고 있는데, 또 거기가 신경쓸 여유도 없고 그래서 자꾸 인자 해란 말이야 나도 참여하겠다, 그래서 627민족교육지표사건이후에 그 시위에 참여했다가 감방에 가거나 학사징계받은 친구들 등등 관심있는 친구들 중심으로 인제 기념사업을 추진하겠다고 그저께 연락이 왔더라고. 그것도 사실은 관련자들이 나선다는 거 자체가 모양새가 그렇긴한데 뭐 어떻게 할 사람이 없으니까 힘들어요. 아조 힘들어. 그 조형물 만드는데 실비로 전부 무료로 해주고, 공사하고 다 해갖고도 6천만원 들었다고요. 그 518자유 공원 가봤어요?
면담자: 예,가봤어요.
구술자: 그게 대한민국 명물이에요. 고거 본딴게 여그저그 나오기 시작한다고 지금. 그 양식을 본 따서. 테라코타를 못 붙이고, 그런데다가 인제 지금 들불 상 제정 인제 사단법인 들불기념사업회 만들어갖고 1억 5천정도 모금을 했는데, 5천만원정도 더 모금을 해가지고 매년 천만 원짜리 상을 줄 거여. 그것이 대한민국 운동권 관련 상으로는 제일 큰 거예요.

3-1. 민주세력 결집

구술자 : 그 다음에 이제 78년 6월 달이 이제 민족교육지표사건으로 그렇게 가고 7월이 들불야학이 개설되는 시기죠. 인자 이 들불야학부분에서는 직접 개입은 안했어요. 다만 나중에 인제 돈 좀 필요하다고 모금하고 그럴 때 돈 좀 모아주고 그 정도만 했고. 근디 광주 운동사회에서는 이 지역 운동사회에서는 민족교육지표중에는 들불야학이 더미가 클 수도 있어요. 왜 그냐믄 요번 민주교육지표사건과 달리 이건 518에도 연결이 되니까. 7.80년대의 아우르는 사건이에요. 들불야학이 개설됐고 이 지역에서. 인자 어떻게 보믄 78년부터 이 지역의 노동운동이 꿈틀대기 시작한거죠. 그게 인제 그렇게 됐고, 아까 말씀드렸듯이 78년 말에 송백회가 결성이 됐고, 그
다음에 인제 그 78년 겨울이 오자 제가 이 민족교육지표 관련으로 교단에서 쫓겨나신 분들을 저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최대한 운동에너지로 또 이걸 바꿔내야 한다. 그래가지고 YMCA하고 이야기들을 해서 동계대학이라는 것을 실시했어요. 그래가지고 황석영씨를 통해서 서울에서 온 강사들, 좀 불러오고 이홍길교수부터 시작해서 명노근교수 등등 해서 송기숙교수도 오고 그 양반들 중에서 동의하신 분들이 이제 강의를 좀 하고. 그렇게 유료로 이게 80년 때 많이 행해졌던 것인데 우리가 광주에서 선구적으로 했던거죠. 티켓 팔아가지고 동계대학, 시민강좌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해서 돈 쪼금 남기고 그래서 인자 그 양반들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 그러는데 동계대학을 하고 그러고 인제 이 송백회를 여성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여성들의 어떤 구심체로서의 어떤 기금, 기금이 마련되면은 오래가거든요. 이것이 좀 힘이 생기니까 그래서 계모임 같은 것도 그래요. 요 기금이 좀 모여 있으면 계가 잘 활성화 되요. 기금이 안모이면 안되고. 다만 이제 우려가 되는 것은 돈 문제 가지고 도중에 깨지는 경우가 있고 그것이 좀 우려스러운것이지만 하여튼 송백회 기금을 좀 마련할 필요가 있다 그래가지고 이 참 치사한 방법을 썼는데 미술품 전시회를 인자 상당히 크게 했어요. 음 요건 79년이구나. 맞아 79년, 78년이 아니라 이 송백회기금 마련을 위한 미술전시회가 요거 YMCA에서 했는데 하여튼 이건 놔두고요.

3-2. 동지애

하여튼 내 개인적으로는 78년에 개인적으로 있었던 일인데 그게 인제 내가 민청학련 사건때 징역을 살면서 내 인생최초로 동지가 뭔가에 대해서 인제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동지 사전 찾아보면 뭐 동고동락하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 그런 식이죠 뭐. 그게 인자 그것이 그 추상적이고 애매해가지고 딱 감히 안 잽혀요 근데, 내가 석방된 다음에 고향에가 그 정신병이 좀 있는 분이 선배 한 분이 있는데, 어쩔 때는 맑았다가, 어쩔 때는 또 흐렸다가 거 정신분열증 비슷한 거였어요. 하여튼 그 양반이 손에 돈을 쥐면 인자 정신이 헤까닥하는거예요. 근디 그런 분들이 가끔 그런 분들이 어릴 때 동네에서 보면은 이 보통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한 것도 뻔히 보고도 못 느끼는 것을 딱딱집을대가 있다고요. 신들렸다는 뭐 그런 소리도 듣고 그러는데, 근디 내가 인자 215조치로 석방되고 집에가 있는데, 작은방에가 있는데, 마당에서부터 큰 소리로 한봉아 나왔다. 미안해서 너 바로 못 찾아오고, 고민 고민 하다가 할 수 없이 오늘사 왔다. 어찌고 해갖고 들어오시더라고 근디 그때가 인자 정신이 약간 인자 돌아올 때였어요 그 양반이. 영식이형이라고 영식인데 권영식. 그 내가 그 양반한테 내 인사를 한 다음에 참 형님 내가 좀 물어볼 것이 좀 있는데, 근께 뭐이냐 그래서 동지가 뭐예요? 동지. 그러니까 야 조용히 하고 펜 줘봐, 막써가지고 나를 주더라고요. 거가 인자 한자로 유무상통하고 쓰는거예요. 유무상통. 근게 순간적으로 짜릿한 맞다, 이거다 라고 인제 감이 오더라고요. 그래도 확인할라고 이거 설명좀 해주십시오, 근께 아무리 뜻을 같이한다고 해도 그 니들이 학생이니까 부자나 가난한 놈이나 있는놈 없는놈 가릴것없이 다 학생이니까 뜻하나라도 같이 막 모여서 일을한다. 동지라고. 그런데 나중에 결혼해서 가정을 갖고 직장을 갖고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누구는 가난하고, 누구는 부자고 그렇게 되면은 모여서 뭐회의하고 어쩌고 할 때는 나라가 어떻게 민족이 어떻고같은 주제를 갖고 막 이야기를 나눠도돌아스면은 가난한 놈은 집세걱정, 부인 병원비 걱정 학비, 자녀들 학비걱정 그런 세계로 빠져들어블고, 돈있는 놈은 돈벌궁리 투자할 곳 사업할 곳 어쩌고 저쩌고 생각들 완전히 딴 세상에서 사는거다. 절대 그 건 동지가 안되는 거다. 그렇게 돼서는 그러니까 진정한 동지는 뜻도 같애야 되는 거지만 서로 어려울 때 있는 놈이 없는 놈에게 주고, 그래서 함께 나눠 사는 나눠먹는 근게 유무상통하는 필요할 때 서로 있는 사람 없는 사람 돌려쓰는 이런 관계가 돼야만 올바른 동지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 그런 뜻으로 내가 유무상통이라고 쓴 거다. 유무상통하지 않고는 동고동락이니 공생공사니 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딱 감이 잡히더라고. 예 알았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런께 그러믄 인자 기왕 오셨으니까 저한테 해줄 말 있으면 한마디 해 주십시오, 그랬더니 또 종이 달라고 하더만 딱 쓰시더라고. 살생유택 그 세속오계 화랑 우리 학교 다닐 때 배웠던 그걸 써요. 살생유택. 그 이건 또 뭡니까 너 이거 무슨 뜻인지 알아? 그래서 이거 우리학교 다닐 때 배운대로 한다면 살아있는 것을 죽일 때 생명들을 죽일 때 함부로 죽이지 말고, 잘 택해서 죽이라 그런 뜻이라고 그랬더니, 거 잘못안거야, 그러믄요 그랬더니 죽일 놈과 살릴 놈을 정확히 구분해서 하라는 뜻이다. 죽이고 살림을 잘 택해서 하라. 엄정하니 구분해서하라. 나중에 죽일 놈들 있다가 무자별하게 무차별적으로 죽이지 말고 정확하게 골라서 죽이고 살릴 사람들은 끝까지 키워야 한다. 키운 뜻으로 받아 들여야지 생을 생 육성 이런 뜻으로 받아들이라고. 그런게 내가 고맙습니다 하고 큰 절 올렸는데, 그 살생유택 요부분 유무상통 요부분에대해서 많은 생각을 두 번째 징역 살면서 하다가, 내가 78년에 이제 재산목록을 작성했어요. 다시 말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무엇인가부터 정확하니 파악을 해 놓자. 그리고 불필요한 것은 필요한 사람들한테 줘버리자 그래서 유무상통할 수 있는 내 자신의 준비부터 갖추자. 목록을 갖춘 재산목록을 했는데, 일번이 만년필, 이번이 내가 가방에 담고 다니는 누가 준놈 뭣헌건데 자동 면도기, 그래가지고 쭉 삼번 손목시계 그래갖고 고무신 빤스 란닝까지 전부해놓고 인제 두 개 이상 있는 옷은 인제 잠바도 그렇고 상의 옷도 그렇고 후배놈들 줘브렀어요. 인제, 딱 필요한 것만 가지고 내가 산다. 그래가지고 이제 우리 아버님이 돌아가시면서 살아생전에 그 옆집을 하나 시골집을 요고는 인자 한봉이꺼 그런 식으로 대충 이야기를 해 놓으셨어. 나중에 인자 큰형님이 다 받아다 쓰셨는데, 내가 장사한다고 거짓말 치고 인제 거 형님한테 이야기를 했더니 고 집값이라고 그래갖고 얼마를 주시더라고요. 고놈 갖고 와서 인제 정상용이가 인제 이 꼬마시장한다고 구멍가게한다고 빚이 많이 져 있어요. 빚값는데 쓰라고 돈 줘블고, 나는 인자 다털어븐거지. 유무상통 그런 차원에서. 그라고 인제 정상용이가 결혼식을 못하고 인제 동거하고 있어. 그러니 운동한다는 사람들이 주위에서 쑥덕쑥덕하게 결혼도 안하고 동거나하고 이러면 안되나 결혼식을 시켜야겠다. 나도 그때 돈이 없고, 주변에도 돈이 없고 그래서 박형선이가 시골에서 농사지면서 보성에서 독사, 하사, 능사, 이런 뱀들을 잡아갖고 뱀술을 수십통을 땅에다가 묻어논 거에요. 그게 아주 잘 만들어가지고, 그거 마시면 사람들 되게 좋아해. 또 주라고 그러는데 그것이 그때 비싸게 팔렸어요. 서울같은데로 이러고 팔고, 뱀술 열병을 주라고 그래가지고 인자 고놈 팔아서 결혼식에 쓰라고 인제 뱀술을. 그런식으로 인제 그 뭐랄까 당시 운동이 그런 식으로 이뤄졌어요, 광주지역운동이. 뱀술 팔기작전에 들어가고 그랬는데, 어쨌든 간에 78년 이 광주운동이 굉장히 거 뭐랄까 활성화된 해였어요 그때 아주 78년이 그렇게 됐고. 그 다음에 79년으로 넘어가죠. 좀 쉬었다 하죠. 차한잔. 79년에 들어서 그거 저 인자 아까 말했던 그 1월 1일 무등산에 올라가고 그런건 78년 초에도 마찬가지였어요. 79년 초에도 마찬가지였어요. 규모가 커지고 어쨌든 간에 79년에 들어와서 거 한가지 이제 새로 시작했던게 5월 5일날 어린이날을 기해서 막 운동한다 뭐한다 해서 이리뛰고 저리뛰고하고 감방에 들락거리고 그래가지고 가족들하고 차분히 바람쏘이러 야외에 나가보거나 그러지를 못해 가정에서. 삭막하지. 물적조건이 안되니까. 그래서 운동하는 사람들이 어떤 친밀도 좀 높이고 그런 문제도 함께 풀겸해서 5월 5일날 민족가족야유회라는 것을 가게됐어요. 그래가지고 그게 79년 80년 5월 5일 마찬가지 하고 그 다음부터는 그게 어떻게 된지 모르겠는데, 그럼 인제 가정 가족들을 다 끌고나오니까 꽤 많은 숫자가 모였다고요. 79년 5월 5일에는 화순쪽으로 갔는데 지금 화순 어딘지는 기억이 안나요. 하여튼 그쪽에 가서 하루 쉬었고, 80년에는 여그 광주에 있는 식영정 그쪽으로 갔었고.

3-3. 현대문화 연구소

그렇게 해서 자꾸 내부의 단합 좀 높인것 같고 결정적으로 이제 79년에 신경을 썼던게 이제 수가 이제 불어났는데 참 모여 앉어서 이제 이를테면, 쉽게 얘기하면은 어디가면은 어떤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라는 곳이 있어야 하거든. 그래야 약속없이도 수시로 모일 수 있고, 정보교환 할 수 있고 그런데 이게 이를테면은 75년에는 카프카서점이 이제 가면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인제 모이고 그랬는데 이게 수가 좀 불어나니까 그런 자리가 마땅치 않는 거야. 다방에나 앉아서 그래봤자 만나야 다방에 가는 거고 돈만 들어가고 아깝고 돈도. 눅두서점이라고 있어봤지만 책방에 있는 것도 한계가 있고, 숫자가 있으니까. 그래서 내가 여러 가지 이유로 내가 또 옥바라지를 할려면은 인자 책을 계속 넣어야하는데 한두권넣고 끝나면 좋은데 그 다 볼때쯤이면은 교체를 해줘야하거든. 그런데 그걸 그때그때 책을 사서 넣을라면은 그러 안해도 가난한 우리 전라도 가정들 부담이 커요. 그래서 옥바라지용 책들을 왕창 모아놓고 파는 곳에다가 그책 이제 가족들이 와서 이제 그 책들을 갖다 넣어 갖고 다시 찾아오니까 이렇게 돌려서 다시 갖고 오고 새로 갖고 가고 이렇게 하면 서로 부담도 덜어주고 안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 취향에 따라서 책들을 고루고루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책을 한군데다 정기적으로 모여서 학습할 필요도 있고. 그래서 내가 인제 공간을 마련하기로 했어요. 이름은 그럴듯하니 지어야 하니까 제일
원만한 이름으로 현대문화연구소, 긍게 인제 애매해블지 현대문화연구소 그래블믄. 애매할수록 좋으니까. 현대문화연구소를 이 장동로타리에 있는 거 이층건물인가 되는데 거 이층 끝에 방인데 한 이십평짜리 됐어요. 고걸 이제 돈 여기저기서 빌리고 뭐 어쩌고저쩌고해갖고, 전세금 얼마 월 얼마 이런 식으로 하고 이제 소장을 아예 그냥 문덕희라고 내 삼년 사년후배한테 해놓고 얼마 있다가 이제 김희택이 정용하이런 식으로 소장이 바뀌게 됐는데, 나는 인자 전면에 안 나설라고. 그게 현대문화연구소에다가 이 가구들 짜서 돈 안들이고 할라다보니까 인제 해갖고 길게 탁자들 놓고 의자 놓고 앉어서 하게 의자는 그때 그 관광호텔 사장을 황석영씨가 잘 알아가지고 어떻게 어찌어찌해서 인제 호텔이라 조금 낡은 의자 같은 것을 교체하는데 삘건 의자 등받이 의지 갖다놓고 많이들 놓고 돼지저금통 큰놈 탁자위에가 올려놓고는 앞에다가 운영자금을 마련해야 하는데, 나중에 또 사건 터지면 어서 돈 나서 움직이겠냐고 골치 아플 것 같애서 차 한 잔으로 연구소 운영에 동참합시다 그래 갖고 커피한잔, 오백원 그때 가격으로 하면은 시중가격에 한 열배 가까운 가격을 붙여 브렀어요 거디가가 인자. 차 한잔에 오백원. 그래가지고 예를 들면 교수님이 한분 오셨다 그러면은 그 둘러 앉어 있는 사람들이 딱 보믄 일곱명이여 그러믄 여덟잔 여덟곱하기 오백원 그러면 사천원이믄 내 놓으믄 되는데 대부분 만 원짜리 놓고 가고. 인자 저금통에다 놓고 완전히 칼만 안 들었지 강도라고 그라믄 웃고. 차도 안마시고 거기다 돈 넣고 가시는 분들도 있고. 그래서 인제 책장을 짜놓고 인자 구호를 청했어요. 그 시절에. 일기장과 가계부를 제외한 책은 다 내와라. 족보, 일기장 가계부 족보를 빼논 책은 전부 다 내놔라. 그래가지고 인제 서울 출판사들까지 연락해갖고 서울서 돌았어요. 출판사들을 돌고, 왜 그냐믄 그때 학생운동출신들이 제적당한 사람들이 올데 갈데 없으니까 배운 재주는 있고 그러니까 번역을 많이 했는데 번역을 하다가 어떻게 출판사하고 연결이 돼가지고, 보니깐 이거 할만하거든 출판사들을 많이 찾은 거예요. 거기서 베스트셀러도 나오고 돈 좀 번 사람들도 있고. 인제 그런 것들이 토대가 돼 가지고 80년에 출판운동이 활발하니 해 갖고 좋은 책들이 마 많이 냈던 거지. 근데 속없는 이 후배들은 팔팔뛰는 애들은 감방 갔다나온 애들은 선배들한테 이 외국책이나 번역하고 자빠졌다고 선배들 욕을 욕을 바락바락하고 그랬는데, 긍게 인자 날카로와지면 어차피 좁게 보니까 속내용도 모르고 80년에 그 사람들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어쨌든 간에 서울 이제 돌아다니면서 책좀 보고 책도 좀 모으고 집집마다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쓸만한 책들 뿌리채 뽑아갖고 와서 넣고 한 이천권을 책장에다 빡빠가니 채워넣고 그리고 옥바라지할 때 쓰라고 가족들한테. 서울서 와서도 광주들러서 거기 들러서 책 갖고 가고. 광주에서 자기 가족이 있거나 그러면은 그라고 한참 악질적인 짓을 했지. 족보와 가계부와 일기장만 빼고 다 내놔라. 인제 그렇게 하고, 그 사무실에 이제 송백회 자기들 회합장소로 쓰게 되고 그 다음에 이제 나중에는 거기서 80년 초에 80년 1월에 극단 광대가 출범을 하는데 극단 광대 후원이 모임처럼 된거예요. 거기다가 인제 모든 살림도구들 놔두고 그렇게 했는게 그 놔두고 그 다음에 민주청년 협의회 회의실 겸 사무실 구속자협의회를 이름을 바꿨어요. 이 민주청년협의회로. 그러니까 인제 그 민주청년협의회 얘기좀 해야겠네요. 어떻게 됐냐믄 아까 그 인제 조직원 명령이오 빨리 나오시오 그 사건으로 해서 이제 대구쪽에서 조사하는 과정에서 광주에가 전남 민주 구속자협의회가 있다는 것을안거예요. 인자 그걸 중앙에 보고를 하니까 전국에 유일한 거예요. 거기가. 그러니까 인제 불벼락을 내린거예요. 여기 정보부에다가. 왜 인자 나뒀냐 깨라. 그러니까 이놈들이 불러다가 구속자협의회회원 한사람한사람 놓고 탈퇴각서를 쓰라고 한거예요. 거기서 안쓰면은 인자 두들겨패블고. 지금 서울대 교수로 있는 갑자기 사람이 가끔 이름이 갑자기 생각 안날때가 있다. 굉장히 나하고 가까운 친군데 갑자기 이름이. 아니 그 조길례교수 남편. 최, 이런 또 갑자기. 기다리고 고 졸도해브렀다고 맞고. 그래가지고 이놈들이 다 각서를 받고, 해체했다고 이제 발표를 했는데, 보고를 하고 그랬는데 다시 최권혁이 여기 영문과 조길례 교수 남편이지. 이 졸도까지 하고 그랬다고 그랑께 이 친구들이 다시 YMCA에서 모임을 해 갖고, 이거 강제로 쓴 각서다. 이렇게 두들겨팼다 졸도까지 했다 이건 무효다 그라고 규탄하고 해가지고 다시 이제 이걸 재결성 해븐 거예요. 그렇게 인자 깡으로 버텼지 이지역에서. 그래갖고 이 소식이 서울에 전해지자 서울에 있는 빵잽이들이 민청세대를 중심으로 해서 광주에서는 이렇게 하고 있는데, 우리는 뭐냐. 그래가지고 이제 자기들도 그동안 인자 거기서는 주로 출판사에서 모인거예요. 인자 번역실 비슷하게 만들어가지고 공동번역실, 번역을 할라는데 집도 그러고 애기들이 뛰다니면서 떠들고 그런께 번역실이 따로 없거든. 공동번역실이라는게 사무실하나 빌려가지고 자기들 번역할 책거리들들고 모으는거제. 거기가 인제 연락처겸 회의실겸해서 쓰였는데, 이 사람들이 자기반성을 하고 광주를 이렇게 고통 속에서 탄압받으면서도 지켜가고 있는데 우리가 뭐하냐 그래가지고 자기들이 만든 것이 민주청년인권협의횐가 인권이 들어갔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민주청년협의회로 이름을 바꿨어요 이제. 시대에 맞게. 구속자들뿐만 아니라 구속자 아닌 사람들도 받아들여야 한다. 많이 생겼으니까 그렇게 해가지고 민주청년협의회로 바꾸고 감방에 간적이 없는 박효선, 정삼용, 이향연, 이런 친구들이 들어왔어요 이제. 그 다음에 긴급조치 9호 세대들도 들어오고 그래가지고 조직을 확대 강화한건데 그 내가 졸지에 또 회장을 맡게 됐었는데. 이 민주청년협의회실 사무실로도 쓰고, 그래갖고 앞에다가 그러고는 인제 문 앞에다가 뭐라고 써붙였냐면은 거갖고 정보부 애들하고 싸웠는데, 학생과 정보사찰시관은 출입엄금하고 써 붙여놨어요. 학생과 정보사찰기관은 왜 그냐믄 학생들 들락거려노믄은 엄한놈들 맨날 잡혀가고 끌려가고 날벼락 맞으니까 사회운동에 매진을 해야하기에 그리고 정보사찰기관은 기분 나쁘고 긍게 못 들어오게 해블라고. 그러고 써 붙여놨는데, 정보부애들이 요쪽 우리가 끝방이었는데 요쪽 끝에가 다방이 있었다고요. 연합다방인가 그랬을거예요 연합빌딩이라고 그랬는데 그걸. 그 일층 아래 밑에가 녹두서점이고 인자 그리 옮겨왔는데, 정보부에 계장이 와갖고 사정을 하는거여. 뭐라고 하면은 잘 알거아니냐 각 지역 사정을. 대한민국천지에 정보사찰기고나은 출입엄금이라는 이 무지막지한 놈의 글자를 붙여논데가 여기 말고 또 있냐. 이건 우리 자존심문제다 광주. 인제 체면 좀 살려주라 안 들어갈게. 아예 떼어도 우리 안들어갈테니까 좀 우리 체면 살려, 타 지역에서 알면 웃음거리다 우리는. 정보부 알기를 우습게 진짜로 이건 해도 너무한거 아니냐, 긍게 내가 그랬어. 당신들이 분명히 안들어올 것 같다는 내 판단이 슬때까지는 좀 붙여놓을테니까 아예 기다리라고 대신 저 만약이 뜯어내고 나면 글씨 더 크게 써 또 붙이고 할거니까 나중에 빼인뜨 칠하고 그래블거니까 손대지 마라고. 그래갖고 인자 그걸 버텼다고. 그래갖고 아조 거기서 그 간사로 일하던 임영희 같은 경우도 뭔 일이 있어가지고 그 사람들이 와서 똑똑 문 두드려갖고 이렇게 여니까 들어올라오면 막 쥐어뜯어블고 아조 유명하게 아조 악질적으로 굴어갖고 못들어오게 막고 그랬는데. 아예 못 들어왔다고 이 사람들이. 그래가지고 인제 공간 마련한데 서울서 운동권친구들이 내려오면은 딱 문열고 입을 떠 벌려. 너무 넓고 멋지거든 깨끗하고 걸레질을 내가 아주 잘하니까 내가. 어떻게 이렇게 큰. 자기들 공동번역식이라고 지저분하고 좁고 아조 근디 춥던디 여기는 아주 멋지게 해 놨다고 부러워가지고 어쩔줄 모르고 그러는데. 그 현대문화연구소 고게 인제 딱 일년도 못채우고 518 만나가지고 작살나버렸는데, 어쨌든 거 현대문화연구소를 인제 개설을 했고. 그 다음에 인자 아까 말씀드렸던 말했던 송백회 기금마련을 위한 미술품 전시회라고 해가지고 인자 황석영씨를 통해서 서울에 있는 화가들을 접촉을 해가지고 주로 항아리, 그 도자기 이 전시했다가 안 팔린것들 요것들을 이제 이를테면 공출을 한거지. 그래서 인제 뜻있는 사람들이 작품을 내놔가지고 작품을 내놀때마다 특징이 있더만. 그 예술가들은 얼마 밑으로는 절대 팔지마라. 어떻게 보면은 자존심중의 하나지. 자기 작품이 너무 싸게 팔린다는거 싫은 모양이여. 40만원 이하로는 팔지마라 이런것들. 그래 하여튼 그런 식으로 해가지고 뭐 작품들을 모아서 이고걸 용달차에다가 포장해가지고 포장해가지고 광주로 싣고 와서 YMCA거 현관 공간에다가 진열해놓고 밤에 거기서 자고 인자 손님들은 미리 맨마다 전남대 총장 그때 사십만원짜리 하나 팔고 그랬는데, 꽤 많이 팔았어요, 그때 기금을 삼백만원 마련했죠. 그래가지고 그때 인제 우스개, 우스운 일이 있었는데 저녁에 자면서 오줌이 마려운데 에이 사십만원짜리 요강에 오줌 한 번 싸봐야지 거기다 싸고 아침에 가서 붓고 씻고 거기 깔깔거리고 웃고 그랬는데, 이 그렇게 해서 송백회 기금을 마련을 하고, 하여튼 그렇게 해서 조직을 거 추스러가는 그런 과정이 있었고.

3-4. 문화운동 - 극단광대

그 79년도 말부터는 이제 그 박효선을 중심으로 해서 문화운동하는 친구들 묶어서 이제 광대, 극단 광대라는 것을 만들어서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 YWCA산하에 두는 것으로 그렇게 YWCA 극단 광대. 이런 식으로 처음에는 그렇게 했다가 나중에는 YWCA를 띠어브렀는데, 이 친구들이 이제 인연을 어떻게 맺게 되었냐면은 78년 10월 11일에 있었던 북동 쌀생산자대회때 이 친구들이 이 함평고구마사건을 주제로 한 마당극을 만들어가지고 쌀생산자 대회 때 공연을 했어요. 그래가지고 아조 우뢰같은 박수를 받았지. 굉장히 효과가 컸는데 그걸 계기로 해가지고 연극반하고 전남대 탈반 애들이 묶어져서 극단 광대를 80년 1월에 출범을 해고 그러고 인자 그 3월에 유명한 돼지풀이 마당굿을 하게 되죠 광주에서. YMCA에서 했는데, 근디 인자 문제는 극단 인자 출범할 때 돈이 없으니까 북 장구 같은 악기 하나가 없는거예요, 하나가. 근게 내가 인자 그걸 돈을 구해가지고 전부사고 주고 그래가지고 이제 창단 공연을 하자 그래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그래가지고 그때 돼지값 폭락으로 난리가 났어요. 농민들이 돼지새끼를 시장으로 팔러 갔다가 너무 싸니까 화가 나갖고 다시 차에 싣고 오다가 집에 가면 또 사료값이 비싸니까 애물단지거든. 버스에다 놔두고 내려버리고 새끼돼지들을 그런 일들이 막 벌어질 때였어요. 피폐한 농촌의 참혹한 상황을 돼지를 중심으로 해서 해갖고 풍자적으로 작품을 해보자 그래가지고 돼지풀이 마당굿을 만들었는데, 공동창작으로. 그래가지고 서울 올라가서 이제 이 또 황석영씨의 연줄을 최대한 활용한거죠. 양희은 김민기 최희완 다 내려왔어요 이제. 그래가지고 공연하고. 아이 뭐 양희은이 올때 버스로 같이 내려오고 아 돈없는데 뭐 어떻게 기차 어찌고 버스가 더 나. 거기에서 가면서 극단 광대에 세상에 풍물도 하나도 없이 뭔놈의 문화운동을 기금을 마련해줘야 한다 그래가지고 내가 그때 백오십만원을 남겨서 주겠다 그래가지고 내가 기획을 맡았어요. 이게 80년 3월 이야기에요. 그때 기획할 때 웃긴게 구호가 결사강매, 현찰박차기 그랬죠 내가. 그래서 티켓을 이제 할당을 한거지 그래갖고 결사적으로 팔아 현찰박치기 외상 절대 없어. 그래가지고 못팔믄 돈 내놔 그대신. 돈 딱 가져가블고. 영수증같이 해갖고 딱딱해갖고 받고. 악착같이 해갖고 그 이야기를 듣고 김민기랑 서울에서 온 친구들이 세상에 요런 공연해갖고 손해 안보믄 성공하는거다. 여기서 남긴다는게 말이 경험이 없어서 그런소리한다고 나한테 글드라고. 긍게 효선이가 그래도 합심이 하면 다른데, 합심이 하면 남겨.
면담자 : 선생님 별명이 합심?
구술자 : 응 합심. 이 막 그런적이 없다. 적자 안나믄 성공하는거라고. 근데 백오십만원 남겼어요 그때. 그라고 작품이 좋았기 때문에 호응도 대단히 좋았고. 내가 앞에서 기도스다시피했는데, 극 보고 나가면서 막 나보고 좋은 작품 보여줘서 고맙다고 그라고 악수하는 분들도 많았어요 나이드신 분들 중에서. 그래 그 이후로 이제 돼질풀이 마당극가지고 여기저기 이제 초청공연을 다녔죠. 농민단체들, 어쨌든 인자 그렇게 됐는데. 이 광주문화운동도 돈이 없어가지고 이 탈춤 배웠다는 이야기를 들어보면은 얼마나 한가 서울에서 문화패들이 탈춤전문 강사를 모시고 자음 자봉가 스머푼가 어디 해수욕장 안가봐서 모르는디 어디로 온거예요. 와갖고 여름에 텐트치고, 자기들끼리 수영도 하고 놀다가 시간나면 탈춤 모래사장에서 배우고. 이 근디 이소식을 듣고 광주에 이 문화운동 팀들이 자기들은 이런 강사를 초청해서 배울 기회가 없으니까. 돈이 없으니까. 그걸 쫓아내려간 거예요. 내려가가지고 꽁자로 배울 수 없으니까 거기서 떨어진데다가 텐트쳐놓고 이제 동네 수영복도 안 입고 동네청년들이 뭣한가 구경한 것처럼 얼쩡얼쩡 가갖고, 인자 거기서 가르치고 배우는걸 보는 거예요. 그래갖고 눈썰미로 익혀가지고 돌아와서 안보인데 돌아와서 거기서 아까 이렇게 하던데 아까 이렇게 했어 자기들끼리 본 것을 기억해가면서 연습해가면서 그렇게 배우고 그랬다고. 비참한 이야기인데, 어쨌든 간에 광장이 뭐야 극장광대가 그렇게 성공적으로 출범을 했죠.

3-5. 방화사건 주모자로 연행과 물고문

근데 인자 나는 그런거 떠나서 이게 거 10월 달에 이제 또 감방을 가게 되었는데, 10월 3일경에 전남대 인자 본관 방화사건이 벌어진 거예요. 지도감사실. 안기부 직원들하고 정보부 직원들하고 서부경찰서 형사들 일종의 쉼터지 거가 사무실이지. 저 학교 본관에가 그런 방들을 줬으니까 아예. 근디 인자 고걸 그 연통을 통해서 불질러 갖고 거 조끔 태워갖고 피해액이 만 오천 원 나왔는데, (웃음) 그 원수들이 거 백장민가 하는 영화보고 나치하에서 학생들이 운동 뭐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죽음인가 하여튼 그런 책을 책 내용을 영화한 거 있었다고요. 고것보고 와 가지고 이제 고희숙이 머 신영일이 이런 애들이 하여튼 지앙을 친거에요. 그래서 또 이 자식들 태울라면 야무지게 태우지 그거 조금 태우고 어쩌고 인자 그러고 인자 쉽게 넘어갔는데, 얼마 이후에 내가 돈이 또 운동자금 마련 때문에 이게 뉴스에서 멸치를 가루로 만들어서 가루멸치로 만들어서 팔면 잘 팔린다고 그래가지고 이제 후배가 자기 형하고 뭐한다고 그래가지고 가루멸치가 잘 팔릴거라는 얘기를 어서 들어놔서 가루멸치를 내가 한 번 팔어볼까 하고 여수를 내려가고 있는데 부마항쟁이 터진 거예요. 인자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내가. 이거 말이 안된다 이건. 왜냐면은 인자 그 동안에 쭉 운동을 해오면서 봤지만 그렇게 대규모로 어떻게 보면은 민중봉기형식으로 그렇게 크게 터지리라고는 상상을 못해버렸으니까 당시 상황으로서는. 이게 전망은 둘째하고 아예 상상은 못했으니까 그저 대학에서 유인물 뿌려가지고 학생들 몇십명이라도 모이면은 뭐 될 정도고 농민들이 아까 말했지만 팔백명 모여서 집회하는 정도 그거이 큰거였다고요. 아 근데 부산 마산에서 그런 엄청난 사건이 터져버리니까. 이거 뭐 긍게 의외에 사건에 충격을 받았지요. 어떻게 이거 가능한가, 왜 우리는 예상을 못했을까. 전망을 상상도 못했을까, 이거 문제가 있다. 빨리 가봐야겠다 내가. 그러니까 내가 지금 이 사회를 잘못보고 있고 대중을 잘못보고 있다. 그래가지고 인제 거기를 가기로 맘먹고 광주 들러서 일처리 해갖고 갈려고 왔어요 이제. 일을 좀 지방에서 보고 와가지고 연구소에 딱 들어갔더니 그때 23일이에요. 그랬더니 형사들이 들이닥쳐가지고 그 몇 일 전에 남민전사건이 터졌죠. 남민전사건이, 남민전사건은 묘하게 피했는데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어쨌든 그래가지고 이제 무작정 나는 끌려간거지. 그랬더니 이 무지한 놈들이 서부경찰서 수위실 여가 유치장이면 여가 수사과이고 일층 여가 유치장인데 유치장옆에 숙직실이 있는데 숙직실로 덱고 들어가요. 들어가서 보니까 이미 의자 두 개 세워놓고 몽둥이 걸어놓고, 빠께스에 물, 걸레 주전자부터 딱 물고문 준비 해놨더라고. 그래갖고 들어가서 가자마자 이런(등치 큰)놈들이 있어가지고 옷 벗기고 그리고 이렇게 수갑채우고 이렇게 해서 여기다(허벅지에다) 장대 채우고 물 먹이는 물고문을 시작을 했는데, 인제 그것이 어떻게 됐냐면 부마항쟁이 터지자 부산에서 마산으로 번지고 가라앉을 만하니까 대구 계명대에서 그러니까 이것이 전국으로 확산될 것을 긴장을 한 거예요 이놈들이. 정권차원에서. 그라고 광주를 중시한 거예요. 가능성이 제일 높다고 판단한 거이죠. 그래서 그때 인제 내가 들은 정보로는 인제 그때 육군항공대에서 이 가스탄을 가득 실은 경비행기를 인자 광주 송정리 비행장으로 내려보내고 해서 광주에 대해서 이제 사전 준비를 해가고 있던 시기예요. 근데 이미 광주에서 본남 전남대 본관 방화사건이 터지고 남민전사건 부마항쟁 그러니까 이 광주에서 예방을 철저히 해라. 긍게 하여간에 이 불소시게 역할을 할 놈들을 철저히 잡아라 이런 지시가 떨어진 거예요. 그러니까 나중에 들어보니까 우리 고문한 놈들이 세련된 정보부에서 파견된 놈들도 아니고, 경찰출신들도 아니고 전경들 중에서 등치 좋은 놈들, 사람 때리믄 기분 좋아할 때리는 것을 즐길 놈들을 동원한거야. 그래가지고 그냥 방에서 직접 패버리니까 거 수위실 숙직실에서 수사과에서 다 들려블고, 유치장에서도 다 들리는거예요. 지하실이 아니니까. 지하실도 안기부같은데 정보부같은데 보믄 지하시리에 있는 수사하는 방도 전부 방음장치가 돼 있는데요. 그런 것도 안 되어있는 유리창 여닫이문인데 새끼들이 거기서 무자비하게 이게 고문으로. 그러니까 인자 광주 학 전남대에서 쪼끔 의식화서클 어떻게 해갖고 뛰어다니는 놈들 거슬렸던 놈들 다 잡아다가 고문을 무조건 해 버린거여. 그때 화장실 같은데다 낙서했던 친구 신민정부터 시작해서 편지, 괴편지 보냈던 발신인 이름 안하고 보냈던 박병기나 이런 애들부터 시작해서 뭐 시위 준비했던 애들부터 다 잡아브렀어. 물고문 해버리니까 두들겨패고. 그러는 과정에서 인자 나를 방화사건으로 연결 시켜서 잡아 넣어블라고 계획적으로 하는 과정에서 박병이 이 원수가 내 이름을 부르는 바람에 내가 들어갔는데. 박병기가 하루는 와 갖고 연구소에 날더러 형님 나 돈 얼마만 주소 그래, 왜? 얻다쓸라고? 근디 물어보지 마시구요 그 돈으로 술먹겠습니까 꼭 필요해서 그런다고. 근디 인자 내가 암말도 않고 주고 말아브렀으면 쓰거인데 그게 또 얼마전에 김영종이가 징집거부운동에 참여해 갖고 수배당하고 도망다니는데 영종이가 돈이 좀 필요하다고 도피자금이 필요하다고 연락이 와가지고. 이번에 내가 김성종이한테 성종이한테 내가 돈을 좀 해서 올려보냈거든요. 인제 박병이가 그래서 영종이 도피자금 때문에 돈을 써블고 얼마 안 남았으니까 내가 주란대로 다 못주고 요만만 줄테니까 써라 그러고 돈을 줬어요. 그러니까 그 돈 준놈을 불어븐거여 인자. 윤한봉이가 시켰지 계속 나를 들이대갖고 고문을 하니까 그래가지고 돈 준 것이 드러나브렀죠. 그래가지고 너 잘걸렸다 나를 잡어다놓고는 이 남민전으로 붙어보고, 뭐여 이게 방화사건 배후조정으로도 붙여보고 나는 전혀 모르는 애들이니까 그 애들을. 인자 그래가지고 그래가지고 내가 3일간을 엄청나게 엄청 심하게 고문을 당해브렀습니다 물고문을. 인자 얼마나 물고문하게되면은 이 허리라던가 이런데를 다 상하게 되는데, 몸부림을 치니까. 묶어놓고 해브니까 허리가 부어버려 가지고 내가 인제 벽에 기대지 않고는 앉지도 못하고, 일어설 때도 이렇게 못 일어나고 벽잡고 일어스고 앉을때도 벽잡고 미끄러지듯이 간신히 앉고 그렇게 됐는데. 그런데 인자 삼일째 되는 날 저녁에 그렇게 하고 고문하다가 피곤하면은 이놈들이 두놈이 지발하나에다 내발 요놈발에다가 내발 이팔에다가 내손 저팔에다가 내손 수값 네 개를 딱 채워갖고 지그들 코골고 자는거예요. 인자 긍게 내가 꼼지락만 거리면은 발로 차블고 때려븐거여. 지그들은 인자 밑에다가 깔고자고 시월달인데 숙직실이 찬데 이 바닥에서 나는 암것도 안깔고 하니까 등 몸은 차지 물붙고 그러니까 이놈들이 맹물로 한 것이 아니라 화학약품이라고 그래요 남자구실 못하게 하는거라고 그래갖고 뭘 타갖고하는데 그런것들이 범벅이 돼 있으니까 가렵지. 사람 환장하지 가렵긴 한디 이거 긁을수가 있나. 여기서부터 뭐가 긴것 같으면은 한 오분에 걸쳐서 여기서부터 가렵기 시작해갖고, 그렇게 대각선으로 요리 지나가는 것 같애 벌레가. 진짜 진짜 암안보이니까 뭐. 그래가지고 그 가려움을 인자 막 얼굴 시렵게 하면서 아주 미치지. 저려오지 꼼 움직이면 때려블지 그렇게해갖고 얻어터지다가 고문당하다가 물고문당하다가 이렇게 한놈은 올라타고 내 머리하고 귀딱잡고 한놈은 볼펜들고 나를 깔고 앉아갖고 막 주먹을 온몸을 문질러요 그럼 민감해져 벌겋게 된다고. 그럼 인자 눈 딱 가려놓고는 꽉 잡아놓고는 볼펜으로 옆구리를 팍 쑤신다고 그러면 이 몸이 의지와 관계없이 이렇게 욱 이렇게 간다고. 내 눈가린지라 어디로 숙인지 모르지 또 여글 팍 또 욱하고. 요걸 계속 하는거야 인자. 사람 완전히 인자 땀으로 목욕하면서 인자 이렇게 문질러 놓은 것이라 민감하니까 이 불펜 이렇게 쑤셔도 되게 고통스러워요 인제. 인제 이놈들은 즐기는거야 인제. 근데 26일날 아침이 되니까 이놈들이 갑자기 나갔다오더니만 내 수갑을 풀어주면서 다 같은 국민이고 나라걱정하는 것은 방법이 다를 뿐이제 똑같은 거리느니 어째 좀 몸이 어때 어디가 어때 해쌌고 담배를 주고 이상한 짓거리해싸 근데 이런 고문을 받아보면은 갑자기 인자 이상한 짓거리 하면 또 다른 방법으로 괴롭히는 것의 시작을 의미하거든. 이 새끼 또 뭔짓거리 할라고 이러노 이러고 있는데 한놈이 모르는 놈이 하나 들어오더만은 벽에 탁 기대앉더만은 어허 나라가 걱정 돼 나라가 걱정돼, 그런데 실내방송이 들리는데 뭐락뭐락한디 유고 계엄령, 들려오는거야. 이놈들이 갑자기 이상한 짓거리하고 유고, 계엄령 나라가 걱정, 아! 이거 박정희 죽었구나 이것이 순간에 발끝에서부터 간질간질 해갖고, 그 쾌감은 아직 그 이후로는 느껴본 적이 없는데 온 몸이 간질간질하면서 희열이 아 나 살았다 나 더 이상 고문없다, 박정희 죽었다 세상바뀐다. 아 그때 참 희한한 경험했어. 우리 어머니는 이제 그때 광주에 있는 작은 형님 집에 계시다가 덩실덩실 춤을 추셨다는데, 한봉이 살았다 한봉이 살았다, 박정희 죽었다고. 그래도 인자 그 뒤로 유치장으로 넘어갔다고 교도소로 갔는데, 그때 내가 팔이 완전히 이쪽 왼쪽 팔이 완전히 마비가 돼브렀어 인자. 그래갖고 인자 뿔 이렇게 집어도 힘이 안들어. 그래갖고 맨날 교도소에서 10월 내가 23일날 구속 돼 끌려가갖고 12월 9일 날인가에 나와요 그러니까 최규하가 인자 대행을 하면서 대행이었던가 체육관에서 다시 뽑혔던가 그래가지고 긴급조치를 해제를 해요. 그래서 인제 뭐 인자 법이 없어져 브렀으니까 이 석방 된 거예요. 그래가지고 그때 모두들 들어갔던 후배들도 다 그때 한꺼번에 나오게 되는데, 나와가지고 고향에 가서 선산에 가서 인사드리고 어머님이랑 모두 인사드리고 있는데 1212쿠테타가 터진거죠. 쿠테타가 터졌어요. 아하 쉽사리 가는 것이 아니구나. 이게 좀 뭔가가 잘못가고 있아. 이게 괜히 헛꿈꿨던 것은 아닌가 민주화 가능성에 대해서 낙관했던게, 무색하게 돼 버린거지 인제 그래서 아 빨리 내가 부산을 가봐야겠다. 부마항쟁의 연행되기 전에 갈라 그랬는데, 연행된 바람에 못 갔는데 이제라도 가서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 현장확인을 해야겠다. 그러고 인자 마음먹고 그때 겨울비가 부슬부슬한테 내가 부산에 갔죠. 부산으로 가서 부마항쟁에 시위대들의 진출경로중에서 중요한 뭐인제 국제시장이라들지 남포동이라든지 이런데를 혼자 비맞고 돌아다니면서 팥죽 끓이는 아줌마들한테 얘기해보고 사람들 거기 또 부산에 운동하는 친구들 이야기도 듣고, 거그 거쳐서 마산으로 가려다가 부산에서 홀연히 깨달은 것이 아하 이래서 내가 못내다봤구나, 그렇게 돼서 인제 아 마산에 갈 필요 없다. 그라고 광주로 다시 돌아오게 된 거였죠. 그 그과정 그과정부터 미국에서 활동하다가 돌아올때까지의 이야기는 여가 다 쓰여져 있어요. 인제 그 현장 갔다온 것부터가 끌려가서 10월달 거기 거까지가 여가 들어있어요. 이 이야기는 뭐 길게 할 필요 없는거요. 다만 이 책에서 빠진 부분이 그 518이후에 내가 수배당하고 있으면서 왜 그렇게 도피생활에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없었던가에 대한 이야기 중에서 조직의 명령에 그 이야기는 빠져있었다고 여가. 요고 쓸데만 하더라도 공소시효가 있었던때라 그걸 못다룬 거죠. 그리고 인자 그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조끔 더 하고 5월 관련 이야기 등등.

3-6. 박기순의 죽음

그러고 인제 78년 12월에 25일날 인자 박기순이가 죽는데, 그것만 오늘 이야기하고 끝냅시다. 그 기순이는 완전히 내 대신 죽었다는 것 때문이 기순이 이놈 빚이 많은데 내가 인제 78년 이렇고 뛰어 다닐때 이제 여전히 똥가방 매고 다니면서 동가숙서가식하고 다니는데 자꾸 인제 주변에서 인자 나이 묵어갖고 그라고 다닌다고 방 얻으라고 돈을 준거예요. 근디 그때마다 활동비로 써버린거지. 그러니깐 세 번째 똑같은 방을 얻으라고 준 돈을 준 사람이 있더라고요. 미안해블더라고 이놈 써불고 두 번째 준 놈 써블고 세 번째는 할 수 없이 내가 방을 얻었어요. 전남대학교 의대 앞인데 전남대 앞인데 골목길에 들어가가지고. 또 인자 방을 얻어놓고 있으면서 들어가서 잘 안자고 그러는데 겨울이 서서히 다가오고 그러니까 내가 인제 연탄을 안 때고 있으니까 연탄 때라고 인자 띠어서 쓰라고 이사람 저사람 돈을 주는데, 또 계속 활동비로 써버리니까 어느 날 어디 갔다 와보니까는 송백회 여자분들 중에서 한 사람이 아예 연탄을 딱 떼서 쟁여놨더라고 부엌에다가. 그랬더니 후배들이 용아하고 삼용이하고 누가 서인가 혹시 가스 샐지 모른다고 해가지고 오래 안스던방이라고 그래가지고 문간방이라고 방을 전부 손을 봤다고요. 연탄대라고 나보고 그런데 인제 연구소에 다음날인가 내가 앉았는데, 도청에 주택가 시청 시청에 주택과엔가 관계된 친구가 있어갖고 연탄개스 걱정을 하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까 그 친구가 그래요. 자기들이 국민주택인가를 지은데 단지로 서민들을 위해서 염가로 팔고 뭐 어쩌고 저쩌고 하는데 연탄개스 샌가 안샌가를 확인하는데 기가 막힌 것이 있다는 거에요. 그게 뭐냐 그랬더니 요만한 쪼그만한 노랗게 생겼어요. 구멍 뽕뽕뽕 뚫어지고. 얇고 요놈을 연탄불 타오르는 연탄불 위에다 놓고 뚜껑을 딱 덮으면 방에 연탄 개스 샐만한 구멍이 있으면 요 노란 연기 같은것이 다나온다는 거야 거기만 막으면 된다는 거야. 연탄개스는 눈에 안 보이는데 요건 색깔이 노란연기가 올라오는 거여. 그럼 여지없이 찾아낸다. 이걸 가지고 써보라고 날 주더라고. 두 개를. 그래서 인제 집에 와서 연탄불 큰 집주인한테서 빌려가지고 그래갖고 인자 불을 붙였어. 그때가 열한시가 좀 넘었는데, 인자 이미 후배들이 손봐놔서 안심하고 잘라고 했다가 가만있자 그 친구가 준거 한 번 실험을 해보자 그래갖고는 나가서 그걸 얹어본 거예요. 그래갖고 뚜껑 덮어 놓고 인자 누워있는데, 웬걸 여기 저기서 노랗게 나와브러. 그러고는 바로 그길로 나와 가지고 인제 열두시 그때는 통금이 있을 때라 황석영씨 집으로 갔어요 기독병원 뒤에가 있었는데 양림동. 그 골목 이렇게 돌아가면 여기가 철길, 논 그땐 암 것도 없었어 지금 봉선동 자리. 거기를 가는데. 거기 갔더니 부부싸움 하는 소리가 동네방네 떠들어요. 시끄럽게 나버려요. 저놈의 빌어먹을 여편네, 아이고 그래갖고는, 안되겠어요. 또 다시 얼른 골목길 빠져 나와갖고는 통금이 다 되가니까 택시타고 인제 주월동에 내 여동생하고 결혼을 했기 때문에 형선이가. 그 부부가 시에서 지은 국민주택 같은 데에 거기서 살고 있었는데 조그마한 단층. 글쎄 거길 갔더니 마침 잘 왔다고. 내 여동생 하는 말이 기순이 아가씨가 이틀째 안 들어온다는 거에요. 그 들불야학 일이 바빠갖고. 크리스마스 앞두고 성당으로 가서. 그러니까 연탄 따뜻하니 때놨으니까 노골노골하니 여기서 푹 쉬고. 그러니까 문칸방이, 방이 두갠데. 큰방에서 잠을 자고. 근데 내가 바로 그 방에 들어간 게 아니라 오래간만에 봤으니까 형선이랑 여동생이랑 앉아서 좀 있다 들어가서 자기로 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12시 좀 지났는데 기순이가 온 거야. 기순이가 인제 애들하고 같이 들불야학에서 쓸 난로에 쓸 솔방울 줏으러 애들이 오고 주워오고 어쩌고 늦게사 버스타고, 외곽도로에 왔는데 버스가 두갠가 자기가 손을 들어도 지나쳐 불드라는 거여. 그래서 들어갈까 말까 하다가 에이 한번만 더 기달려보자 또 지나가버리면 들불야학 거기 가서 잘란다. 근데 마지막 세 번째 온 차는 태워줘서 그래서 타고 왔다. 그래갖고 피곤하고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그러면 아가씨 얼른 씻고 자세요 그런게 나는 내 잘 방이 없어져 부렀지. 나는 이제 큰방에 형선이 옆에서 자고 기순이는 씻고, 그때 씻는다는 것이 발 닦고 손 씻는다는 것이지 뭐 샤워하고 그런 것은 그때는 그런 것은 없었으니까. 샤워라는 말 자체를 나는 미국에서 처음 들었으니까. 목욕이지 뭔 놈의 샤워야. 요즘은 이상하게 샤워샤워 하대. 그리고 잤어. 아침에 여동생이 불러요. 아무리 봐도 기순이 아가씨가 이상하다고. 아무리 문을 흔들어도 안 일어난다고. 예감이 이상해서 후다닥 일어나서 문을 뚜든게 안 열려. 발로 차보고 영화에서처럼 하고 들어갔더니 누워있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문쪽을 향해서 아마 소변보려고 나오려는 모양이었는지 엎어져 있는데 가서 뒤집어 보니까 입에서 거품이 나와요. 막들쳐 업고 뛰고 병원으로 갔는데 병원에서 사람들은 수속을 밟아라 어째라 염병하고. 화가 나가지고 원무과 그 사람들 뺨때리고 난리가 나고 이미 의사들이 두시 두세시경에 가버렸다는 거야 (죽었다는거야). 근게 피곤해가꼬 탁 떨어져 자는데 이미 가스는 이틀 동안 무겁잖아요. 쌓여있었던 거에요. 그대로 눕고 가버린 거에요. 그날 기순이가 안 왔으면 내가 그 방에 들어가서 좋다고 노골노골 하다고 누운 순간에 가버린 거지. 기순이가 들어와 가지고 내가 큰방에서 자면서 산 거지. 사람 운명이라는 것이 이렇게 순간에 갈리는 구나. 근게 나는 묘하게 연탄가스를 피해서 나와 갖고 연탄가스에서 죽을뻔한 것을 기순이가 대신 딱 죽어버린거야. 그러니 운명이란것이 내가 배타고 비행기타고 가면서도 느꼈는데, 야~ 내 팔자가 이상하다. 그래서 박기순이처럼 아까운 사람인데 아주 순수한 사람인데 그런 일이 있었어요. 최초의 위장취업잔데. 광주에서. 그렇게 갔어요. 그래 오늘은 여기까지 이야기 합니다.

















윤한봉 구술녹취문(1차) 윤한봉

윤한봉 구술녹취문(1차)

■ 개요
구술자: 윤한봉
면담자: 박현정
면담주제: 5․18 항쟁사 정리를 위한 인물사 연구
면담일자: 2006년 1월23일 오후 2시-5시(3시간)
면담장소: 두암동 자택
면담차수: 1차

■ 상세목록
1.
1-1 군대시절
1-2 전남대 축산학과 입학
1-3 10월 유신과 운동으로 투신
1-4 농대 학생회 선거
1-5 시험부정행위방지 캠페인
2.
2-1 등록금 인상 반대 투쟁
2-2 유신저항행위
2-3 민청학련 사건
2-4 자금조달 방법-장학금과 화투
2-5 재판과 까마귀
2-6 인혁당과 민청학련
2-7 징역살이
3.
3-1 월남전 종결과 탄압국면
3-2 월부책장사
3-3 포장마차
3-4 탄압국면 2
3-5 공권력의 도덕성

1-1. 군대시절

구술자: 지금 대학 운동참여과정부터 이야기를 하라는 거여? 후일담 전사식으로 해서?
면담자: 네 근데 선생님 원래 구술사기 때문에 선생님이 살아오신 거 출생부터 쭉 들어야되 는데요. 이제 9시간동안 선생님 이야기를 듣기에는 너무 많은 인생을 살아오셨고, 그리고 어렸을 때 이야기는 윤광장 선생님으로부터 들었기 때문에 선생님이 운동을 시작하신 것부터 해주시면 좋은데, 대학교 들어간 것부터 해 주시면 되는데 그전에 특별히 하실 말씀이 있다면 해주세요.
구술자: 아니야 뭐.
면담자: 선생님 축산학과신가요?
구술자: 응 축산학과.
면담자: 선생님 몇 학번이세요?
구술자: 71년에 들어갔지.
면담자: 71년 입학이세요?
구술자: 맞어.71년.
면담자: 이때 선생님 재수하거나 이런건.
구술자: 아니 사연이 있지. 내가 어디보자 66년이나 일고를 졸업한게. 67년이나? 내가 헷갈 리는데.
면담자: 선생님 67년이 맞으실 것 같은데요.
구술자: 왜 그러냐면은 그래가지고 학교를 다닐 때 그 나이 또래에는 고민들이 있잖아. 그 래가지고 개인적인 그런걸로 해서 학교생활을 엉망으로 했지. 순전히 땡땡이 치고 이제.
면담자: 학교 생활이라고 하면 일고?
구술자: 혼자 심난한 거지. 그래서 대학진학을 안하겠다고 선언을 했어. 부모님들에게. 그리고 절에서 재수한다 핑계대고 절에 들어가서 한 일년 간 쉬었지. 혼자서 인자. 산에나 올라가고 내려가면서 물가에 앉아서 낮잠이나, 아니 잠이나 자게하고. 어떻게 보면 한가로운 생활을 보냈지. 그러고는 도저히 나 스스로를 가늠 정리를 못해가지고 , 군에 지원입대를 했어요. 군에 지원입대를 했는데 군 생활을 고통스럽게 좀 했지. 예를들면 지원 입대를 해서 들어가는데 그때 돈 팔십 원 갖고 들어가 가지고 처음부터 웃음거리가 되고, 처음에 들어가니까 군에서 내무반 책임을 맡은 기관병이 돈이나 현찰을 가지고 있으면 도난사고 나고 복잡하다고 맡기라고 그래요. 그래가지고 ‘십만 원 이상 가져온 사람 손들어’ 그리고는 갖고 오라고 그래. 기록해주고 맡기고. 내가 지원 입대해 놔서 제일 나중에 들어가 갖고 문 바로 앞에가 앉았는데, ‘오만원!’ 다 들었지. ‘사만원!’, 나보고 하는거야.(웃음) ‘삼만원!, 이만원!’ 하다가 ‘야 개새끼야 넌 얼마 갖고 들어왔어?’ 팔십 원 갖고 왔다니까 주저앉아 블더라고. 와~ 골치아픈 새끼 하나 들어 왔다고 그래가지고 이제 내무반 청소하는 대표가 빗자루라니, 쓰레받기 사니 하면서 얼마씩 걷어가면서 내 돈 팔십원 날아가 버렸지. 그런 식으로 군대 생활했는데 음, 병참학교로 떨어져가지고 병참학교에 교육을 받고, 최전방으로 갔어요. 보병 12사단이라고. 펀치볼에서 동해안까지지. 지금도 최전방 거가 있는데. 육이오 때 사단 길을 뺏겨븐 사단들은 지금까지도 전방에서 후방으로 못 나와요. 그 죄 값 때문에. 어떻게 해가지고 다시 전쟁이 나거나 어떻게 해가지고 명예회복을 하기 전에는 전방에서 못나와. 사단 기를 뺏겨븐, 다시 말해서 전쟁 중에 해채 돼버린 부대들이지. 사령부가 무너져가지고. 어쨌든 12사단 52연대라고 해가지고 지금 인제군 서하면 청도리 그쪽에가 있는데, 사단연대 참모본부가, 연대 본부가 이 민간인 통제구역 안에 들어가 있제. 저녁에 보초서면 대남방송이 생생하게 들려오는 가까운 거리데로 떨어졌지. 그 부대를 이제 보충대에서 각 부대에서 사람별로 나눠서 보낼 때 우리보고 노래를 가르치더라고. 인제가면 언제오리 원통해서 못살겠네, 그게 인제 인제군 원통리에가 12사단 본부가 있다고. 그 부대로 간 사람들이 제일 불쌍한 놈들이라고 해갖고 유명한 노랜데, 인제가면 언제오리 못통해서 못 살겠네 그 부대로 떨어져 거기서 또 한참 들어가 52연대 참모 군수과로 갔지 내가 병참학교 나와 놔서. 그리고 거기서 군 생활 했는데, 내가 성격이 타협을 잘 못하니까 고집대로 살고, 술 막걸리 먹으란 걸 안 먹는다, 못 먹는다 맞을래, 마실래. 맞겠다. 그래가지고 인제 빠따를 한 여덟 대 더 때리고는 술 안먹는다고 빠따 맞은 새끼 첨 봤다고 때리다가 그만두더라고. 그런것부터 시작해서 사사껀껀 나는 고통스러웠지. 군수과라 취급하는 물품이 주식부식부터 시작해서 피복장복까지 다 하니까, 이제 요구를 하지. 여기저기서. 유혹을 하고. 내가 인사과 애들하고 싸워가지고 계급을 진급을 그때 당시에는 무학자라고해가지고 총등학교도 안 나온 사람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 사람들이 주로 DMZ 흔히 말하는 경계초소에 들어가서 근무하는데, 진급순위가 대학졸업자들이 먼저되고, 순서가 무학자가 제일 나중에 되요. 전방 최전방에서 고생하는, 잠복근무 스고. 그 사람들하고 진급이 같이 됐어요,
면담자: 무학자들하고요?
구술자: 응, 왜그냐면 인사과 애들이 이제 작업복이라든지 이제 속옷, 이런 것들을 주면은 진급을 빨리해줘. 인제 자꾸 날더라 주라 하는 거야. 나쁜 놈 새끼들이야. 나는 니들한테 구걸해서 내가 직업군인이냐 진급을 하게. 나는 일등병이어도 제대 제때할 테니까. 그러다가 싸우고, 맨날 그러다가 미움 타 갖고, 내 졸병들은 병장 달고 있을 때 내가 일등병 달고 있었는데, 하여튼 그런 생활을 많이 했어요. 그래가지고 고생 좀 했고, 그 다음에. 정기휴가를 한 번도 못 왔는데, 이제 뭐랄까 뭔일을 맡기면 충실히 하다보니까 내 업무 말고도 다른 사람들 업무를 자꾸 맡기는 거야. 다른 쪽에서 못 하면은. 그러다보니까 요 일 끝나면 저 일주고, 저 일 끝나면, 요일 주고 하다 보니까 휴가철을 놓치고 그랬는데, 그래갖고 특별휴가형식으로 한번 나왔는데 휴가 나오자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 습격한다고 내려온 사건이 터졌어. 그때 내가 군대생활 8개월짼데, 그래가지고 그때부터 복무기간이 6개월이 늘어나 버린거죠. 내가 35개월 2일을 하고 나왔는데, 그때. 그 다음에 인자 훈련이 강화됐어요. 배낭매고 뛰어 다니는 것부터 행정병들도 다 똑같이. 그렇게 해가지고 고생도 많이 한데다가 내 휴가 나왔다가 들어가면 병장이 다섯 명이 제대를 하게 되고 내 졸병이 다섯 명이 들어오기로 돼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김신조 때문에 제대를 못 해븐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들들들 볶지 하라하루가 불만이니까. 밑에서 안 들어오고. 그래가지고 졸병생활 더 많이 오래하고 등등. 하루하루가 고달팠어. 군대생활. 그다음인자 두들겨 맞는 거, 구타가 무지하게 심했다고 그때. 인제 우리 과에서 좀 엉덩이에 매 맞는 것을 잘 못 이겨내는 사람이 있었는데, 위에 상급병 이었는데 여름에도 동내의를 입고 살았다고. 하의 동내의를. 엉덩이 덜 아프라고. 한 여름에 더운데 겨울 동내의를 입고 있었어. 난 인자 그것이 분노해갖고 내 제대할 때까지 절대로 사람 손 안대겠다. 저 무식한 놈의 새끼들이, 무능한 놈들이 스스로 통솔을 못하니까, 통솔할 능력이 없으니까 폭력으로 저런 식으로 한다고 나는 손 하나 까딱 않고도 내 졸병들을 제대로 통솔하는 것을 제대 후에라도 편지를 통해서라도 확인하라고 약을 쓰면서, 그러다보니까 이제 매를 안 들다보니까 되게 힘들지. 통솔하기가. 왜 그러냐면 나는 지원 입대해 놔서 나이가 어리고 다른 사람들은 나이도 많은데다가, 다양한 사람들이 들어오는데 매를 안 드니까 막말로 올라탈라고 그러지. 그걸 어떻게 이제 하여간 그런 식으로 해서 통솔해나가는데 결국은 내가 이기기는 이겼는데 힘들었지. 그러니까 이제 안 되, 그러면 인자 때려죽이고 싶은걸 참다보니까 맨날 담배만 피우고, 그런 식으로 군대생활하면서 인제 내가 아! 내가 대학을 가야 되겠다 생각했어. 그 교묘한 논리를 펴가면서 부하들 괴롭히고, 몽둥이 들고 한 놈들이 다 참모본부라 다 배운 놈들인데 좋은 대학 나온 놈들, 재학 중에 온 놈들이여. 대학 다닌 놈 새끼들, 저런 새끼들이 배왔다고, 그러고 인자 그놈들이 은근히 내가 고등학교 나왔다는 것 때문에 깔보고, 그래서 저런 새낃르에게 눌려 살지 않기 위해서 내가 대학을 가야 되겠다. 더런 놈 새끼들. 인간쓰레기들 대학 다녔다고 큰소리친다고. 그래가지고 그래, 제대하면 대학을 가야지. 그래가지고 무사히 제대하고 나와서 대학입시를 준비하게 됐지. 인자 군대생활하면서 기왕 여기까지 온 것 여러 가지 것 체험을 더 해보고 가자 해가지고 이제 여름 한여름 되면 인제 숲이 우거지니까 공비침투가 더 쉽다고 그래가지고 특별 경계령이 내려지는데 이 인력부족도 있지만 전방에서 고생하는 잠복근무병들을 격려한다고 그래가지고 참모본부에서도 파견을 해요. 전방에 잠복근무로. 근게 인자 쫄병이 다 가는데 각 과에서. 고생하니까. 내가 제대얼마 앞두고 일부러 전방에를 몰래 교체해가지고 위에 과장한테 이야기도 안하고 전방에 들어갔어. 잠복근무도 2주 서 보고 그랬는데, 완전히 인제 그것은 지붕은 저번에 총기사건 나왔을 때 보니까 무슨 막사가 어쩌고 그러는데 순전히 행복한 거지. 그때만 해도 저녁에 잠복 나가면 나무 그루터기나 총개머리판으로 구뎅이를 대충 파갖고 엉댕이 아프니까 구뎅이 속에다가 넣고 앉아서 인자 잠복근무를 서는 거지. 글믄 이제 고지대라 산이라 저녁이 되믄 비가와요. 낮이 되면 맑았다가도. 글다보면 엉덩이를 물에다 넣고 물구뎅이다가 넣고 있는 거지. 근데 비가 오면 귓속으로 물이 들어가니까 잠을 못잘 것 같은데서 잠이 오니까 그대로 비가와도 귓속으로 물이 들어와도 잔다고, 막 쓰러져서. 코를 골고 정신없읻르 처음에 나는 긴장돼갖고 안잤었는데 삼일 째 되는 날부터 자버렸는데 그 물구덩이 속에서 한쪽 넣고 그냥 자는 거야. 철모 배고. 그런 생활을 하고 낮에는 인제 빨래해 놓고 말려놓고 자고. 저녁에 또 나가고. 그런 체험도 해 보고. 그때만 해도 반공의식이 투철해서 잠을 못 자게 했는데 잠을 자다 자꾸 사고가 터지는 거야. 꿈속에서 이제 공비가 넘어온 걸로 봐가지고 크리머같은 걸로 지뢰를 눌러 버리는 거지. 인자 그래갖고 온 사단이 난리가 나고. 나중에 알아보믄 봤드는데 없어, 그럼 이게 꿈꾼 거지. 자다가. 그래서 인자 자지 못하게 저녁내 떠들라 그래. 맘대로, 유행가를 부르든 뭣을하든 떠들라고. 죽어라고 인제 어렸을 때 배운 욕은 다 동원에서 북쪽에다 하고, 알고 있는 동요부터 시작해서 다 부르고, 인자 글더라고. 어쨌든 그렇게 하다가 제대를 했어.

1-2 전남대 축산학과 입학

구술자: 그런데 그때 보니까 또 재수 없이 그때 예비고사 대학 입학 예비고사라는 게 생겼어. 내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 그때는 없었는데. 과목이 무지하게 많애진 거여 다해야 될 건데. 책을 사다 보니까 이만큼 되더라고. 근디 인자 내가 그전부터 농촌에 들어가서 살고 싶었는데 사실 광장히 낭만이고 목가적으로 생각한 거지. 초지를 가꿔가지고 가축들 영화에서 본대로지. 양이나 치고, 과수원이나 운영하고 하는 식으로 해가지고 신석정씨 시 같은 거 좋아하고 그럴 때니까 근게 인자 농대 간다고 그래갖고 예비고사 보고 뭐 힘든데 가 고생하는 거 그냥 전남농대 축산과 들어갔어. 인제 자취생활 하다가 2학년 때부터 전대 뒤에 지금은 아파트가 서버렸던데 바로 문리대 뒤에 하숙, 하숙촌이었는데 거기서 하숙생활을 했죠. 이제 난 대표적인 모범생이 됐지 이제. 군에 있으면서, 부모님 속 썩인 거 학교 다니면서 고등학교 때, 공부안하고 맨 땡땡이나 치고, 그런 거 반성도 많이 했고. 내 인생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을 했고. 지난날 그렇게 부실하게 살았던 것부터 반성하고 알차게 정말 성실하게 살아야겠다 그래가지고 고무신 끌고 다니고, 그냥 예를 들면 전대뒤에서 하숙할 때 한 달에 시내 한번이나 나올까 정도로. 나오지도 않고. 공부 열심히 했지. 그러니까 인자 농대에서 축산과에서 아예 교수들이 나에 대한 기대가 커 가지고 유학 갔다 와서 강단에 다시 서라고 교수되라고. 그 이를테면 2학년 때부터는 아예 방학 때 연구실하나를 줘가지고 나보고 공부하게 하고. 방학 때도 집에 잠깐 들렀다 올라와서 인자 거기서 공부하고 그럴 정도였어. 모범생이었지. 학생들에게 나이도 들었겠다, 덜렁대니라도 나잇값 할라고 그러잖애요. 그러듯이 조심하다보니까 애들이 형님 형님하고 따르고, 나는 또 인자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 뒤늦게 정신차려갖고, 만학도가 돼서 대학에 들어온 것인디 영 부끄럽고 그래서 일고 후배들한테도 말을 안 놓고, 형선이 덕기, 이런 식으로 야! 소리 안 하는게 습관이 돼가지고, 그거 군대에서 길러졌는데 내 밑에 졸병들한테 손을 안 댈려고 하다보니까 말을 고쳐야겠더라고. 야, 그러면 이새끼야 저새끼야가 될 수 잇는데, 이를테면 김일병, 그러면 개새끼야, 이렇게 문법적으로 안 된다고. 그래서 김일병 이것 좀 하지, 김일병 이리좀 와. 이런 식으로 끝에를 애매하게 하다고니까 몸에 배버려서 후배들한테도 말을 안놔. 지금도 그러는데 야, 자를 안 하는데 그래갖고 혼자서 모범적인 생활을 하다가, 아버님은 인제 옛날로 돌아오니까 좋아하고, 광장이 형님은 유학 보내겠다고 하고. 그러고 있는데 내가 1학년 때 무슨 일이 있었냐면 대통령선거가 있었고, 김대중씨가 그때 박정희한테 도전했지. 그러고 이제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고,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박정권에 의해서 대학의 교련교육이 시작이 된다고. 그래서 그때 이제 교련반대시위, 학원 병영화반대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났죠. 대학에서 그런데 자꾸 이제 그 후배들이 시위 같은 거 앞장서서하는 친구들이 나를 꼬드기는 거야. 끌어들이려고. 내가 들어갔을 때가 전남대 운동사에서 한 획이 그어지는데, 왜냐면은 그 전까지만 해도 전남대학교에 운동의 맥이 형성이 안됐어요. 맥이. 그런데 71년부터 이제 전남대 운동의 맥이 형성이 되요. 그게 뭐냐면 광주일고가 이제 내가 11횐데 서중 우에가 이제 고등학교가 생긴거죠. 그래서 인제 서중보다 역사가 짧지. 광주 그 일고가 가면 학교 교정에게 학생 독립운동 기념탑이 있어. 인제 광주일고생들, 서중생들은 긍지로 알지. 광주 학생운동의 본거지다. 그런 곳인데 거기에 그 역사적인 영향력이라는 게 참 거 참 누군가 한번 그것도 학자, 학문적 접근을 해야 하는 부분인데. 그 영향력이라는 게 수량화 할 수 없는데 엄청난 거예요. 그게. 엄청난 건데. 항일독립운동과정에서도 학교에 독서회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해요. 일제하에서도. 독서그룹이 있어가지고. 그것은 인제운동을 주도하고 그랬는데. 전남대, 아니 광주일고에가 특활이라고 특별활동이라고 해가지고 일주일에 한번씩 웅변 좋아하는 친구들 이리 모이고 그런거 있잖아요. 서예 좋아하는 반 서예반 있고 그러듯이. 거기에 인자 향토반이라는 게 있었어요. 그래가지고 인자 향토사랑이 어떻고, 농촌체험하고 봉사활동도 하고. 거기에 몸담았던 학생들 중에 일부가 광랑이라는 일종의 서클같은 것을 만들었어요. 그 광랑이 향토반에 다 들어갔다고 보믄 돼요. 인자 그 광랑이 빛 광자 광주사내, 사내 랑 자해가지고. 광랑이라는 서클이 있는데, 이 광랑이라는 서클이 6흰가에 선배들에 의해서 6회 때부터 광주 학생운동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대목인데. 6회, 6회들이 만들었어요. 근데 이제 그 광주사내들의 모임에서 자기들끼리 이제 학습을 하는데 독서회 같은 거니까. 당시로는 아주 불순한 공부들을 했다고. 그래가지고 여러분들이 들어서 알랑가는 몰라도 쿠바인의 입장에서 미국에 대해서 맹비판을 한 리슨 양키라는, 양키야 들어라 뭐 그런 책이 419이후에 출판이 됐었다고요. 금서로 돼 있다가. 그런데 516 쿠테타가 나면서 다시 금서가 됐지. 그게 일반인들과 접촉이 안 되는 책인데. 그런 책을 놓고 미제국주의의 진면목이 무너가를 공부한다던가, 이런 식으로 해갖고 어떻게 보면 쪼금 붉으스름했지. 그러니까 자기들이 자칭 사회주의라는 사람들도 있었고 할 정돈데. 거기에 선배들 중에서 9회선배가 이제 반공법사건 같은 걸로 좀 들어가고. 10회가 통역당 막둥이로 어린 통역탕으로 해가지고 고생도 하고.
면담자: 그 분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구술자: 근게 9회 조용호, 김민혁, 아니 조용호씨가 이상한 책들 붉으스름한 책들 가방에 담고 기차타고 내려오다가 비슷한 가방하고 바꿔들고 나와 브렀어. 그래갖고 인제 그 다른 사람이 집에 가서 본 게 이상한 책들이, 가서 경찰에 신고를 해가지고 혼난 사건이고. 10회가 박경호 선배가 인자 통역당 막둥이 들어갔는데. 거기에 인제 일고 14회, 그러니까 내 3년 후배들이 이제 들어가 있는 사람이 정상용, 국회의원. 518항쟁지도 대변인 아니 외무부, 외무부장 맡았었지. 이양현 거기도 518당시 그 기획의원으로 도청항쟁지도부 있었고, 김이택 그것도 이제 나중에 긴급조치로 빵잽이하고, 민청련 의장도 하고 그랬지. 지금은 공직에가 있는데. 박영규, 영신이 김영신, 박영신, 그렇게 되고 이제 16회가 최철희, 19회가 정용화, 정용화도 518관련해서 그렇고. 그런데 근데 이 14회 애들이 대학에 들어와 가지고 전남대, 만든게 정상용, 이양현이 주축이 돼갖고 이 광랑 애들이 만든게 전남대 민족사회연구회라는 걸 만들었어요. 민사련이라고 그래가지고 이 민족사회연구회에 또 일고 후배들이 이제 김정길, 이제 뭐 김정길이야 민청사건부터 남민전 등등으로 징역 좀 많이 살았지. 박형선, 거기도 민청학련사건. 문덕희 이런 친구들이 이 민족 사회연구회 들어가서 다 일고 출신들이에요.
면담자: 선생님 잠깐만요, 향토반이 일고에 있는 동아리죠?
구술자: 일고에 있는 일종의 동아리지. 특별활동 아니 동아리가 아니라 일종의 특활한 동아리지. 독서 발표 같은 거 하고 방학 때 농활을 했던 것이 향토반이야. 거기 최초의 향토반을 만든 사람이 지금 곡성군수 고현석씨에요. 6회들. 이사람 이외도 두사람, 세사람이 만든 건데, 이 광랑이 인제 향토반에 들어가서 나중에는 좌지우지하게 된 거지.
면담자: 광랑은 일고생들의 모임인거죠? 향토반 출신의 전남대생이 아니라.
구술자: 일고의 광랑이라는 독서서클이, 일종의 불온한, 요즘 말로 하면 서클이 있었는데 이 서클맴버들이 대부분 다 향토반에 들어가 있었지. 그래가지고 향토반에 영향을 줬지. 향토반 출신들이 또 많이 운동에 참여하게 됐는데, 이 광랑이 벌써 9회 조용호 선배가 감방에 가고 10회 박경호 선배가 감방에 갈 정도로 문제가 있는 서클이었지. 요 출신들이 14회가 대거 전남대에 와가지고 정상용, 이양현이가 전남대에 민족사 연구회를 만들어요. 여기에 일고출신과 일고출신 아닌 사람들도 일단 요즘 말로 하면 사회과학 서클이야. 이념서클 같은거.
면담자: 민사련이요.
구술자: 그렇지. 민족사회연구회가 이 친구들이 중심이 돼서 전남대에 운동의 맥을 형성해. 그러고 이 사람들이 71년 학원 병영화 반대, 교련반대시위 여기에 주축이 되지. 주도, 여기서 주도를 해요.
면담자: 이거는 합법적인 서클은 아닌 거죠? 등록돼 있거나 그런 서클은 아닌거죠?
구술자: 그때 당시는 등록이고 뭐고 없지.
면담자: 지하서클이라고 보면 되나요? 그런 개념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건가요?
구술자: 아니 그때만 해도 긴급조치가 발효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때 당시 서클 갖고 탄압하거나 그럴 때는 아니야. 초기 그러니까 교련이 인제 도입도리 때니까 그때만 해도 나았지. 그래갖고 71년부터 학원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이 시작된다고. 왜 그러냐면은 전국적으로 교련반대시위에 주도적 역할을 한 친구들 강제입영 시켜버리죠. 강제입영대상자들이 여기에 인제 정상용, 이양현, 김진, 그다음에 또 갑자기 이름들이 생각 안 나네. 원수들. 그 여러 명이 인제 전남대에서도 강제입영이 되죠. 근데 이제 이게 알아 둬야하는데 이 교련반대시위 할 때 서울에 위수령이 내려요.계엄령하고 다르죠. 위수령이니까. 계엄이 내리면 이제 군법회의가 만들어지고 사법부, 행정, 다양한 분야에서 군이 이제 권력을 장악하는데 이제 위수령은 일정한 특정한 치안질서유지를 위한 특정한 임무만 띠고 군인이 투입 되는 건데, 위수령이 내려지는 건데 지방에서는 유일하게 전남대학교 교정에 그 전에는 교정으로 안 들어왔어요. 학생시위가 아무리 심해도. 학내 진입이 없었다고 그 전까지만 해도. 80년 이후에는 일반화 돼 브렀지만. 진입자체가 상주화 하다시피 해블고. 처음으로 대낮에 이제.
구술자: 그래서 학내 경찰이 직접 들어오고 그랬는데, 그때만 해도 하여튼 어쨌든 그 저 교련반대 시위를 하는데 자꾸 이거 민사련 후배들이 나를 꼬드기는 거예요. 인자 내가 일정한 학생들에게 영향력이 있는걸 알고 자꾸 꼬드겨. 이제 슬금슬금. 그래서 인자 나는 알면서 속이 다 보이지 나를 살살 흘리는 거 알면서도 이제 모범생활 공부나 해야지 고등학교 때 허황방탕하게 살았응게. 아고 다 잊어블고 총장 이름도 모르고, 누가 누군지 하나도 총장 이름이 누군지도 모르고 하여간에 학교 뒤에서 농대까지 걸어서 수업 받고 점심때도 밥 먹으로 왔다가고, 일요일에도 학교 나와서 공부해버리고 도서관에서 방학 때도 연구실에 가서 공부해버리고 그런 식이었어. 그런데 경찰이 학내 대낮에 진입할 땐데 왕창 모여 있어 본관 앞에. 지금은 박물관 아니 사회 교육원인가 그게 됐지.
면담자: 옛날 구 본관이요?
구술자: 구 본관, 그 앞에 인자 학생들이 몽창 모여 있을 땐데, 긍게 나는 꼬드겨도 주모자급으로 안들어간 것 뿐이지 명분은 시위니까 소극적 참여는 해서 따라는 다녔지. 시위대를. 앞장만 안 스고. 그런데 그날 경찰이 바깥에 후문, 정문 다 싸고, 곧 진입할거라 그래가지고 교수들, 교직원들이 막 나와 가지고 해산하라고 설득할 때여. 근데 한 학생이 일어나가지고 비장한 각오를 표하면서 이 자리에 원자탄이 떨어져도 우리는 자리를 떠선 안 된다. 어마막지한 소리를 하더라고. 그래야지 하고 앞줄에서 세 번째 줄에 앉아있었는데, 밀고 들어오는 거여. 노래 부르고 어쩌고 앉았어 인자 원자탄이 떨어져도 가지말자고 박수 받고 그랬으니까 그럴 줄 알았지. 근데 파바박 뒤가 무너지는 소리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난리가 나니까 돌아보니까 내가 제일 뒤에 앉아있는거야. 다 도망가 블고. 한참 이러고(손 올리고) 막 해쌌고 그 때만해도 정형화된 외치는 그것이 없었으니까 나도 모르게 일어나가지고 (건물)안으로 들어가 브렀어. 본관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 있다가 도망간 사람들 쫓아다니고 도망 다니고 그러다가 끝났어. 최루가스가 난리가 났지. 날더러 인자 모두들 안에 본관에 들어온 사람들보고 나가래. 교수들이 꼴보기 싫다고. 우리들이 해산하라고 할 때 했으면은 이런 꼴 안당할건데, 새끼들아, 최루탄에도 도망간 새끼들이 웬 말이 웬 말이 많냐고. 그래갖고 막 조롱을 하는 거야. 꼴 보기 싫다고 다 가라고, 그러면서 교직원들한테 쫓아내라고, 그래갖고 인자 나오는데.(자존심이)망가질 대로 망가져 나오는데 거기 경찰 놈 새끼들이 서 가지고 있으면서 막말로 나 같으믄 뭘 떼어 블겄다 새끼들아 막 어쩌고. 처음부터 해산을 하던지 그렇게 도망을 가블라믄. 그러면서 야유를 하는 거예요. 그 야비를 받으면서 나와 가지고 집에 오는데 얼마나 속이 뒤집어질 거여. 집에 와 가지고 이발소 가서 머리를 싹 밀어블고는 다짐을 하기를 한목숨 걸고 할라믄 하고, 말라믄 말지 어정쩡하니 뒷따라 대니다가 이런 수모를 당한다고 다시는 이런 일 없다. 할라믄 하고 말라믄 말고. 다시 한번 내가 각오를 단단히 하고 머리를 밀어 브렀는데, 그래가지고 이제 어쩌고 시위 어쩌고 강제 입영한 애들 당하고, 한풀 꺾였지. 유기정학 무기정학도 꽤 많이 당했고. 그래가지고 인자 민족사 연구회가 그 된서리를 맞고 이름을 바꾼것이 이제 교양 독서회에요. 요것도 민청학력 사건 때부터 깨지지. 근데 이제 그렇게 됐는데, 아예 담 싸브러. 머리 깎고 인자 그라고 있으니까

1-3. 10월 유신과 운동으로의 투신
구술자: 그래가지고 2학년 맞이해. 근디 인자 2학년 10월 달이지. 학교 뒤 하숙방에서 머리 동여매고 공부를 하고 있는데, 그때 하숙생이 여덟 명인가 됐었는데, 밖에서 웅성웅성하면서 라디오를 틀어놓고 나를 자꾸 불러 나오라고. 밤인데. 그래서 이 사람들이 쓸데없이 공부는 안하고. 자꾸 불러. 안 나갔더니. 그래서 인자 궁시렁궁시렁하면서 나가보니까 유신 쿠테타가 난 거예요. 그래갖고 휴교령부터 시작해서 의회 또 폐쇄해 버리고, 헌법폐지하고 난리가 났지 이제. 와, 그때 내가 뒤집어졌지. 방에 들어와 가지고 보던 책에 볼펜으로 찍어블고 사전 찍어블고 벽에다 박치기하고 어떻게 화가 나는지 뭐야 나는 너무 무시당한거지 이제 국민의 한 사람으로써 국민들 알기를 이 새끼들이 벌레로 알고 있구나 하니까. 어린애 취급하고, 바보취급하고 분노 때문에 아 내가 공부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제 오늘부터 나는 싸운다. 이렇게 돼가지고 잘못 들어서 브렀지. 그때부터. 와 그날 어떻게 화가 나는지 이렇게까지 무시할 수 있고, 우롱할 수 있어야 생각하니까 너무 분통이 터져가지고 긍게 인자 그 다음날 학교를 나갔봤더니 교수님들이 뭐라 뭐라 애기하고 계시다가 모여서, 내가 딱 들어갔더니 암말도 않고 그러면서 창밖을 보면서 무등산이 서서히 단풍이 들어가네 딴소리하고. 미쳐 블겄드라고 그냥. 이리가도 사람ㄷ르이 말을 피해블고, 저리가도 피해블고. 그래서 이제 며칠간 광주 얼쩡얼쩡 다니다가, 사람들이 이야기를 안 해. 고향에 내려가서 내려가 있는데 거기서 이제 충격적인 일을 겪었는데, 내 초등학교 동창들 중에서 교사가 된 사람들이 몇 사람 있는데 두 명이 우리 모교 초등학교에서 교사생활하고 있었는데, 이제 위에서 지시를 해가지고 10월 17일 유신 쿠테타 이후에 박정희 정권의 지시에 의해서 이 철없는 꼬마들을 데리고 시골길을 이렇게 행진을 하고 다니면서 유신지지 행진을 하는거여. 그래가지고 집 앞에다가 꼬마들한테 시켜갖고 유신을 지지한다, 뭐 제비 꼬리같은 거 붙이라고 그러고 그러고 어린애들에게 노래를 가르친 거예요. 대통령 대통령 우리 대통열 일 잘하는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고무줄 놀이하는 이런 노래까지 다 보급을 했어요. 그 보급을 교사들이 한 거예요. 시키니까. 그래가지고 인자 와갖고 걸핏하면 라디오로 발로차고 왜 그냐믄 라디오만 틀면 헌법을 이야기하면서 발에 맞는 신발을 신어야지 신발에다가 발을 맞출 수는 없는 거 아니냐 헌법도 우리 현실에 맞게 어쩌고 맨 그런 소리만. 그래갖고 인자 중간지대에 있는 원로라는 사람들이 그걸 찬양하고 지지하는 발언들이나 해 쌌고. 박순천이가 어떻고, 라디오 발로차고 맨날 그럴 땐데 내 친구 놈 새끼들이 그 지랄하고 다니는 것을 보고는 얼마나 화가 날거여. 저녁에 집에 왔길래 욕을 쏟아부었죠. 나쁜 놈의 새끼들 개노릇한다고. 한참 당하고 있던 이놈들이 이제 성질이 났는가 그 중에서 한 친구가 날더러 손가락으로 날 가리키면서 그래 우리가 먹고살아야 할 수 없이 이런 짓 하고 있다. 그러믄 너는 뭐하냐? 너는 먹고사는데 얽매이지도 않는데. 너는 뭐하고 있냐 이 새끼야. 그러고 나를 손가락질 하는데 손가락이 대포만 하게 보이는 거야. 너는 뭐하고 있냐 소리에. 거기서 답이 안 나와 버리는거여. 나는 뭐하고 있냐. 성질만 내고 있지. 내가 그 자리서 그래 나 지금 너희들한테 화풀이하고 욕하고 있을 뿐이다. 좋아, 앞으로 내가 뭔가를 뭣인가를 할 테니까 두고봐라. 그러나 니들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안 할 망정, 뭣인가를 안할망정 하지 말아야할 짓은 안해야 하는 거다.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고 그래, 구체적으로 앞으로 뭘 할거다. 그라고 말을 맞췄어. 너는 뭐하고 있냐는 말에 내가 굳이 한 것이 없으니까. 그래가지고 그날부터 인자 고민에 들어갔지. 내가 뭣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갖고. 그래가지고 인자 백방으로 생각해봐도 답이 없는거여. 총으로 박정희를 쏜다고 해도 총이 있나부터 시작해서 막연해. 뭔가를 해야겠는데, 싸워야겠는데. 내가 뭐 써클활동을 해봤나. 학생회활동을 해봤나. 아무것도 없는거여. 그래서 삼일째 되는 날 꽁꽁 앓다가 다시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부터 내 좌표부터 한번 살펴보자. 그래갖고, 내가 뭐냐 학생이다 인자 답이. 그럼인자 학생으로서의 운동이 뭐냐 학생운동밖에 할게 없잖느냐. 그럼인자 거기가 쪼금 더 감이 잡히더라고. 그럼 인자 학생운동을 어떻게 할건가 한디, 내가 몸담고 있는 대학, 학교 전남대학. 근디 전남대가 보통 큰 것이 아닌데 내가 감이 안잽히는거여. 내가 다른학교 학생들하고 교류를 해본적도 없고, 써클활동도 안해보고, 학생회활동도 안해보고, 감이 안잡혀. 전남댐나해도. 그 다시또 좁혀서 농대 그런께 감이 좀 잡히더라. 아, 그래 농대 농대는 내가 좀 알지. 일정한 또 영향력도 있지. 나 따르는 사람들도 좀 있지. 그래 농대서부터 시작을 하자. 그래가지고 이제 구체적인 계획에 들어간게 그럼 농대에서 뭣부터 할것이냐. 내가 힘이 있나 당장. 이를테면 내가 갑자기 시위, 데모하자 하고 악 쓴다고 애들이 나올 것도 아니고. 지금 현재 나는 영향력도 없고, 조직력도 암것도 없다. 인자 어떻게 할것이냐. 없으면 힘을 키워가야지, 인자 힘을 키워가야한다는 차원으로 그럼 어떻게 키워갈 것이냐 암것도 고민을 하다가 이제 맨처음에 떠오른 것이 3학년 되면은 이제 초에 거 학생회장, 학생회 임원선거를 해요. 임원선거를. 그래서 요 임원선거를 통해서 학생회를 먼저 장악한다. 좋은 사람을, 내가 믿을만한 사람을 내게워가지고. 농대, 우선 거기서부터 시작을 하자. 그래갖고 농대에서 영향력을 우선 확고히 하자. 학생회를 장악해갖고. 그러고 나서 그다음으로 나가자. 그런데 1학년 때 문화사 시험을 보고 나오는데 후배 하나가 날더러 사정을 하는거여. 자기가 공부를 안해가지고 대리시험을 누가 봐주기로 했는데, 그 사람이 안 나와 브렀다는거야. 그라고 내가 자기가 이제 낙제를 한다는거야. 물팍을 꿇고 싹싹 비는거야. 좀 봐주래. 그게 나는 그때만 해도 뭐 깊은생각을 못하고 학칙이 뭔지 그런거 생각도 않고 뭐 대학에서 그런 것이 많다더라 그 이야기는 들은적이 있어갖고 어 그러자 그래갖고 그 다음이 이 친구 시험이라 글더라고. 들어가갖고 인자 그 내가 공부 열심히 했을테니까 답이야 뭐 사정없이 쓰고 있는디 교수가 이렇게 돌아다니다가 가끔보고 수험표 보고 뭐 물어보고 글더라고. 어디 최씨여? 뭐 그런식으로. 근데 내자 나한테 와갖고 이름을 물어보는거야. 무슨 그 친구가 그때 갑자기 이름이, 이름이 뭐이더라 하여튼 여가 또 인연이 복잡한데. 내가 중학교2학년때부터 한자를 안썼거든. 우리말 최고, 우리말 쓰고 한자 안쓴다고. 그런 계기가 있었는데, 그 나는 한자는 내 이름 외에는 절대 안써. 이름은 할수없이 써야하니까. 세상 사는데. 그게 죽어라고 전남대 축산과에서 시험볼 때 한자로 똥 분자를 써서 분의 성분을 말하라. 그라믄 시험지에다가는 똥의 성분에 대해 논하라 하고 바꿔놓고 그럴땐데 하여튼 죽어라고 국어사전, 옥편 가지고 다니면서 군대생활할 때도 갖고 다니면서 신문 볼때도 옆에다 놓고. 편지 쓸때도 옆에다 놓고. 그래서 내가 인지 국어어휘같은 것은 굉장히 좋은데, 그게 인자 읽는데는 아무 지장이 없어. 하도 해놔서. 초등학교 들어가기전에 서당에 다니면서 천자 추구 같은 거 다 떼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내가 한자 못 쓴다고 그러면 깜짝놀래. 전남대학교 뭐 이것도 쓰지도 못하고 강진 내 고향 쓰라해도 못쓰고 그러는데 대학교 1학년때 시험보는데 교양국어에서 웃음의 종류 다섯가지를 한자로 쓰시오. 한자라는게 형상성이 있어가지고 요렇게 그리더라도 쓸 수가 있거든. 안써블고. 그런데 갑자기 창남이구나 그놈 이름이. 무슨 창자 무슨 남자예요? 그러니까 젠장할 내가 답을 하다가 갑자기 물어보니까 나갈랍니다 하고 나왔지. 어이 학생 이리와, 그래가지고 기어이 잡혀갖고는 어느 과의 누구냐, 그래갖고 난 또 속없이 다 이야기했지. 빌지도 않고. 아니 뭐 낙제한다고 열심히하겠다고 다짐하면서 나보고 좀 봐달라고 하니까 들어왔다고. 그래갖고 인자 무기정학 당해브렀지. 그니까 학교 교수들이 놀래갖고는 농대교수들이 학교당국 어떻게 해가지고 방학 끝나니까 그것이 인제 풀렸더라고. 근께 어느정도나를 교수들이 신임 했냐믄 예를 들면 토학이라는 게 있는데, 토끼, 마학, 말, 택해요. 봉학, 벌 근데 나는 그중에서 인제 토학을 택했거든. 토끼 키울라고. 그래갖고 토끼를 택해놓고 토학을 택하고 토끼를 샀어요. 새끼를 암수 한 쌍을. 아 세 마리 샀구나. 그래갖고 하숙집 한쪽에다가 토끼장을 만들어서 키웠어. 본대로. 그라고 옹달샘 토끼 새벽에 토끼가 옹달샘에 가서 물먹고 그런 노래가 생각나서 수놈은 옹이 암놈을 달님이 그다음에 샘이라고 이름을 지어놨는데, 그 집에 개 하숙집 개가 똥개가 하나, 요 새끼 동개가 어떻게 문 열고 뛰다는데 샘이를 물어 죽여 브렀어요. 옹이하고 달님이만 남았는데 그래갖고 인제 책에서 배운 데로 결혼식도 시키고. 아 그런데 내가 바보짓 한 것이 새끼를 날것을 대비해서 나는 아주 부드럽게 푹신푹신하게 만들어준다고 볏짚 같은 것을 가위로 곱게 짤라서 이제 팍팍하니 깔아줬어요. 새끼들이 꼬무락꼬무락하다보니까 밀려 블고 바닥에 닿은 거예요, 나무 바닥에. 그날 저녁에 추웠는데 죽어브렀어. 여섯 마리가 죽어브렀어. 내가 친구 집에 가서 자고 아침에 와서 죽어브렀는데, 고놈들 묻어주고는 근디 다음 다음날 토학 시험이여. 그래갖고 내가 학교 가서 아니 세상에 초등학교 다니기 전부터 시골꼬마들 다 토끼 키우거든. 그래도 토끼새끼를 죽여브렀으니 이게 체면이 서. 그래서 인자 토끼새끼들 제문을 TJ 브렀어 시험에다가(웃음) 나는 자격이 없다. 학점이고 뭐고 그래갖고 어린 토끼새끼들에게 명복을 빌고, 날 반성한다고 하고 나와붓어. 그러니까 인자 교순가 난리가 나갖고는 나를 부르더만 바깥에서 문을 잠궈 놓고는 거기서 시험을 다시 보라는 거야. 안 해 븟어. 그랬더니 나중에 학점 나올 때 보니까는 교수들이 본부에 가갔고 그 내 거 신청을 빼븟더라고. 근께 거보고 뭐 수강신청 토학에서. 내가 에프가 나오면 내 장래에 안 좋다고 그래갖고 아 그걸빼브렀더라고. 그 정도로 인제 교수들도 나를 신뢰하고 그랬었는데, 하여간에 이 시험 대리로 봐줬다가 무기정학 당하니까 교수들이 난리가 나가지고 이제 이야기해갖고 방학 때 끝내 브렀어.

1-4. 농대 학생회 선거
구술자: 그래서 인자 출마를 할 수가 없어. 학생회장에. 그래서 민상웅이라고 내 동긴데 그 친구도 이제 군대 갔다와갖고 늦게 진학한 친군데 그 친구가 학점 자격도 되고 뜻이 나하고 인제 좀 통하는 데가 있어서 인자 내세웠지. 설득을 했어. 어떻게 할 거냐, 나가라 학생회부터 바로잡고 우리가 스스로 떳떳할 때 밖에다가 큰소리 칠 수 있다. 근데 학내에서 선거 때 바깥에서 선거와 똑같이 돈쓰고, 못된 짓 하면서 뭐 정의가 어떻고, 뭐가 어떻게 떠들어야 그 얼마나 웃겠냐, 사회가. 힘도 안나온다. 그래가지고는 우리가 당당해야한다 하니까 우리가 맡아서 학생회를 우선 바꾸자. 좋다. 그래서 이제 학생회비 저 이 선거비용은 어떻게 했으믄 쓰겄냐, 그때 이제 유명한 칠백원이 나왔는데, 포스터 몇 개 붙이고, 그라고 인자 마커같은 거 사야 어쩌고, 칠백원 이걸로 끝 선거한다. 그래야 우리가 당당하다. 그거 같고 될까, 한번 해보자. 지더라도 깨끗이 한번 지고, 최선을 다해서 이겨야지만 그래갖고 그날부터 인자 주머니에서 주머니에 돈을 한 푼도 못 갖고 다니게 했어. 같이 하숙을 같은 집에서 하숙을 했는데, 그러고는 내가 교양독서회를 나갔어요. 이제 나도 이제 운동을 할라다보니까 할 수 없지 이제. 공부도 해야하고, 조직도 같이 해야 하고. 거기서 이제 박형선, 문덕희 등등 후배들을 만났지 이제. 이 친구들이 이제 같이 하면서 문덕희 박형선이를 후배들한테 이러이러해서 다 농대생들이었어요. 농대 학생회를 장악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거풍토부터 바꿔 버려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떳떳하고 당당하다. 그러기 위해서 이래저래 돈 칠백원으로 하자. 그러니까 좋습니다 합시다 그래갖고 동조자가 둘이가 생겼어 인자. 그래서 인제 선거운동이 시작되기 전부터 학내에서 조끔 인망, 신망이 있는 친구들을 한 사람 한사람 접촉해갖고 이러이러한 취지로 한다. 학생회를 바로 잡아야한다. 어떻게 할래 참여할래, 안할래 근데 이제 다 이야기하면 좋다 하다가 끝에 가서 그러면은 선거자금은 얼마로 할래요 칠백 원 그라믄 다 일어나브러 그래갖고 질 선거는 안할라요. 그라고 쓸데없는 짓 하지마쇼. 칠백 원 갖고 지금, 장난이요. 그런식이 돼브렀지. 그래 코 씩씩 불고 이 사람도 만나고 저 사람도 만나고 이라도 다니니까 하도 엉뚱한 소리 하고 다니니까 거절해놓고 돌아서지도 자나깨나 생각이 나겠지. 이상한소리 한 것이기 때문에. 요렇게 인자 지켜 보는 거지, 인자 그게 소문이 퍼졌어. 왜냐면 인제 그때 당시 YWCA 서울 전국연맹 사무총장으로 이학영이 남민전 사건, 민청학련 사건 그 쪽으로 들어갔는데, 그 친구가 학생회장 할 때도 그랬는데, 문리대도 대게 소문이 이제 최하 오십만원쓴다 했다고 돈으로. 밥사고 차사고 바깥에서 만나서 맨날 그러니까. 이제 타 단대에까지 소문이 퍼지니까 타 단대의 교수들이 만나자. 그래갖고 뭐가 어떻게 돼갖고 이상한 소문이 들려오는데, 이래저래이래저래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 난 투표권 없지만 적극지지니까 힘내라고 이기라고 그래 갖고 뽄을 보이라고. 다른 대학내의 모임들에서도 어느 과, 일학년들까지도 좀 이야기 좀 해 달라. 가서 이야기를 하고 그런 것이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더라고 타 대학까지. 찾아오기도 하고 농대로 와갖고 도대체 농대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는데 어떻게 된거냐. 그래서 인제 돌아섰던 애들이 그런거 안한다고, 질 선거는 안 한다고 했던 이 친구들이 다시 오드라고. 와가지고 어떻게 진행이 되요? 이래저래 씩씩하니 하고 있다고 하니까 같이 합시다 해갖고 나중에 어떻게 돼브렀냐면 다른 학생회장 출마할라던 애들이 참모들을 모집할라고 보니까 사람이 없는 거야. 다 우리쪽으로 와블고. 그래갖고 단독 입후보로 해서 무득표 당선이 돼 브렀지. 그런 기록을 세웠는데, 그러고 나서 그러다보니까 내가 의도했던 것 이상으로 농대 밖으로까지 영향력이 이제 퍼지더라고. 애기하자면 내가 좀 유명인이 됐지. 그렇고 나서 다음에 내가 일을 손댄 게 그건 내가 욕을 바가지로 먹는건데, 아~ 인자 그전에 그때만해도 요즘은 어찐가 몰라도 대학내에 학생회장 선거같은거 하게 되면은 학교 밖에 있는 조직폭력배들까지 개입을 했어. 그래갖고 인자 밥사주라부터 시작을 해서 그러믄 인제 조직폭력배들하고 연결된 학내의 주먹쟁이들이 시비붙고, 그러믄 인자 얼마 용돈주고 뭐 인자 밥사주고 술사주고 그런 못된 풍조가 있었는데 고런 친구들까지도 이제 불러모아갖고 주먹을 쓸라믄 의롭게 쓰란 말이야 라고 설득해가지고 개들이 우리편으로 돌아서게되고 그런 일이 있었는데, 어쨌든 그러고 당선돼가지고 농대 뒤쪽에 조그마한 술집이 있었는데 막거리도 팔고 라면도 팔고 앉아서. 개 한 마리 시켜가지고 하루 종일내 개먹고 놀면서 쓴것까지 해서 만원이 채 안들었어. 그때 계산해 보니까. 거 예산은 칠백원이 좀 넘어섰는데, 왜그냐믄 학교 당국에 등록하면서 사진 붙이고 뭐 그런 또 절차가 있었어. 그래가지고 칠백원은 좀 넘어갔는데, 어쨌든 끝나고 나서 자축파티까지 한 것이 만원도 안들어갔는데, 그렇게 했어.

1-5. 시험 부정행위 방지 캠페인
구술자: 그러고 나서 그 다음에 인자 2탄을 뭣으로 시작을 할까. 그것이 인제 요즘은 어떤 가 모르겠어. 대학 책상에 보믄은 잔글씨로 시험에 앞둬갖고 인자 외는데 골머리 아픈것들 잔글씨로 인제 컨닝할라고 책상에 많이 써논거 있거든.
면담자: 지금도 그래요.
구술자: 지금도 그래?(웃음) 고걸 명색이 학생이 이렇게 내놓고 이렇게 시험 부정행위를 해서야 밖에다 대고 뭔 소리를 해야. 부끄러운 일이다 떳떳해야 한다. 그래서 명랑한 수업 분위기 확립, 그걸 또 내걸고 학생회에서 앞장을 스고 내가 인자 떠들고 다녔지. 그래갖고 인자 교수들한테까지 학교 당국에 요구를 한 것이 뭐이냐면 부정행위 없는 시험을 농대에서 치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엉망으로 낙서가 돼 있는 책상을 전부 페인트칠을 해주라. 그 요구를 했어. 그러니까 인자 교수들이 대학생이면 지성인인데 지성인들이 스스로 알아서 해야지 뭔 놈의 시험 감독이 어떻고 책상 페인트가 중 고등학생 같은 소리 한다고 좀 거부 반응을 보이는 교수들도 나오고 그러더라고. 그때 내가 그 교수들한테 그랬어. 교수님들도 스승의 날 꽃다발주면 좋아라하던데, 아 그러면 교수라는 소리 하지 말고 강사라고 하시라고. 무슨 소리하시냐고 잘못한 거 있으면 제자들이 바로 잡아야 할 거 아니냐고 그라고 스승과 사제, 제자사이를 떠나서도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야하는 거 아니냐고 그러니까 말을 못하지. 그래가지고 결국은 학교당국에서 전부 페인트 칠해줬다고. 그러니까 우리는 이제 학생회하고 해갖고 제비꼬리를 만들어서 명랑한 수업분위기 확립 그래갖고 인자 학교 들어오는 입구에 서서 인자 오는 학생들을 달아 주는 거지. 그때 당시만 해도 대학 졸업장을 받기 위해서 적당하니 남의 것 보고 어찌고 해서 시험보고 들어온 친구들이 꽤 있었거든. 그래갖고 농대를 무슨 농사짓고 그럴 라고 온 것보다는 전공선택을 쉽게 들어올 수 있고 그러니까 들어온 친구들도 있고. 그 친구들이 난리가 난거야 인자. 이런 개새끼들이 대학 졸업장 좀 받을라고 들어왔는데 훼방을 부린다고. 그래가지고 욕을 욕을 때려 죽여 브니 마니 암매장을 해브니 들려오지, 들려오건 말건 일단 꼬리표를 붙여줘 쳐버리고 이런 개새끼들이 훼방을 부려 싼다고. 내 인생 내가 사니깐 잔소리 말라고 악을 쓰고. 암말 않고 다시 쫓아가서 달고 그랬는데. 차마 때리지 못하니까 이놈들이 그래서 그렇게 시험을 봤는데 우리 과 시험 볼 때 내가 책상을 전부 교수 들어오기 전에 서로 맞보고 앉게 했어. 이렇게. 그래갖고 앞에다가 나가서 칠판에다가 썼어요. 시험감독을 거부한다. 우리를 의심하기 때문에 하는 거 아닌가. 우리는 스스로 이렇게 이렇게 하겠으니까 나가라고. 인자 교수가 어 그럼 곤단한디, 아 그래요? 그러면 저 나가겠습니다. 내가 싸갖고 나올랑께 교수가 막더라고. 택하십시오, 우리가 시험을 거부하는가, 선생님, 교수님이 거부 하는가 봅시다. 누가 이긴가 봅시다. 교수가 그럼 믿네이, 그라고 나눠주고 나가 블더라고. 이라고 쓰고 있는데 그 학생 하나가 볼펜으로 치면서. 개새끼들, 감독이 없으니까 컨닝 못하겠다고. 컨닝 할라다가. 그러니까 좆 같은 놈의 새끼들 때문에 졸업장 못 받게 생겼네. 미치겠다고 어쩌고 하고는 찢어블고 나가붓어. 그러고 인자 우리는 무시험으로 아니 무감독시험으로 봤는데, 그래가지고 이제 농대는 확실하니 일단 장악을 했어 인자. 나 그러면 일단 사람들이 저 사람 바른사람, 소신있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교수들도 고개 끄덕끄덕하고, 그전부터 신뢰를 받았지만.

2-1 등록금인상 반대투쟁
구술자: 그래서 이 농대에서 좋다 그러면 다음 농대를 거점으로 해서 전ㄴ마대 전체로 영향력을 확대를 해야겠다, 뭘 할까 그러고 있는 판에 여름방학 동안에 요즘도 그런일들이 가끔 학내에서 벌어지는가 신문에 나던데, 학생회장단들이 학생처장이랑 모두 설악산 어디 호텔에 가갔고, 뭘 했는가 하여튼 했는데, 거기서 학생회비를 엄청 올려 브렀어. 이제. 많이 올렸어. 이 등록금 인상이지 어떻게 보면. 아, 이거다. 학생들 권위보호하고 연결된 것이니까 요걸 갖고 싸워야겠다. 그래가지고 이제 그때 인제 대의원 회의가 있는데 학생회장단 있고 대의원 회의가 또 따로 있었어요. 대의원 회의에서 의결기군데, 그 대의원 회의를 하는데 내가 인제 부탁을 했지. 대의원 의장한테랑 몇몇 사람한테 내가 방청석에 앉아 있을 테니까 발언 신청을 하면 발언권을 주라. 아주 그 꼴 아니 몰라요 지잘이고. 아니 방청석에 있는 사람 이야기 좀 듣는다는 식으로 해서 주면 될 거 아니냐고. 그래갖고 나하고 박형선이하고 선배 고재득 형이라고 지금 성동구청장 하고 있는데, 그 양반은 인자 거 전남대 교련반대시위에 앞장섰던 분인데, 인자 그리 가서 앉았었어. 인제 이런 저런 애기하다가 이제 등록금 과다인상 학생회비 과다인상에 대한 문제제기가 나왔다구요. 대의원들이 뭐락뭐락하는데 그때 이제 정득규씨였지 학생처장이, 등치도 좀 크고 그랬는데 그 냥반이 미국에 있는 동안에 들어보니까 돌아가셨다고 그러던데 병사로. 그 냥반이 일어나갖고는 그 대의원 발언하고 있는 대의원한테 아 자네 무슨과야? 내가 지금 내가 먹을 라고 올린거야? 다 학교를 위한 것이야 뭐가 어쩌고 어째 앉아! 소리 뭐 어쩌고 뭐락뭐락하다가 쭈그려 앉고 또 누가 발언을 하면은 막 이 사람이 그냥 위압적으로 딱 말하면 꽥 소리 못하고 주저앉고 그래. 옆에 있는 박형선이가 이야기해가지고 발언권을 얻었어. 방청석인데도. 인자 뭐락뭐락 한참 떠드는데 대의원들보다는 야무지게 떠들었는데 또 이사람이 일어나갖고는 소리를 더 높이 올리면서 인자 지금 무슨 소리하고 있냐고, 무슨 누가 횡령, 착복 할라고 그러는 거냐고, 막 해쌌고 뭐라 하더니 그냥 앉어블더라고. 인자 내가 성질이 나갖고는 발언권을 주라고 했더니 주드라고. 긍게 내가 아무리 학교를 위한다고 하는 것도 좋지만 학비 부담자인 학부모들을 생각해야 될 거 아니냐. 아니 학교를 위한다고 스쿨버스에 금칠을 하고 의자를 전부 안락의자로 바꾸고, 그러면 그것만 놓고 보면 좋은 거다. 근디 돈을 내는 사람들의 입장을 생각 해야 될 거 아니냐고. 그러면서 호텔에 가갔고 모종의 흑막이 있었니 어쩌니 한께, 요사람이 악을 쓰면서 ‘학생! 어느 과 누구야?“ 어쩌고저쩌고 막 악을 썼더라고. 그렁게 내가 그런 건 잘 하는 스타일이라 내가 48년생이고, 초등학교 때부터 급장선거를 했고, 그래서 민주주의가 뭐인지 어린회 운영도 해봐서 안다. 내가 급장 6년 한 놈이다. 그런데 내가 사회자한테 발언권을 얻어갖고 발언하고 있는데 어디 개밥에 도토리처럼 튀어나와갖고 악을 쓰냐고, 앉어! 건방진 놈의 새끼 하고 막 욕을 하면서 저 사람 쫓아내라고, 회의도 할 줄 모르는 사람 쫓아내라고 악을 썼지. 그걸 이미 인제 정보를 미리 들은 학보사 친구들이 와서 녹음 해브렀어. 내 밑에다 녹음기를 대고. 악을 써 제꼈어. 정득규가 기가 죽어갖고, 악을 마음대로 쓰고 끝났는데, 요 학생이 방송국 그 녹음 테잎을 학교당국에서 뺏을려고 유리창을 문을 잠가븐게 유리창을 dfu고 들어가고, 기자들이 그놈 들고 도망가고 그래가지고, 이틀 후에 그걸 틀어브렀어. 대의원 대회 있었던. 내 발언하고 그런 것을 그래갖고 인자 난리가 났지. 그래갖고 인자 나를 처벌하라고 학교 당국에서는 압력을 넣고, 농대에서 모범생이다 처분할 수 없다. 그러고 나오고. 그래가지고 인자 그 사건을 통해 졸지에 인자 내가 나중에 들으니까 정보 사찰기관에서도 요주위인물이 되고, 학교에서 문제아로 찍히면서 동시에 내가 노렸던 학내 영향력이 굉장히 커졌어요.

2-2 유신저항 시위
구술자: 인자 그걸 토대로 해서 인제 73년 10월에 서울대에서 10월2일 문리대 데모라는 게 있는데, 그 유신 쿠테타 이후에 최초의 저항이었어요. 그런데 그보다 전에 인자 전남대에서 시위를 계획 했어요. 우리가 이 정도 영향력을 확보했으니까 한번 붙자. 그런디 인자 그걸 몇몇 아는 선후배들하고 이야기 한디 어느 선배가 인제 그걸 이야기하면서 저러다 이놈들 또 제적되거나 감옥에 갈 건데 하는 우려하는 이야기를 한 것이 어떻게 학교 당국에 들어가 븟어. 그 소리가. 그래가지고 나하고 박형선이가 대표적으로 끌려가 가지고 형사들에게 내가 송광사, 형선이가 선암사 쪽으로 하여튼 절에 가서 한 삼일? 절 앞에 있는 여관에서 인제 연금 당했다가 풀려나왔는데, 그래가지고 인제 그 계획이 무산이 됐지. 그때 인제 서울로 청량리 시장 쪽으로 보내가지고 문덕희가 가서 등사기 사오고, 준비 다 해놓고 있었을 땐데, 그러고 인자 얼마 있으니까 서울대에서 문리대에서 시위가 터졌지. 인제 그런 식으로 해서 인제 점차 뭐랄까 운동에 발을 들여놓게 됐는데, 그 사이에 인제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돌아가신 김남주 시인과 이강씨 두사람이 함성 고발지 사건을 일으킨거지. 그것이 이제 유신 쿠테타에서 두달인가 지났을때였을거야. 한두 달. 전국 최초로 유신에 대해 저항을 한 것이니까 그게 처음에 나온 유인물이 함성 그 다음에 나온 것이 고발. 이렇게 됐죠. 함성 고발지 사건이라고 그러는데. 고걸로 해서 이제 이강이하고 김남주가 끌려 들어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국가보안법으로 들어갔는데. 가까웠던 선후배들까지해서 몽창, 인쇄한느데 돈이 들거해서 뭐좀 반지같은거 돈꿔달라고 하니까 좀해주고 했던 이경순씨, 지금 영문과 교수지? 그런 사람들부터 하여튼 십여명이 들어가서 혼났지. 국가보안법으로 해갖고 대개 일심에서 나오고 강이씨도 오래 안 있고, 74년 2,3월 경에는 나왔지. 이강씨랑 남주도 나오고. 어쨌든 간에 몇 달 있다 나왔는데, 그 사건이 터져가지고 더 이제 광주 분위기를 뭐랄까 고조시켰다할까 학생들에게 긴장감을 주고 자극을 주고, 고민하게 만드는 그런거 있었지. 그래가지고 인자 학생들이 가서 인자 방청을 하러 광주 법원에 계속 많이들 가고. 그 일정한 영향력을 주고 우리는 뒤에서 계속 그 작업을 학내의 영향력을 키워가고. 교양독서회로 해서. 그럴때 그때 교양독서회 할때 책이 있나, 인자 뭐 최인훈의 광장, 분단 저저 육이오에 대한 공부를 한다든가 등등 분단의 아픔을 공부한다던가. 그럴땐데 그래서 이제 10월 서울대 10월2일 서울대 문리대 데모를 계기로 해서 전국 각지에서 학생 시위가 일어나요. 유신반대 시위가. 광주 전남대에서도 인제 학생회까지 나서가지고 그때만 해도 어용학생회 되기 전이었으니까 시위를 하고 그랬죠. 도서관에 뭐 점거 농성도 하고, 그런게 인자 열심히 쫓아다녔지. 그때는 인자 뒤에가 안 섰고 앞장선 족이었지. 근디 일화인데 슬픈 이야기야. 인제까지 그런 애기 안했는데, 알아두라고 얼마나 이 세상이 황당한가를. 전남대 도서고나에서 지금 하얀 건물 그걸 백도라고 하던가? 거기서 농성을 하는데 학생들이 인제 배도 고프고 담배도 없고 그러니까 학생회에서 자기들 돈 대고, 대겠다고 그래가지고 인제 담배, 빵, 이런 거 삼립빵 그때는, 그런거 인자 몽창 매점에서 이렇게 가져오는데 학생회에서 가지러 가니까 이미 벌써 학생회를 팔아가지고 벌써 싹 가져간 사람들이 있었어. 그렇게 세상들이 무섭더라고 근게 거 매점 주인은 농성하고 있겄다 학생회에서 급하다고 이래저래 한 소리 하고 하니까 믿고 준거지. 그걸 또 빼돌리는 학생들이 있더라고. 그렇게 무서와요. 하여튼 세상이. 그런데 하여튼 그렇게 해가지고 열나게 시위하고 어쩌고 그랬는데 처음에 구속하던 정부에서 유화책으로 그해 말에 다 내놔브러 학생들을. 그래갖고 방학, 그러니까 인자 방학 동안에 봄철돼서 준비한다고 플랜카드 만들기 위한 큰 것을 들고 다닐 순 없으니까 양쪽에다가 막 끼어가지고 펴가지고 들고 뛰는 그런 거 생각했었는데, 대나무 삼십센티 간격으로 짤라서 대나무 마련하고, 인자 자금 비축한다고 이야기 해 가지고 박형선이랑 이야기 해가지고, 등록금 어차피 짤리고 감방 갈 거 등록금 내지 말고 자금으로 쓰자, 하숙비 밀린 자꾸 뒤로해서 몇 달 꺼 인자 자금 마련 했지.

2-3 민청학련 사건
구술자: 1․8 긴급조치 1호가 나왔어. 1월 8일 날. 74년. 그때만 해도 5년 이하의 징역이었어요. 좋다. 5년? 살지 뭐. 그러면서 나는 73년 가을에 시위를 보고 느낀 것이 전국적으로 아무리 학생들이 떠들어도, 동시 다발적인 시위가 아니면 효과가 없다는 거지, 정부에서 그때그때 그냥, 대충요법으로 눌러버리면 끝나니까. 그래서 전국적인 연결을 갖고 동시다발적인 동일한 목표와 구호를 내세우면서 일어나야 한다. 그래서 인자 그때 인자 4․19적 환상이라고 그랬는데, 4․19환상. 한번 이겼거든 우리가. 한 목소리를 내 가지고 동시다발적으로 떠들어서. 그렇게 하자 그래가지고. 4․19적 환상이라고, 그렇게 해서 인자 그렇게 해서 나중에 인자 반성적으로 한 이야기에요, 감방에 앉아서. 이 정권이 이승만 정권 때하고 달리 얼마만큼 정보력이 강화되고, 군경을 완전히 자기들이 확고하니 장악했고 등등, 정권의 강화된 면을 놓치고 옛날 이승만이처럼 허술한 정권으로 생각하고 동시다발적으로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어디선가 피를 흘리면 이겨블 것처럼 생각을 한 것이 얼마나 환상이었는가, 인자 4․19적 환상이라고 그랬는데. 어쨌든 인자 그렇게 하고 연결망 갖기 위해서 서울에 올라가야하니 어쩌니 하고 있는데, 서울 쪽에서 내려온 거예요. 서울대 생들이 중심이 돼가지고. 그래가지고 내려와 가지고 서울대 구상은 나중에 만나서 들어보니까 전국적인 연결망을 가져야, 똑같은 생각을 한 거예요. 그러기위해서는 호남 쪽, 영남 쪽, 서울 경기 쪽, 요즘 서울경기 쪽이 그때만 해도 경기도 지역 서울지방 이렇게 표현했는데. 그 3대 권역으로 나눠서 서로 연결을 해가면서 정보교환 하면서 어떤 동시다발적인 시위준비를 하자 이런 요지였는데, 그게 인자 광주로 내려와 가지고 전남대의 인자 그런 역할을 책임 있게 대표성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과정에서 인자 당연히 끼리끼리 이 뭐야, 함성, 고발지사건으로라든지, 이강씨 이렇게 접촉을 해 가지고, 김남주등 한 사람을 추천해 달라. 그래가지고 인자 내가 추천된 거지. 김정길이가 와갖고 날더러 한번 만나자 하드만 형님 어째 공부만 모범생으로 하실라요? 아니여 인자 나도 싸울 거여. 그래요? 그럼 한번 만나 보실라요? 좋다. 그래갖고 인제 만난 것이 이철이랑 나병식씨, 황인성이, 이런 친구들이 내려왔었는데, 그래갖고 인자 만났지. 만나서 긴 이야기가 필요 없었지 척하면 삼천리였으니까. 좋다, 하자. 그래가지고 인자 나는 그날부로 이철이랑 전북으로 가가지고 이철 친구 지금 국회의원 돼 있지. 최규선인가 그 친구 만나고 전북대 출신, 요 전북출신인데 그래가지고 전북대 법대생들을 세 명인가 소개를 받았어. 내가 인제 전북대, 전남대, 조선대 하여튼 인자 호남지역을 맡기로 하고, 그래서 인제 다음 어디서 만나기로, 그래가지고 다음부터 대전, 속리산, 조치원, 구포 등등 여러 군데 돌아다니면서 만났는데, 천안 등등. 어쨌든 rfo가지고 인제 전북대생들을 그 뒤로 약속해갖고 만나고 그쪽 한 7,8명 된 사람들하고 만나고 보냈는데 이게 일정한 거리에서 더 이상 물러나지도 않고 오지도 않고 애매한 거여 이제. 내가 술을 못하는데, 선천적으로 못해요. 내가 알콜 분해요소가 안나오니까. 근데 이제 그런 이야기 할라믄 호탕하니 호탕하게 해야 한다고 그래가지고, 요강만 하다고 했는디 이렇게 큰 맥주잔을 두세 개 마셨는디 아조 우아래로 동시에 앉아서 동시에 뿜어내는데 아 죽어 브렀어. 맥주잔 세 개 먹고, 내가 일년이면 맥주 한잔도 못 마시는데, 한 컵도.
면담자: 집안이 그러신가요?
구술자: 그래, 유전이야. 우리 아버님이 술 한잔도 못하셨어. 하여튼 이만큼도 못해. 감주, 보리 쉰밥으로 만든 감주 먹고도 마루에서 떨어져 브렀다고. 내가 초등학교 때. 마당으로 떨어지고 그랬는데, 산딸기 먹고 산에서 취해서 잠들어 블고. 그 정도로 내가 술에 약한데 맥주 이만한 놈을 마셔가면서 막 떠들고 어쩌고 했지. 그래갖고 두 번 그 사람들이 내려오고, 광주에서 또 여관에서 밤새 그래갖고 실패했는데. 나중에 수사 받을 때 들어보니까 이 친구들이 4월 3l일 긴급조치 4호 내릴 때, 일단 이 친구들 중에서 자수한 사람이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d니제 겁이 난거지. 5년 이상 뭐 사형 어찌고 하니까. 이야기 들어보니까. 내가 연루된 것 같으니까 광주에서도 의대생 하나가 또 그렇게 해서 불어 블고, 광주에서도 몇 사람 있었는데 어쨌든 전북대는 내가 그렇게 해서 며 번 올라갔는데 실패했고. 그때 광주에서 광주일고 쪽하고 중앙여고 쪽은 최철희가 맡았었는데, 후배들 부지런히 접촉하고 그랬는데, 그것도 긴급조치 4호 떨어져 브니까 다 위축돼 블고 유야무야돼 브렀고. 그 친구들도 나중에 대학가서 빵잽이 되고 그랬는데, 전남대 의대 쪽 접촉이 딱 그쪽에서 그게 미리 자수해가지고, 그것도 끝나버리고. 하여간에 그렇게 해서 인제 조직을 해 나가는데 민청학련이란 이름은 뭐 내가 저그 쓴 것이 『운동화와 똥가방』이라는 책이 있는데 기기도 대충 들어있고. 민청학련 관련자들이 쓴 책이 지금 4호까진가 나와 있는데, 음 요고 나중에 3권 있어. 3권. 3권에가 민청학련 관련 사건 내역에 대해서 내가 자세히 썼어요. 3권에다. 1974년 4월, 실록 민청학련 그 3권에가 내가 전남대 중심으로 이야기를 대표로.
면담자: 이게 시리즈로 나오고 있는 책인가요?
구술자: 현재까지는 4권까지 나와 있어. 앞으로도 더 나올지도 몰라. 요건(4권) 주로 인혁당 관련자들 것인데 가만있어봐.(안방에서 3권을 찾아오심) 여기 있어요, 내가. 당시 있었던 상황을.
면담자: 선생님이 쓴 부분을 한번 자세히 읽어봐야 되겠네요.
구술자: 고것 보면은 굉장히 인제 자세한 것이 나와 있제.
면담자: 알았습니다. 사서 보도록 하죠.
구술자: 가만 있어봐요. 내가 요걸 기증을 해서 가져가도록 할 테니. 내가 여러 권 있으니까. 가져가도 되요. 내 그러고 있는데 준비해 가고 있는데, 동시 다발로 이제 시위를 시작할 시기가 다가온 거예요. 4월 한 중순, 초순? 중 초순. 근데 인자 나중에 수사 들으면서 보니까 밝혀진 것이 저쪽에서 이미 다 안테나에 잡아가지고 이걸인자 작품을 구상하고 있었던 거지. 그래가지고 이제 동시다발로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로 예비검속 비슷하니 해가지고 일망타진 돼 버린거지. 이제 전남대만 이제 다른 데는 다 상황이 끝났는데, 일주일간 자수기간을 뒀거든. 4월3일부터 4월8일까지. 그러니까 우리는 9일 날 보란 듯이 이제 학내 시위를 시도했다가 현장에서 다 잡혀 브렀지.

2-4. 자금조달방법-장학금과 화투
면담자:4월 9일 날이요?
구술자: 여기 요걸 보믄 인제 자세히 나올 거야. 아마 이걸 참고로 하면 될 거야. 이것보다 자세히 한 이야기는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 외에는 다 들어있으니까. 내가 이제 전남대 이쪽을 대표해서 쓴다고 썼기 때문에 내 나름대로 내 중심이 아니라 상당히 자세히 썼어요. 그때 이제 전남대에서 내가 아까 말했듯이 돈이 필요한데, 누나한테 거짓말 쳐가지고 급하다고 해가지고 시집간 누나한테서 돈 갔다가 꿔다 쓰고, 그리고 인자 농대에서 준 장학금이 또 있었어요. 3학년, 4학년이 됐을 때니까. 그래서 인자 우리 농대 교수님들 중에 두 분이 내가 이런 감옥에 갈 각오하고 학교공부 때려 치고, 이거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동조해 준 교수님들이 있었어요. 예를 들면 인제 내가 학교 출결사항 같은 걸 학교당국에서 파악해가지고 정보부에 보고를 해야했어요. 그때만 해도, 그때 내가 강의실에 거의 안 들어갔지. 사람 만나러 다니는데 바쁘지. 그런데도 나를 계속 출석으로 해 준다던가, 이런 식으로 도와주시고. 장학금을 주실 때도 어떻게 했냐면 내가 돈이 필요한데, 장학금을 주는 날짜가 있어요 이제 관례대로. 안 되겠길래 찾아가서 잘 아시잖냐고 내가 일을 하는데 돈이 급하니까 좀 어떻게 학장한테 이야기 해 가지고, 빨리 좀 나 좀 받게 좀 도와주시라고. 알았네, 그리고는 느닷없이 인자 학장실에서 교수들만 박수치고 거그서 내가 받아갖고 그놈 쓰고 그랬는데. 그래갖고 내가 잡혀갖고 학장이내 모가지 잡고 흔들면서 이 새끼 장학금도 사기쳐갖고 받아갔다고(웃음) 김용식 교수님하고 김재용 교수님 두 분인데 하여간에 두분이서 ‘아이고 세상이 윤한봉이를 가만히 안 놔둔다.’고 자꾸 개탄해 쌌고, 정말로 그 양반들 좋은 분들이에요. 도와주신다는 게 그렇게 교수들이 그때만 해도 살벌했으니까, 어쨌든 간에 그렇게 해서도 하고 돈이 떨어졌어. 준비하는 과정에서 박형선이하고 문덕희 후배 그 시켜갖고 친구들이 화투를 잘 쳤거든. 그때 인자 삼봉 치기를 학생들이 많이 했는데, 내가 밑봉 대줘갖고 따오라고 그래갖고 밤새워서 치는 거야. 그 다음날 아침에 그 돈이 와야 서울 올라가는데 인자 지금 새벽차를 타야 되는데 안 오는 거야. 욕을 바가지하고 있는데 둘이 와 가지고 눈이 퀭해갖곤느 온 거야 ‘잃었어?’ 그랬더니 ‘땄어요’ 그리고 딱 주고는 그대로 자 블드라고. 그래갖고 고놈 가지고 가기도 하고 그랬는데.
면담자: 자금 조달을 선생님 화투쳐서 하셨네요.(웃음)
구술자: 아 어 아니 방법이 없지. 왜냐믄 살벌해 노니까 어디서 나올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피해가 가니까. 아주 우리는 철저하니 작업을 했으니까. 등록금 안 내고 하숙비 빼고. 그러니까 나중에 다른 사람은 안했지만 나는 인자 주모자라 해가지고 수사 받을 때 이제 내가 천안, 대전, 설악산, 사방을 돌아 댕기고 사람들 만나고 다방에 하루에 이십 잔 마신적도 있으니까 커피를. 그러니까 나는 커피를 마셔도 잠 안 오고 그런 건 없었으니까. 나이가 사십이 넘으니까 미국에서 딱 걸리더라고 커피가. 가끔 마시면 걸려. 그래서 인자 9시 이후로는 커피를 안 마시는데, 사람 만나다 보니까 이십잔 씩 마시고 그랬다고. 인자 돈을 어서 나서 썼냐고 주소비내용을 쓰라, 교통비, 그럼 이 돈은 어디서 났냐. 하숙비 얼마에서 등록금 학교 장학금 어찌고 저찌고 대충 딱 맞아버리니까 다시는 안 물어 봐블더라. 돈 때문에 고생은 안했어요. 인자 그렇게 해서 피해를 안줬고 주변에. 수사과정에서 알마나 우리가 전남대생들이 순진했냐면 나나 모두 다 김정길이하고 이강씨만 나 소개해준 것 때문에 들어갔고, 감방살이 안 해봐 놔서 교도소에 들어가면 돈이 얼마나 필요한지 진짜로 돈이 거기서는 위력을 발휘한다고, 사회에서보다 더. 거기서는 조폭 위에가 밀수야. 밀수꾼, 경제사범. 그러니까 인자 밀수꾼들은 정치범들처럼 전기고문까지 당한다고. 그래도 끝끝내 자기들 나가서 먹고살 돈은 안 불어. 어디다 감춰논 것을. 그러니까 교도생활 하면서도 밀수꾼들이 돈이 많아. 조폭들은 맨 주먹으로만 하다보니 돈이 없지. 그러니까 결탁을 한다고. 돈 있는 놈들 밑에 조폭들이 딱 그 안에서도 쫄따구 노릇을 해. 조폭이 다 잡을 거 같지? 아니야. 돈이 있는 놈이 위력을 발휘해. 그정도로 돈이 확실하니 위력을 발휘한 곳인데. 뭘 아나. 통금위반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놈이 인제 그때 가지고 있던 돈 그게 다 7천원인가 꽤 큰돈이야 그때. 왜 그냐믄 등록금이 3만원 정도밖에 안됐으니까. 아침에 4월9일 날 아침에 학교로 스쿨버스타고 계림파출소 거기서 출발했었는데, 거기서 택시타고 광주 사직공원 만나서 마지막 모의하고 내려오면서 택시타고 왔는데, 계림 파출소 앞에서 내리면서 아저씨한테 기사아저씨한테 등짝을 딱 치면서 ‘자유만세!’ 그래놓고는 7천원을 주고 내렸어. 나는 인자 그때는 얼마나 속창아리가 없었냐면은 다짐을 할 때마다 한목숨 바치자 민족, 민족의 재단에 한 목숨 바친다. 그냥 들어가서 그냥 사형 당하고 가버리는 식으로, 그 (수사,재판)과정이 뭐인지를 모르고, 생각을 안 해븐거야. 수사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생똥을, 고문을 당하고 재판이라는 지루한 절차가 있고, 이런 거 없이 한마디로 말해서 한목숨 끝. 죽을 각오로 끝. 다른 생각은 안하고 긍께 인자 돈이 무슨 필요, 다 줘 븐거지.
면담자: 택시기사 아저씨한테요? 자유만세 외치고요?(웃음)
구술자: 그래갖고 워~ 내가 책에다 썼지만 교도소 안에서 백번은 생각했어. 그돈을. 휘회하고. (웃음) 우씨. 얼마나 배고파 블고 춥고 배고파 브렀던지. 돈이 없으니까. 왜그냐믄 민청학련자들은 형이 확정될 때까지 면회도 안 시켜브렀어. 와, 내가 찐방 사라고 왔다 갔다 해 쌌지, 또 짜장면, 통닭, 햄버거, 아이구 돈이 없으니까. 난닝구 하고 빤스만 입고 들어간 거. 미쳐 미쳐 빈혈 걸려갖고 혼나 블고.(웃음) 거기다가 아조, 못 먹어노니까 이제 변비가 생겨가지고.

2-5. 재판과 까마귀
구술자: 근데 나 뿐만 아니라 여기 다 써있지만 법정에 가면 인제 재판을 받으면 인제 주모자급이 처음에 32명이 같이 받았어.
면담자: 아 선생님 재판은 어디서 받으셨어요?
구술자: 서울 고등군법. 비상군법에 의해서. 계엄령 하니까.
면담자: 조사자체 연행도 거기서 하셨어요?
구술자: 아니 여기서 했지. 여기 인자 전남도청, 구 전남도청에서 이렇게 정문에서 나오면은 여그 인자 분수대 이쪽에 있고 그러잖애. 여기 상무관 있고, 지금 있는 민주의 종인가 뭐인가 이상한 거 세워놨는데 그 자리가 차고지라고 그러는데, 거기에서 허술한 일제 때 건물이 있었어요. 거기가 전남도 경찰국 공작분실이라는 자리야. 거기서 인제 쉽게 말하면 간첩 잡는 곳이지. 고문하는 곳이야. 우리도 거기 잡혀 갈 때까지 지나다녔지만 몰랐지. 허술하니 단층 일본 건물이 있었거든. 그것이 전남도 경찰국 공작분실이여. 정보과라하지 지금. 거가 인자 빨갱이 잡는 곳이지. 거기서 수사를 하지 거기서. 그래가지고 인자 끝나고 나서 광주 경찰서하고 서부 경찰서 이렇게 나눠서 넣는데 세상에 4월 달에 들어갔는데, 5월 말인가? 내가 6월? 두달간 있었어 거가. 그러면서 돈이 없으니까 뭐 사 먹을 수도 없고, 그래가지고 거기서 완전히들 유치장생활 두 달하는 바람에 삐짝 말라 브렀지. 빈혈 걸려블고. 그래가지고 인자 서울 구치소로 올라가가지고, 인제 국방부로 다니면서 군법회의 재판을 받은 거지.
면담자: 몸은 서울 구치소에 있고, 조사나 재판 받으러는 군법회의소.
구술자: 그렇지, 긍게 인자 주모자급이 처음 받은 사람들이 숫자가 많으니까 나눠서 그렇게 하는데, 주모자급 재판이 한 32명 있었는데, 한마디로 말해서 변호사들끼리 자기네들끼리 한 애기가 뭐냐면 내가 여기다 썼는데, 전남대생들은 찾을라면 간단해, 까마귀만 찾으면 돼, 다 집에서 넣어줘 가지고 한복 딱 입고 있는데, 나하고 강이씨, 정길이, 관복 아주 흉악무쌍한 색깔이지, 그 색깔이 푸리댕댕한거 물 빠진 것들. 그거 입고 초라하게 앉아 있으니까 까마귀라고, 긍게 뭐냐면은 같은 지방이어도 대구 경북이나 부산 애들은 부모들이 인자 다들 경제력이 있으니까 어떻게든지 영치금도 넣고, 법정에도 오고, 재판에도, 옷도 집어놓고 책도 집어놓고, 우리 전라도 어머니들은, 부모들은 감방에 간 경험도 없고 돈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고, 책도 안 들어와 브러. 옷도 없지, 하여간에 비참해 브렀지, 인자 형선이하고 덕희만 한복을 입었는데 나중에. 그것도 뭐냐믄 그 들어가니까 감방장이 인제 대학생 그러니까 순진하게 본거지. 그래갖고 앉어, 일어서 그런 식으로 신고 받을 라고 한디, 둘이 패블고 방장자리 차지하고는.
면담자: 평정을 했군요.(웃음)
구술자: 응 평정을 하고, 야 이 너 시끼 한복 벗어 건방진 새끼야, 옷도 뺏어 입어 블고, 인제 그 친구들은 옛날 고등학교 때부터 주먹 좀 쓰고, 유도 좀 하고 그랬던 친구라. 그래갖고 이제 이 놈들이 일화가 있지. 대학생들이 이래도 되는 거예요? 지그들끼리 물어보고(웃음). 대학생들이라면 이놈들은 물정모르는 순진한 부잣집 도련님 정도로 생각했다가 혼나븐 거지. 그래갖고는 나머지는 전부 비참해브렀지. 그다음에 내가 어떻게 여기서 공작 분실소에서 조사받을 때 내가 많이 뚜들어 맞은 이유 중의 하나가 본적, 전남 강진 칠량면 동백리, 여기 강자가 무슨 강자지? 나 한자 모르는데요, 이런 개새끼, 장난하지 말고 무슨 강자야? 아 나 진짜 한자 모른다고요. 그러니까 rid 일어나서 두들겨 패는 거야. 지그들끼리 미리 알아, 미리 다 사전 싹끼고 있더라고 들어가 보니까. 모범생에다 뭐 어쩌고 일고 나오고, 그러니까 인제 자기 본적을 한자로 못 쓴다니까 믿어 지것어. 그러니 디지게 맞았지. 그래갖고 인자 얻어맞으면서 악을 쓴거지, 나도 화가 나니까. 내가 알고도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이러이러한 일이 있어갖고 내가 그때부터 한자를 안 쓰기 시작해갖고 이렇다고 그랑께는 이런 개새끼가 성깔이 째깐할 때부터 이새끼는 반골이었구만 그래갖고는(웃음) 디게 그놈의 한자 때문에 디지게 맞았고만. 그 뭐냐면은 국민 학교 내 짝꿍이 가난해서 중학교 진학을 못하고 나만 광주로 왔는데 그때는 우리 집이 아버지가 보증서 갖고 망해갖고 학비를 못대게 됐어. 그래서 내가 조대부중에서 장학 3년짜리 장학생을 뽑아서 거그 가갔고 3년 장학금 받았거든. 그래갖고 인자 고등학교는 일고로 와브렀는데, 인제 와서 보니까는 고학하는 애들이 많더라고. 인제 신문배달하고 어찌고 그리고 내가 여름방학 때 내려갔더니기 친구가 서당에를 다닌대. 숲 속에 있는 서당인데 친구 생각 한다 그래갖고 붓글씨 쓰게 창호지, 먹, 붓 이런 거 사갖고는 서당에를 찾아갔어. 둘이 인제 소나무밑에 앉아서 야 너 서당에 다니지 말고, 광주 올라 와 갖고 신문배달하고, 그때는 인제 쇼빵이라고 그래갖고 이게 엄청 부풀어 오른 빵을 저녁에 돌아다니면서 찹쌀떡처럼 팔고 그랬다고. 쇼빵이요, 쇼빵. 그라믄 그런거 팔고 그러믄 내가 시간나믄 나도 도와줄게 학교 같이 다니자. 이 친구는 인자 자존심 때문에 그런 거 같은데, 지나 놓고 보믄 그때는 몰랐는데, 한문을 모르믄 사람노릇을 할 수가 없다고. 논어, 공자 맹자를 몰라를 몰라서는 사람 노릇하기가 힘들고 그래서 나는 서당에를 다닌다, 무슨 소리 하냐 우리 아버지가 그러고 우리 큰형님이 그러는데 큰형님이 대학 다니고 다 집에서 다학 다닐 때니까 한글이 세계에서 제일 좋은 글이고, 인자 그때 이승만이가 들어와 갖고 한글 전용 정책 펴고 그럴때, 곧 있으면 한문 못 쓰게 되고, 배울 필요도 없고, 나도 서당에 다녔지만 새끼야 암 소용없는 것이야, 그러니까 아니다 한자가 중요하다 그래서 둘이 싸움이 붙어갖고 내가 인제 일어나갖고는 소리를 지르면서 내가 만약에 앞으로 한문을 쓰게 되면 호로 개 상놈의 새끼라고 악을 썼지. 그 뒤로부터는 안 써븐거지. 뭐냐믄 어릴 때부터 서당에 다니고 그러면서 사자성어라는 게 무서운 거라고 일종의 정치적 구호 같은 건데, 장부일언 중천금, 뭐 한다던가 일구이언 이부지자가 어떻고, 언행일치가 어떻고 뭐 이런 쓸데없는 것들이 그냥 남자는 베짱, 여자는 절개 이런 식이지. 긍게 서당에 다니는 나이 많은 사람들하고 맨 어울리다 보니까 쫄다구 노릇 하면서 듣는게 맨날 그런 소리야. 긍게 인자 한번 한자를 쓰면 호로 개 상놈의 새끼라고 맹세를 해노니까 그놈 지켜야한다고 해가지고 지금까지도 안 써브렀지. 그래갖고 그놈 땜에 디지게 뚜들어맞고, 애로사항 많았지. 이를테면 고등학교 때 집에서 용돈을 부쳐왔어 그때는 우체국으로 우편환 이런 걸로 많이 오는데, 그러면 우체국가서 돈을 찾을라면 지금은 한자를 안 써도 되는데 한자로 일금 이라고 써있으면 일천 얼마하고 한자로 써야한다고. 근디 인자 고거 쓰기 쉽지. 한자 형상이 있으니까, 일고 다닌다고 그때는 일고란 광주에서 이거(최고) 아니야? 사람 봐 갖고는 써주쇼, 그러믄 사람들이 날 이상하게 쳐다봐. 난 아직도 맹세해갖고 배래븐게 한 두 가지가 아닌데(웃음), 하여튼 그때 그렇게 해서 혼나고 그랬지. 그래가지고 인제 재판해서 다 들어갔는데, 서울 구치소에서 이심 끝나고는 인제 상고포기 그리고 형이 확정돼갖고, 안양으로.
면담자: 선생님 형이 얼마나 받았어요?
구술자: 그때 내가 15년 에다가 자격정지 15년, 긴급조치 1호 4호, 국가보안법, 내란 예비음모뭐 그렇게 됐지. 국가보안법으로 들어갔지. 그 다음에 나하고 정길이 김정길이하고 이강씨 서이 빼고 나머지는 인제 국가보안법이 빠졌지. 내란예비음모는 모두 들어가고, 그래 내란예비음도든 뭐든 아나 우리가 인자 진짜 막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법체계도 모르고 들어가 갖고 광주 경찰서에서 인제 그 공작부 수사 끝나고, 광주 경찰서로 넘어오니까 그때사 정식으로 형사들이 와서 조사를 받는 거지. 그래갖고 인자 취조를 받는데 이 자식들이 인자 그때는 독밖에 안 남을 땐데, 정부 전복할려고 했지? 그래, 아니라고 그랬어야했는데 나도 모르게, 그랬소 엎어 블라고 그랬소, 엎어 블라고. 그래갖고 내란일비 들어가고 그런 식이지 완전히. 그런께 공소장을 받았는데 인자, 기소가 돼 갖고, 기소장이지. 국가보안법 몇 조 몇 항 그런디 국가보안법 몇 조 몇 항이 뭐인지 알아야지. 옆방에 있는 정치범한테 도대체 국가보안법 몇 조 몇 항이 무엇이냐 그렁께 웃드라고. 그런 식으로 엉망으로 도대체 정치범도 될 수 없는 놈들을 정치범으로 몰아넣은 거지 인제. 우리도 그렇고, 너무 순진했고. 그라고 인자 안에서 통방 하면서 내란예비음모 정부 전복하자고 했던 부분을 부인하자 하고 짰어. 하이고 그냥 한 번 했다고 했는디 어떻게 엎냐이걸. 느가 뭐 한번 했다고 항께 밀고 가 블자. 다 안된다고 나만 빡빡 우기다가 압력을 너무 받아갖고 할 수 없이 그래 그렇게 하겠다 그러는데, 법정에서 진술을 하는데, 나는 이제 재판 받을 때 다른 사람들 세시에 만나거하고 두시에 만난거하고 차이가 없는데 아 그러 아니라 세시에 만난게 아니라 두시에 만났구요. 재판이 길어. 그래갖고 앉아 있는 사람들 지루하지. 나는 그게 싫어갖고는 검사가 읽어 가믄 그랬죠? 조금 틀린데가 있는데, 그렇다고 합시다. 그렇다, 그렇소, 나갈라고 하니까 유신헌법을 반대하죠? 내가 묶인 채로 여기까지 가 묶어가지고 뒤로 제껴 가지고 ‘부정한다’ 고, 아예 악을 써 브렀더니 마지막으로 딱 그러더라고. 정부 전복 할라고 했죠? 내가 ‘아뇨!’ 그랬더니 아니 엊그제 조사할 때는 했다고 했잖냐고 아 때려서 그랬지 내가 미쳤냐고, 거짓말 하는데 속으로 얼마나 부끄럽던지. 그래갖고 인제 다 승인하고 그거 하나만 싹 오리발 내밀었는데 그래 봤자지, 정치적인 사건이라 인자 공작분실에서 그때 분실장이 5일째 되는데 유치장으로 넘기면서 한 말이 참 그 사람 말이 기가 막힌 말이 뭐냐믄 양담배 주고 그러면서 나보고 이번 사건은 정치적인 것이다. 따라서 내일 나올 수도 있고, 평생 못 나올 수도 있고, 그 비관도 낙관도 하지 마라. 이건 정치적인 사건이다. 정치적인 사건은 원래 그런거다. 정치적인 환경이나 조건이 바뀌게 되면 너희들은 언제든지 나온다. 그 이야기 했더라고. 맞아요. 15년 어쩌고 했는데 그냥 열 달 쪼금 있다가 나왔으니까 전부, 그거 인제 민청학련 사건이라고. 민청학련 이름은 여기 다 썼지만, 다 알고 있겠지만 유인물 뒤에 뭐라고 쓸 것인가, 주최를 갖고 논의하는 과정에서 민주 청년 총학생회 연맹, 민주청년학생 총연맹이라고 쓰자 해서 쓴 거지 그것이 조직이 아니거든. 조직이 있으라면 목적, 강령이 있어야하는데, 그것도 없고, 조직구성도 누가 대표고 뭐 대장이고 그런 것도 없고 그러니까. 인자 거기 인자 그것이 반국가단체로 몰기가 어려우니까 학생들의 순수성을 왜곡 훼손시키기 위해서 국민들 반공의식을 이용해서 만들어ㅓ 낸 게 인혁당사건, 그 얹어브렀지. 그래서 이 양반들만 여덟 분이 희생을 당해브렀지, 그 고리로 여정남 선배 경북대 졸업생이 신 여정남 선배가 당해 브렀고.

2-6. 인혁당과 민청학련

면담자: 선생님 인혁당하고 실질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전혀 없었나요?
구술자: 그러니까 뭐냐면 사건 자체로 보면은 인혁당이라는 것이 아예 당이란느 조직 자체가 없었고, 옛날에 인혁당을 일차 사건 때 억지로 조작을 했다가 검사들이 기소 못하겠다고 사표 쓰고 그랬잖아. 그래갖고 다 무혐의로 나와 블고 두 사람만 형을 좀 받고 그랬을 정도였는데, 요 사람들이 인자 다시 이 사람들이 모여서 재건할라 그랬다고 인혁당 재건사건의 사건이거든. 민청학력사건에 관련된 부분이, 재건 위야 재건이 된 건 아니여. 그래갖고 엮어 넣은 거여. 근디 인자 왜 그렇게 된거냐면은 여정남 선배가 경북대에서 영남지역에서는 인자 경북대가 정치의식이 높았기 때문에. 학생운동에 전설적인 지도자지 인제 이 양반이 인제 졸업한 이후에 주로 선배들을 이렇게 접촉하는 과정에서 의식있는 사람들 만나게 되거든 또, 마찬가지 사회에서 그런 생각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또 후배들 밥이라도 살라고 그러고, 이야기하고 싶어 하고, 자꾸 키울 라고 그러고, 그거 그렇게 해서 만난 분들이 인혁당 재건의 관련자들이야. 인제 여정남 선배가 접촉하고 그런 사람들이. 그러고 또 인제 뭐냐면 인혁당 재건의 사건 사람들은 백퍼센트 조작 이라는 건 참 드물어요. 근게 이 양반들이 의식이 좀 있어. 좀 우리 식으로 우리 시대 상황으로 보면 60년대 예를 들면 그 양반들이 일차 사건 때지만 조끔 진보적이고 민족적이었지. 근디 다만 법을 위반했느냐 안했느냐는 다른 거지. 이제 그런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거기다가 같이 고문당하고 고생을 했잖아. 그러믄 처음의 공유라는게 엄청난 거 뭐랄까 연대의식이랄까 결집력 이걸 갖게 되는데 끼리끼리 당한 사람들끼리 가끔 사회적으로 빨갱이로 몰리고, 소외되고 탄압받고 그러믄 끼리끼리 만나게 돼 있다고, 끼리끼리 만나다보니까 자꾸 이제 쏙닥쏙닥 삐틀어가는 소리들 많이 하잖아. 뒤에서 이 그룹에 여정남씨가 연결이 된 거지. 조직으로 조직원으로 가입을 한 것이 아니라, 그쪽에서는 인자 아끼는 후배가 된 거지, 쓸만한 후배. 그란디 요 사람들이 결정적으로 인혁당 재건사건에서 곤란했던 게 이분들 중에서 한분이 대남방송을 라디오 단파 듣고 노트에 메모하고 그놈을 돌려 본 것이 나왔어. 고것이 인제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된 거지. 어쨌든 간에 여정남 선배가 인자 학생운동 쪽 후배들이 이철, 유인택 요쪽 그룹들하고 또 관계를 가졌거든. 왜 그냐믄 학생운동 출신이니까. 긍게 이제 학생운동권에서는 전주대 그라믄 아 전북대 그라믄 누가 있고 이런거지 그래서 이제 그 유신 치하, 유신헌법이 나오자 유신 쿠테타가 나오자 그런 생각들을 비판적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전국적으로 위기감을 느낀거야. 야야 큰일났다. 이 상태로 가다가 안 된다. 그래서 인자 나름대로 모여서 쑥덕쑥덕쑥덕하는 과정에서 여정남 선배가 이제 서울, 서울대 출신들 운동권 친구들하고 연계를 가진거지. 동시다발적으로 해야 되지 않겠느냐 등등. 그래서 이제 여정남 선배는 인혁당에 소속이 안 돼있으면서도 민청학련과 연계를 시킬라믄 고리가 필요할 거 아니야, 이 고리로 집어 너븐거여. 여정남 선배를. 나중에 증거 인멸을 위해서 증인인 여정남씨까지를 죽여븐 거지.
면담자: 아 그때는 증인이었어요?
구술자: 아니 역사적으로 보게 되믄. 이 두 사건의 조작에 연계를 고리 역할을 했거든. 여정남씨가 저놈들 작품에 의하면. 그런데 여정남씨가 나중에 이거 순 조작이다 그라믄 이거 관계가 완전히 끊어져 블잖애. 긍게 인자 조작 증인을 없애븐 거지. 그래서 여정남씨까지 죽여븐 거지. 젊은 나이에. 사형당해 브렀지. 근데 이제 그런게 전남지역에도 내가 귀국해서보니까 다 나와 계시던데 옛날에 이제 해방 공간이라던가 전쟁 전후, 그런과정에서 이를테면 조끔 좌익적 성향, 민족적 성향을 가졌던 어르신들이 숨을 못 쉬고 있다가 살아남은 사람들이 419이후 잠깐 봄이냐 하고 나왔다가, 다시 맞어블고, 다시 또 이제 지하로 들어갔다가, 이게 70년에 이후에 유신 쿠테타 터지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꾸 어른들이 예를 들면은 우리들이 이제 운동관계로 해서 무슨 집회를 한다던가 하게 되면 꼭 와서 얼쩡얼쩡해 왜 그냐믄 자기 관심영역인데 대견하기도 하고 새끼, 자기들 보기에는 좌적 입장에서 보면 새끼 빨갱이들이지. 인제 관심있게 볼 수밖에 없지. 자기 좋아하는 남녀관계 그렇잖아 자꾸 얼쩡얼쩡하듯이. 근디 인자 우리는 애써서 저 사람 가까이 하면 나중에 혼날 수도 었다. 조심. 일부러 그래가지고 피했다고. 광주에서도 많이 피했어 그사람을. 행사 끝나고 남녀은 인자 한쪽에 가서 술 먹고, 꼭 그 자리까지 와. 그라믄 우리는 빠져 나와블고. 근디 여정남씨는 그런 거 안 했어. 거리를 안뒀든 거지. 그래븐 것이 당해븐 거지. 광주에서는 그걸 무척 조심 했다고 90년대 와서 보니까 그 양반들이 다 전면에 나와 갖고 통일운동한다고 뛰어다니시고, 그러다가 한두 분 돌아가시고 그러는데 70년대만 해도 그양반들 내놓고 움직이들 못했어. 뱅뱅뱅뱅 돌았지 주변에. 긍게 인자 예를 들면 내가 75년에 내가 처음으로 보도연맹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보도연맹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듣게 되었냐믄은 민청학련사건 징역살고 그래갖고 나와 갖고 75년 2․15조치로 석방이 됐다고. 그래갖고 나와 갖고 몇 달 있다가 내가 기독병원에 재중병원이라고 그러지 거기에 인자 누구 문병을 갔다가 나오는 길에 화장실에 들렀어. 남자화장실이라고 서 있는데, 오줌 싸느라고 서 있는데 인기척이 나는데 돌아볼 거여 옆에 사람이 서 있는데, 오줌 싸느라고 서 있는데 인기척이 나는데 돌아볼 거여 옆에 사람이 누가 있다고 신경도 안 쓰는데. 근데 갑자기 나이 드신 분이 ‘고개 돌리지 말고 내 이야기 좀 들어주쇼.’ 순간적으로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고개 안 돌리고 가만히 있었더니 보도연맹 이야기를 하는거여. 그래가지고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간 사연에 대해서 ㅇ라고나 계셔주쇼. 관심 좀 가져주쇼/’ 그러고는 안돌아봤어. 고개 돌아봤다가는 누군지 알으믄 골치 아플 것 같애서 그래가지고 인제 보도연맹이라는 말을 억울하게 죽은 이렇게 전쟁 직후에 그랬단 이야기를 갖고, 기회만 닿으면 시골에 가서 어른들 만나면은 보도연맹이라는 게 뭐예요? 그라고 인자물어가지고 보도연맹이 얼마나 무서운 학살사건인가에 대한 내막을 알게 되었지. 근게 나는 80년 81년 미국 간 이후 미국에서 5월 강연 같은 거 하게 되면은 양민학살의 역사와 518 이런 주제로 하곤 했는데, 그래갖고 제주 4․3, 보도연맹 이런 사건들부터 얼마나 많은 학살을 했는가 하고 연결시켜가지고 5․18 그랬는데, 그런게 인자 거기서 그 보도연맹이라던가 살아남았던 사람들 중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사람들은 내 손잡고 울고. 그러다라고 그러면서 그들이 들은 이야기 또 듣고, 그래서 나는 80년대부터 많이 알았지. 근게 그런 흐름 그 사람이 내 오줌 쌀 때 따라 들어온 것은 나가 인제 신문 지상에 방송에 많이 나오니까 날 알아본 거지.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민족운동의 입장에서나 좌익 입장에서도 커 나오는 새끼 정도로 보는 거지. 그니까 슬그머니 자극을 주는 거지. 그런 예가 많아요. 그런 자극이라는 게 윤강옥이라고 민청학련 사건 때 인자 문리대 생이었는데 들어갔다가 지금은 한창 김대중씨 따라다니다가 서울 수도권 그 쓰레기 매립장 이사던가 간사론가 있는데, 그 친구 이야기도 들어보면 재밌어요. 교도소 안에 있는 좌익수들 중에서 장기수들, 비전향 장기수들 이 교화내지 전향하기 시키기 위해서 교도소들 마다 현장 시찰 프로그램이라는 게 있다고. 그래갖고 새마을 운동 잘 돼 있는 데, 잘돼 있는 공장, 보면서 대한민국이 얼마나 발전 했는가 이런 걸 인제 보여주고 인자 보고서 소견문, 소감문 같은 거 쓰라고 하고 봐갔고 근데 삐딱하니 써갖고 맨날 뚜들어 맞고 그러지. 그래서 가까운 사람이믄 70년대 이야기 들어 보믄 지금도 소가 발을 갈고 있다. 북조선에서는 트랙터로 하고 있는데, 이따위소리.
면담자: 아 소감문을 그렇게 쓰는 거예요?
구술자: 그런 식으로 쓰는 거야. 비전향장기수들 그 사람들이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인데. 그것 아니믄 살아있는 의미가 없는데, 그라믄 인제 뚜들어 패 블고 그런식이지. 근디 인자 거기 사람들이 사직공원 팔각정엔가를 공원에 나왔었던 모양이야. 강옥이가 무심결에 거기를 갔는데 사복 입혀서 나오고 교도관들도 사복을 입고 모은대잖아. 근데 거기서 좌익수 한 사람이 강옥이를 보고, ‘현실을 직시해!’ 손가락으로 눈을 가리키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은 거야 이 사람이. 게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그러는데 그래서 인제 저쪽 사람이 끌고 가고 긍께는 인자 알아보니까는 교도관이고 이러이러한 사람이라고. 그게 그것에 하도 충격이라 뇌리에 잊혀지지 않지. 그런 세상 살다보면 그런 게 있다고. 작은 계기로 인해서 엄청난 변화가 촉발되는 그런 세상이 있는데. 이상해 하여간에. 아까 애기하지만 괜히 원자탄 떨어져도 이 자리를 뜨지 말자 했는디 괜히 앉았다가 다 일어나븐게 나도 같이 따라 일어나블고 머리 깍아븐게 할라믄 하고 말면 말고 이런 결단을 내려븐다던가. 내가 민청 때 나는 좀 특이했는데 4월 3일 긴급조치 4호가 내린 다음에 내가 죽기를 각오하고 후배들한테 유서를 쓰라고 했어. 유서를 우리들 가면 죽는다고. 근데 다 유서 못썼대. 왜 못 썼냐 그랬더니 눈물나갖고 못 쓰겠대. 나도 못쓰고 말았는데. 그러고 내가 고향에 내려가서 아버님한테 가서 다른 사람들 다 깜짝 놀래. 어떻게 그럴 수 가 있냐고. 아버님한테 가갔고 아버님 제가 아무래도 이 정치판 돌아간 것이 눈뜨고 못 보겠어서 학교 제적당하고 감옥에 갈 각오를 하고, 죽을 각오했다는 소리는 안했어. 감옥에 갈 각오를 하고 싸우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보고 드리러 왔습니다. 아버님이 이러고 앉아서 듣고 계시다가, 그래 해라. 그런데 앞장만 좀 스지 마라. 앞장 스지 말라는 말은 아버님으로서의 이야기여. 하라는 말은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한 말이고. 예, 앞장 안 스겠습니다. 거짓말 치고 나왔지. 그 이야기 들으면 다들 놀랜다고. 대게 인자 부모들 그러믄 벽장 안에다가 넣어 놔 분던가 난리가 나블지, 경찰에 신고를 한다던가. 자식이 죽게 생겼는데 감옥에 가고. 우리 아버님은 해라. 앞장만 스지 마라 그러시는데 내가 인제 징역살고 나왔으니까 일주일 전에 돌아가셔브렀지. 내 그만큼 아버님에 대한 신뢰, 아버님이 나에 대한 신뢰를 가졌기 때문에, 부자지간에 그런 이야기를 할 수가 있었제. 긍게 나는 부모님들한테 갑작스런 충격을 주는 것보다 미리 가서 이야기를 하고. 하여간에 세상은 재밌어. 어쨌든 간에 그렇게 해 가지고 민청학련 사건 열 달 조끔 넘어서 남았지.

2-7. 징역살이

면담자: 어디 교도소에 있었어요?
구술자: 안양 교도소에서. 안양에서 잠깐 있다가, 그 다음에 인자 대전. 대전 교도소 특사로 가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대전 교도소가 구 교도손데 일제 때 건물 그대로 독립운동 한 사람들, 사상범들 때려잡았던 4동이라는 것이 그거여. 교도소 안의 교도서소. 그래가지고 완전히 철망도 없고 식구통만 있는, 그래갖고 바깥에서만 열어보고 닫아브니까 방은 전부 독방, 운동장도 대전교도소는 이라고 보믄 독방이 이러고 있다고 하면은 요 앞에 이런 식으로 운동장이 콘크리트로 사방이 높게 그래가지고 가운데 나무 하나씩 있는 거여. 그라고 인제 요쪽 구석지에 배수구 하나씩 있고, 그라믄 여가 문이 있어가지고, 여기다 넣ㅇ느 거지. 혼자 넣어놔. 그라고 혼자 가브러.
면담자: 아, 혼자 운동하셨어요?
구술자: 그러지, 대전 교도소에 특사에서는 혼자 운동해. 그라고 여기 들어가서 사방은 4미터 돼. 4미터. 바닥도 콘크리트 높은 담장. 나무 가운데 하나. 여기 인자 혼자서 뺑뺑이 도는거지. 이제 그러다가 어지러우면 요쪽으로 돌고. (웃음) 아주 무서운 곳이야 이거. 근디 교도소마다 분위기라는 게 있는데, 음산해. 대전 교도소. 거기서 이제 출소했는데 아무리 그때만 해도 교도소 겨울이 되면 가마니를 준다고. 가마니 깔고, 바닥에 가마니 깔고 있고. 화장실 유리창이 dqjtdj. 비닐로 덧창같이 해서 막아주고. 가마니 깔고 앉었고. 아 근디 피부병이 인제 교도소에 가면 제일 어려운 게 피부병인데 영양상태가 안 좋으니까 온갖 피부병이 다 있잖아. 피부광「p서도 모르는 피부병이 있다고 그래. 교도소 안에서는 그렇게 종류가 다양한데. 거기서 살고 나와 갖고 일년, 이년이 자나도 안 나은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바깥에서 아무리 치료를 해도, 근데 뭐 약을 바를 수가 있나. 혼자 있으니까 그라믄 인제 혼자서 약을 발라야하니까 벽에다가(약을)칠해요 먼저. 벽에다 칠해놓고 인자 몸으로 가서 상의 벗고, 인자 등을 발라야 하는데 손이 안 다니까. 그래갖고 인제 몸으로 인제 벽을 문지르는 거지. 근데 겨울에 얼마나 콘크리트가 차요. 섬뜩섬뜩하지. 그러니 제대로 발라지지도 않고. 제대로 낫지도 않고 그래서 피부병으로 고생들 했고. 그렇게 해서들 다 어떻게 살고 나오는데.
면담자: 선생님 통방 같은 거 안하셨어요? 특사에 있는 선생님들과.
구술자: 아니 대전교도서에서는 특사가 구조가 여기가 우리가 들어가 있는 여가 특사 병실이여. 병실이었어. 그란데 병실도 한명씩 들어가게 돼 있는 거야. 그 다음에 특사가 요쪽에가 있고 운동장이 여가 운동장이 있고 그래갖고 여기서 나와서 여기서 운동을 하고 그랬던 거야. 긍게 옆에 사람들하고 통방을 할 수가 없는 거야. 그러면 여가 철창도 다 닫아져 있으니까 만날 수도 없고, 이건 말만 들었지. 우리는 특사 병실에만 있었으니까.
면담자: 민청학련 관련된 사람은 여기 특사 병실에 있었던 거예요?
구술자: 그러지. 여기 특사 병실에.
면담자: 왜 선생님 병실에 있어요?
구술자: 공간이 없으니까. 독방에다 널라도 보니까. 그러니까 전국 각 교도소로 나눠졌는데 우리는 대전으로 가서 거기서 있다가 나왔는데.
면담자: 대전으로 몇 명 가셨어요?
구술자: 대전에 한 그때 아홉명인가? 각 교도소로 나위어. 근데 하여튼 세상 평범하게 산 사람들이 못 겪을 것들을 겪으면서 많이 배웠지, 세상사가. 많이 배왔고 지금도 속없이 하루는 인제 출소하기 1호 조치 며칠 전에 갑자기 교관들이 와 가지고 ‘효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근게 나는 또 아 효도, 부모님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 불효고, 부모님을 떳떳하고 당당하게 만드는 게 효도다. 나는 불효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부모 얼굴에 똥칠을 했냐 뭐냐, 당당하니 할 이야기 할 소리 하고 그랬는데. 그랬더니 ‘그래?’ 하고 넘어가고, 그 인자 나중에 나와서 보니까 우리 아버님 돌아가니까 동아일보에 크게 나왔어 이제. 나 때문에 홧병으로 돌아가셨다고 그래가지고. 인자 그 기사보고 나한테 물어 보드라고. 그놈들이 얼마나 한심하게 들었을 거여. 저기 아버지 돌아가셨는지도 모르고 말 안 해주니까 나와서야 알게됐는데. 교도소 생활 중에서 두가지 것만 내가 이야기 할 것이 있는데, 하나는 이제 재판과정에서 교도소에서 법정으로 가는데 서대문 구치소에서. 김지하씨랑 모두들 같이 재판을 받았거든. 그니까 지하 형님이 맨날 우리보고 너는 뭐 전봉준 닮았니? 너는 김개간 장군 닮았다드니, 그러면 인제 나하고 정길이 강이씨한테 자꾸 인제 그런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또 유행가 이야기가 나오면은 김 거 나훈아보다 뭔진이?
면담자: 남진.
구술자: 남진 맞어. 남진이가 잘 부른다고 빡빡 우기고, 다른 사람들 다 나훈아가 낫다고 그러는데(웃음), 그래갖고 맨 전라도 애기만 하는 거여. 그 나는 처음에 뭐 저렇게 편협한 뭐 그때는 지역주의니 뭐니 그런 용어도 안 쓸때니까 그러지만 뭔 저 양반이 저렇게 전라도에 대해서 묘한 집착이 있나. 병적이다 그랬어. 뭐 황톳길이 어쩠고 그러면서 그 김지하씨에 대한 좋은 인상에 상당히 찌그러졌어. 뭐 저렇게 편협하노. 전라도 경상도 가르고, 가수까지 빡빡 우기고 앉아있고. 그런데 이제 재판 과정에서 이 까마귀, 거의 우리 전남대생들 재판할 때는 가족에게만 가족 한두명에게만 방청을 허용했거든. 그때 변호사가 법정에서 구속되고 그럴 판인데 뭐 안와, 이쪽은 다른 지역에서는 다 올라와갖고 있는데 우리는 없어. 그라고 인제 뻔하지. 안양에서는 인제 그때가 10월이면 추울 땐데, 내의도 없지, 런닝 바람에 양말도 없지, 고무신신고 이라고 뛰어 오는데, 그때 일본 하야까시하고 그 다음에 누군가 두 사람이 있었는데, 민청학련 관련 사건 관련으로. 한 사람은 특파원이고 한 사람은 모르겠는데. 하야까시가 내 옆방에 있었는데, 내의 양말 이런걸 주더라고. 그때만 해도 이 전라도 촌놈이 내의는 동내의만 있지. 가을에 입는 얇은 내의는 생각도 안 해보고 살 때였는데, 얇은 내의를 주더라고 일찍. 첨봤지 나는 그때만해도 입은 사람도 안 봤으니까. 그런데 인제 받고 싶은데 아무래도 일본놈들 것은 받아야 뭐 어쩌고 생각하다가 돌려줘 브렀어. 아 그럴 수 있냐고 고집피우지 말라고, 그 인자 다른 지역 애들은 다 양말신고 그냥 내의 입고 뛰는데 그냥 검정 고무신에 맨 양말로 란인구 바람에 뛰 다니고, 맨발로 뛰 다니고 그러다가 인자 다음 재판 또 끝난 2차, 3차들 인자 서울구치소에 온 거예요. 인자 온다고들 누구야 그래서 얼른 내다보니까 전대생들 후배들이 오는데 그때 인자 눈물이 나오던데. 내가 서울 구치소에서 이감을 할라고 나오는데. 가지고 있는 짐들을 다 가지고 나와야 할 거 아니에요. 지금도 기억나, 서경석이부터, 서울에 있는 애들은 그걸 범털담요라고 하는데, 호랑이 그려지고 그런 두툼한 우리는 집에서 그걸 본적이 없지. 고놈에다가 온갖 책에다가 해 갖고 한복 입고 안에서 잘 먹고 운동은 안하니까 디룩디룩 살들 쪄갖고 이러고 매고들 나오는 거야. 근데 뭐 나나 정길이 이강씨나 똑같지 그냥 이제 교도소에 인제 구매할 수 있는 물건들이 있는데, 매점에서 수건도 제일 싼거, 비누도 제일 싼 거 이렇게 되거든, 란닝구도, 수건도 제일 싼거 폭 요만해. 길기만 하고 몇 번 써 갖고 칙 찍어지는 그런건디 고놈을 요렇게 접어서 바느질 하고, 끈 넣어서 그것이 살림 보따리가 되는 거여. 그것이 개털들의 보따리야. 그 보따리가(웃음). 제일 싼 그 수건으로. 고놈 하나에다가 인제 빨래비누 반 쪼가리 세수비누 요만한 반조각, 치약, 칫솔, 빤스, 란닝구 하니씩. 왜그냠느 잠깐 합방 기간이 있었기 때문에 그때 얻은 것들. 그래갖고 그래갖고는 다 독방에 나머지 기간에 독방에 있는데. 인자 달랑달랑 그것을 쇠불알이라고 오뉴월 쇠불알이라고 탁 들면 요만해가지고 이렇게 늘어져 있으니까, 고놈 하나 달랑달랑 들고 손가락에 끼여 가지고 나가는데 다들 이라고 들고 나오는 거야. 황당해블지 나는. 뭐여 이거 나는 요만한 놈 하나 쇠불알 하나 들고 있고 저놈들이 이렇게. 그래갖고 인자 안양으로 왔었는데, 어 저 후배들 온다고 그래서 나가서 티비 창문으로 우~하니 오는데 형선이하고 덕기하고 주먹으로 해갖고 한복 뺏어 입은 놈, 물건들 좀 뺏었는가 이라고 좀 들고 있고 나머지는 이학영이부터 시작해서, 열댓 명이 다 나 같은 쇠불알 하나씩 들고, 못 먹어 노니까 인제 뻔하지 기미하고 주근깨 하여튼 적당한 표현이 없는데, 꾀죄죄 해갖고 집 나간 애기들 얼굴 해갖고 그라고 걸어오는데 다 하얀데, 막 눈물 나올라고 그러더라고. 아하 지하형이 저래서 그런 소리를 했나 보구나, 전라도. 그거 한번 처절히 느낀 적 있고. 근디 인자 그걸 나는 배타적인 저라도 지역의식이라던가 그렇게는 안 받아 들였어. 현실이 이렇구나. 그 다음에 인자 책들인데 하루 종일 앉아있는데 독방에서, 책이 들어들어오나. 인자 다른 방 다른 대학생들한테 빌려보는 거지. 그라고 인자 자기들 볼만한 열권 들어오면 그중에서 보고 싶은 책들 싹 빼놓고 인자 나머지를 별 볼일 없는 것을 주는데, 빌려서 보믄 안에가 인자 은행잎도 들어가 있고, 그 밑에가 뭐 죽는 그날까지 기다리겠어요. 그라고 딱 본게 여자친구들한테 온 거야.(웃음) 그런 것들이 몇 있는 거여 인자. 그때 인자 느낀 거 생각한게 뭐냐믄 그래 내가 나가 면은 다음 징역산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내가 옥바라지를 충실히 해야겠다. 두 번째가 우리는 여자가 한명도 없지 인자. 우리 민청학련사건 전남대가 학교로는 서울대 다음으로 숫자가 많은데 17명이 구속되었으니까. 두 번째로 많아요. 근데 여자들도 운동가를 키워야겠다. 그런 다짐을 좀 하고 나와갖고 그걸 실천에 옮겼는데 그건 나중 이야기고. 그 다음에 이제 한 가지가 내 인생 차원에서 사상적 차원에서 어떤 자그마한 전기가 됐는데 그게 뭐냐믄 내가 농대를 다니면서 어릴때부터 꿈이 있었어요, 나한테. 어린시절부터. 그게 뭐냐면은 세계에서 제일 멋진 정원을 갖는 것이 내 꿈이었다고. 정원을. 그래가지고 막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하고 호수가 어떻게 하여튼 뭐 외국 영화를 보거나 시진첩을 보거나 하 이런 정원을 내가 가져야지. 묘한 거 있어갖고 대학 다닐 때 내가 축산학관데 임학과에 조경학이라는 게 있어요. 고걸 또 학점 신청해가지고 A학점 맞고 그랬는데. 가서 조경 농촌에 들어가서 목장하고 그러면서 완전히 목가적인 집 그래갖고 정원을 멋지게 꾸미고. 그래서 인제 그 정원을 꾸미는데 뭣을 어떻게 꾸미고 뭣을 어떻게 꾸미고, 근데 이제 내가 평소에 생각했던 것하고, 생각한 거 하고 비교해보니까 조경학에가 다 나와 있는 거여. 내가 생각한 것이 긍게 자존심이 팍 상했지. 근데 한 가지 없더라고 조경학에가 정원에 이렇게 꾸미는 것에 있어서. 그게 뭐냐면은 내가 인제 이 호수, 연못 같은 데다가 뗏목으로 만들어서 사방 직사각형이나 원이나 그 우에다가 흙을 1미터, 2미터를 쌓아가지고, 바위도 놓고 나무도 심고, 화분도 만들고 정자 비슷허니 만들고 일종의 인공 섬처럼 만들어서 이 썩지 않도록 그 밧줄을 만들어서, 쇠밧줄을 만들어서. 밑에다가 인자 닷을 놓는거지 그럼은 인자 고게 바람에 따라서 요쪽으로도 밀려가고, 저쪽으로 밀려가고 그럼 인자 이쪽으로 밀려왔으면 내가 나가서 달밤에 피리나 불고(웃음). 그라믄 인자 호수가 바람타고 이렇게 왔다갔다 하고. 꽃을 거기서 얻고 거기서 인자 시나 읊으고 한다는 식으로. 고런 생각을 옛날에 정원생각을 하면서 했었거든. 그건 없는 거야. 책에가. 그런 정원에 다양한 형태의 조경이 있는데 연못이나 호수에 그런 인공 댐을 배처럼 만들어갖고, 그 속에 이렇게 꾸미고 있는 것은 없는거야. 고것은 내 자존심을 찾았지. 그래, 다 다른 것은 있다 하더라도 요것은 나만의 독특한 독자적인 것이다. 그래 나는 꼭 그렇게 해야지 그래갖고 조경학을 에이 맞고 그랬는데. 그런데 대전교도소에 있을때, 그때 내가 지금도 확실히 어느 출판산가는 기억이 안나는데, 현암사같았는데 다산 시문선이라는 책이 나왔어요. 다산의 시학 관련 서적이 아니라 다산이 개인적으로 쓴 시, 그 다음에 편지, 자식들에게 자식들하고 교환한 편지 이런 것들을 뽑아서 쓸만한 것을을 모아서 만든 책이 다산 시문선이었어요. 좀 부피가 좀 이렇게 좀 큰책이었는데, 보통책보다. 그 다산 시문선을 읽으면서 내가 인자충격을 받은게 두가지가 있었어요. 하나는 내가 그때까지만 해도 민청학련사건때 썼던 선언문 중 하나가 민족, 민주, 민중선언 그런게 있었잖애. 민중소리를 그때부터 쓰기 시작했는데, 내가 쓴 것이 아니라 뻔하지 뭐 학자들이 쓴거지. 근데 따라서 쓴건데. 나는 어렸을때부터 큰 부잣집만 아니었지만 시골에서 부잣집이었거든. 배고픈지를 몰랐으니까 인제 아버지가 아버님이 보증서가지고 잠깐 어려울 때 빼놓고는, 배고픔을 모르고 시골 부자였는데, 몰락한 지주 집안이었으니까. 그래도 정미소하고 뭐 창고하고 그랬으니까. 근데 인자 다산이 강진에서 유배생활 하면서 강진만 유역에 민중들의 처참한 삶ㅇ르 시로 읊은 것들이 여러 편 나와요. 그 시들을 읽다가 너무 충격을 받아븐거야. 이 민중들 고달픈 삶에 대해서. 오. 왜그냐믄 내가 시 좋아해갖고 온갖 시집은 다 모아갖고 서양놈들 뭐 그냥 시 다 허고 우리나라 시인들거 다 모아놓고 거식하고. 시도 쓴다고 써그랬쌌고 그런데, 아 그냥 다산 시문선에 나오는 그 처참한 민중들의 그 가렴주구에 시달리는 민중들의 삶을 그 비참한 삶의 모습을 그려놓은 시들을 보고는 눈물이 쏟아져 블더라고. 그것이 오늘의 민중들의 삶으로 나한테는 받아들여진거여. 나 이런거 모르고 살았구나. 내가 말로 민중 어쩌고 떠들면서 내가 배고파보지 않아서 몰랐구나. 이런 놈의. 그래갖고 다산이 이제 다르게 보이더라고. 아 단순하게 학자가 아니었구나 이 사람이. 이런 민중에 대한 애절함 가지고 있었구나. 그래갖고 인자 거기서 충격을 받은 거 다시 말해서 ㅁ니중에 대해서 이백년전의 인물의 그 어떤 작품, 문학적 작품을 통해서 충격을 받은거야. 그 다음에 인자 그것이 진짜로 나에게는 충격이었는데, 다산이 자녀에게 아들에게 보낸 편지 중에 뭐가 있냐면은 이 농민들의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는 땅 없이 농사를 지어야 한다. 그래서 밭둑에도 콩을 심고 뭐 그라고 노는 땅이 없이 그러면서 뭐가 나오냐면은 연못이나 호수 같은데 수면도 뗏목을 뛰워서 이렇게 이렇게 해갖고 거기에 흙을 놓고 거기다도 보리도 심고, 채소도 심어서 생산을 해야한다 이런 대목이 아온거야. 인자 거기에서 내가 완전히 벼락을 맞어븐, 왜그냐믄 다산의 출신배경이 나보다 훨씬 너무나 훌륭한 가문의 자제였거든. 긍께 굶주림을 모른 가난을 모르는 민중을 모를 수 있는 그런 계급적 출신 배경인데, 나는 인자 그래봤자 조끔은 부자라고 했어도 형편없는 그 사람하고 비교하고 아랫계급인데, 나는 그 위에서 이렇게 해서 호수에 정원만들어갖고 거기서 음풍농월할 생각을 했는데, 그 사람은 그런 출신배경속에서 고관대장 했으면서 생산을 위해서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서 거기서까지고 놀리지말고 그 공간도 작물을 키워야 한다고 편지에 써놨던거지. 발상은 똑같애. 거기다 뭐 뗏목 뜨;우는 것은 거까지는 같은데 이거 완전히 다른 차원이여.나는 인자 유한 게급적 발상이고 그 사람은 민중적 발상이고, 근데 계급적으로 보면 다른 꺼꿀론데, 그 사람이 유한계급이고 나는 아닌데. 분류한다면은. 나는 도대체 뭐하는 놈이냐. 인제 충격적인 질문이 떨어져븐거여. 얼마나 부끄러워블던지. 독방에 앉아서 몇 일 책을 덮어블고 앉아서 어떤 뭣 때문에 이런 차이가 났는가. 어떻게 해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고 그 사람은 이런 생각을 했는가. 그래가지고 의외로 나는 이제 그 무슨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맑시즘이 어떻게, 뭐 가 어떻고 하는 그런쪽의 충격을 받은 것 보다는 느닷없는 다산 시문선을 통해서 이제 내가 충격을 받아갖고 내가 얼마나 좀 심한말로 이제 부르주아적인 사고를 하고 있고, 왜 이 이야기를 하냐면은 가서 재판을 받아보는 과정에서 한 삽십이명 인자 일차 주모자급 재판인데, 내가 반공 딱지를 못 뗀 어떻게 보면 유일한 사람이었어요. 왜그냐면 인제 내가 쩐남대 선언문을 썼는데 거기에 어떤 대목이 나오냐면은 그때만 해도 인제 가능하면 들어가서 빨갱으로 안 몰리기 위해서 일부로 북을 좀 까는 내용들이 한줄씩 들어가고 그랬다고, 518직전에도 뭐 이 전남대 시위때도, 북괴는 오판말라 이런 피켓도 들고 그랬는데, 근데 그게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북괴의 어쩌고 저쩌고 이런 대목들이 들어간다고. 선언문에가 인제 전남대가 유일했다고 그것이. 남침야욕에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북괴를 의식해서라도 민주정치를 해야하는데, 이런 식으로 한다 잘못했다, 이런 내용인데. 근데 이제 내가 다산 시문선을 통해서 두 가지, 그 아까 호수나 연못 위에 그거하고, 그 다음에 이제 당시에 그 강진만 유역지역의 민중들의 고달픈 삶을 한 그 어찌됐든 관료고, 선빈데 그 사람이, 학자가 그렇게 애정을 가지고 그런데에 대해서 충격을 받고, 그랬던거야. 긍게 인자 ㅁ낳은 것이 생각을 하고 나서 아 내가 나도 모르게 이러이렇게 형성이 됐구나, 사고나 사상이, 이런 문제점이 있구나. 그래갖고 인자 그 다음부터 다시는 조경이야기 인체 꺼내지도 않기로 하고, 포기. 그러면서 어떻게 마무리를 했냐면은 내가 생각하는 저 정원을 꾸미라고 하니까 호수도 있어야지, 바다도 좀 있어야지 백사장도 좀 있어야지 산도 있어야지, 어쩌고 하다가 보니까 그것이 자연이 돼븐거야. 그러믄 아 이건 내가 혼자서 가질 수 없는거, 이미 나는 다가지고 있다, 언제라도 볼 수 있다, 긍게 나는 가진 것으로 하고 끝. 이렇게 정리를 해 버렸는데, 나 혼자만 가질 수 없고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것, 지구상에 다 있지 ㅇ낳느냐, 이러고 끝냈어. 인제 그런 이제 나름대로 독방에서의 체험이 있었어요. 인자 나왔어. 인자 반공딱지도 상당히 떨어진 채로, 내 자신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걸리고 그러니까 하하 관제 빨갱이라는게 이렇게 만들어지는구나. 관제 공산당이. 많은 생각을 했고. 그래가지고 인자 나와가지고 처음에는 여기저기서 모두 환영회도 하고 영웅대접을 했지 왜냐믄 어차피 내 국내외의 압력과 호소에 의해서 정부가 인자 일괄 석방을 했기 때문에, 그때 인자 찍힌 일부 현 학생이 아니 졸업생들일부하고 몇 사람 빼놓고 다내놨지 그때.

3-1. 월남전 종결과 탄압국면
구술자: 그런데 그때가 인자 2월 16일날 내가 나왔는데 대전에서 빨리 나온데는 2월15일날 그 하루전에 나오고. 그런데 잘 알겠지만 4월달에 들어와 가지고, 9일날 4월 9일날 인혁당 관련 8분이 사형당하셨어. 8분이 그냥 사형당해브렀어. 그때 내가 전남대 거 도서관 앞에 있었는데, 백도 앞에. 그 소리를 전해듣고 얼마나 화가 나는지 거기서 또 내가 일어나갖고 또 한번 맹세를 했는데, 내 한 목숨 다바쳐 이놈의 독재정권, 학살정권하고 맞써 싸우겠다고 악을 썼는데, 약속은 지켰는데, 그것이 인자 충격적인 사건으로 왔고. 인자 이 들어가서 감옥살이 하면서 많이 수없이 되풀이해서 반성한 게 아하~ 우리가 생각했던 것처럼 허약한 정권이 아니라는 거지. 단순한 정권이 아니라는 거지, 거짓, 그냥 막강한 하나의 체제라는 거 이것을 동시 다발적인 4․19식 환상을 갖고 달려들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게 얼마나 어리석었는가, 그러고 우리가 얼마나 힘이 없었고 미약했는가, 시위도 한번 제대로 못해 본 채로 세상만 시끄럽게 만들어 놓고 이거 뭔 꼴이냐 생각하니 부끄럽기도 하고. 인자 그랬는데, 반성도 많이 했는데. 아 그냥 4월9일날 딱 그런 일이 터지고 나서 사형 집행한거 보고는 진짜 이놈들하고는 사생결단을 해야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이제. 그러고는 에 이 약속했던 대로 감옥 안에서 복학이 안됐제, 안됐는데 여자후배들도 좀 의식화 시키고 옥바라지 모임도 만들고. 그래야겠다. 그게 인자 옥바라지를 솔선해서 하자 그래갖고 그때 인자 못나오신 분들 나머지 이영배씨부터 김지하씨 다시 들어가 버렸지 인자 인혁당 사건 조작 폭로했다가 다시 들어가셨는데, 김지하씨 이런 분들에 대한 인제 책 넣고 인자 옥바라지를 개인적으로 시작을 그때 했어요. 근데 글쎄 이 이야기는, 어째든 그건 인자 나중에 생각해 보기로 하고 할까말까. 어쨌든 인자 그러고 있는데 분위기가 처음에는 영웅대접하고 여기저기서 밥 사주는 사람도 나오고, 그랬는데 교수들도 가면 환영하고 막 들어오라 그러고, 어떻게 지낸가 해쌌고 강의 시간 됐는데 십 분 늦게 들어가면서까지 나하고 앉아서 이야기할라고 그러고 그랬는데 월남전이 막바지에 이르러가지고 월남 베트남이 붕괴되기 시작한 거지. 그래가지고 4월30일 이제 베트남 통일이 돼 버린 거예요 끝나버린 거지 인자. 그러고 나니까 이제 엄청난 위기감을 느끼게 된 거지. 위기감을 느낀 체 하는 거지 정부 차원에서는 그걸 빙자해 가지고, 탄압국면으로 돌아선 거예요. 그래가지고 그때 민주회복 국민회의니 무니 해갖고 인제 우리들 민청학련 관련자들이 들어간 뒤로 74년 후반기 만들어진 게 민주회복 국민회인가 있었어요. 광주지역에서는 홍남순 변호사 등 이 양반들이 주축이 되어서 만들고 그랬는데, 모조리 이제 그 민주를 외치는 모든 단체를 인자 깨기 시작한거예요. 어느 정도 심했냐면 그 해 8월에 이제 장준하선생님이 의문사를 하셨는데, 그때만 해도 우리는 완전히 암살로 봤어요 그게. 근데 내가 그때 나는 책판매관계로 다른 데가 있었는데, 광주에서 광주 출신 서울에서 학교다니다 광주 출신으로 감방에 갔다나온 친구 일부하고 광주친구들이 모여서 이 장준하 선생님 추모식 같은 것을 한 거예요. 돌아가셨으니까. 그것도 자취방에 모여서 사상계 같은거 갖다 놓고 몇 구절 읽고 그러면서 근디 그 정보를 이놈들이 이제 듣고는 잡아다가 뚜들겨 팬 거예요. 이제. 그래가지고 누가 이거 제안했냐부터 시작해서 뭣 땜에 했냐고, 등등 그래갖고 뚜들겨 맞고는 그러니까 그때는 월남 베트남전 핑계로 해갖고, 엄청나게 이제 탄압을 합리화 한거예요. 그래갖고 사정없이 조여블땐데, 뭐다 갔다가 이제 강제로 두들겨 패갔고, 탈퇴해서는 탈퇴서약받고 탈퇴서 받고, 반성문 막 받고 깨질 때에요. 다 깨졌어. 전국이 다 깨졌어. 다 깨졌는데, 인자 그렇게 8월달 인데, 그렇게 장준하선생님 추모식 했다가 들어가서 뚜들겨맞은 친구들이 하도 분해갖고, 홍남순 변호사를 찾아가서 변호사님 우리가 너무 억울합니다, 억울합니다 이거. 소송을 좀 제기해야겠습니다. 변호사님이 좀 도와주십시오 긍께 홍변호사님이 글쎄... 글쎄... 그래갖고 앉아있으니까 이 친구들이 처음에는 왜 이러나 그러다가 인제 계속 그렇게 사정을 해도 글쎄 글쎄하고 있으니까 배신감을 느껴갖고, 아 그럴 수가 있습니까 뭐 어쩌고 저쩌고, 인자 그라고 나가니까 허허, 계속 글쎄 글쎄하고 답을 안해븐거여. 무서운 사람들이여 무서운 사람들이여 글쎄 글쎄. 인제 나중에 그것을 변호사님이 왜 그런가를 여기저기 다니면서 변호사를 욕하고 원망하다가 알게 된 건데. 민주회복 국민회의 광주본부가 전남본부가 하여튼 그 양반이 책임을 맡으셨는데, 안기부에 끌려가갔고 정보부지? 그때는. 해체 서약을 하라 그거여. 해체한다는 각서를 쓰라고 한거여. 긍게 이 양반이 안한다고 그러니까 이 자식뻘도 안되는 이 나이 어린것들이 홍변호사님 고추를 잡고 30센티 자로 두들겨 패븐거여. 변호사를. 그것도 60이 넘으신 분을. 그래갖고 홍변호사님 도저히 못 견디고 쓰러져븐 거여. 인제 그런 분이 어디가 수를 당해 노니까 고추가 이렇게 붓도록 뚜드려 맞아브렀으니 말을 못하고 있는데 또 뚜들어맞았다고 후배들이 이거 소송을 어쩌고 하자고 하니까 이 양반이 알거든. 이게 소송으로 될 문제가 아니라는걸. 이놈들이 얼마나 무서운 놈들이라는 걸 르랑께 글쎄, 무서운 사람들이여, 무서운 사람들이여, 그라고 안하셨던거여. 긍게 변호사를 그것도 낸호고 인권 무료 변호하고, 엠네스티 활동하셨던 분을 그렇게까지 했을 정도로. 그래갖고 전국에까지 다 깬거여. 다 깨졌어. 모든 민주가 어떻고 자유가 어떻게 떠든 조직이 다 깨졌어. 우리는 4월 달에 왔제. 다시 모였는데 뭐냐믄 이 베트남전이 이렇게 싹 끝나게 되고 탄압이 심해지니까 그저 길가에서 보면 오, 하고 아는 체 하고 서로 밥산다 하는 사람들이 싹 보믄 도망가는 옆 골목으로 새 블고, 그걸 느껴 이제. 학교 들어가서 교수님 실 딱보믄 오 왔는가, 근데 어 나 좀 강의 들어가네 그래갖고 도망가 블고. 안 놀아주지, 상대를 안 하는 거지. 완전히 나병환자 전염병 보균자같이 그렇게 상황이 변해 버린 거여. 밥은 저리가고 용돈 저리가고. 그러면서 탄압이 어느정도 심했냐면 이제 학교도 복학도 안 되지, 취직은 말할 것 없지, 집에서는 애물단지지, 이제 집에서도 찬밥. 그랑께 교통 인제 버스 요금이 없어갖고 회의에 못 나올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 된 거지. 그 인자 가정학습 같은, 이를테면 과외지. 그런 것 좀 할라고 해도 부모들한테 저거 빨갱이다, 애 장래를 버린다, 왜저런 놈한테 배울라고 하냐 그래갖고 훼방 부려갖고 막아블고. 담당이 딱 정해져가지고, 그땜나 해도 수가 많지 않으니까 아예숨을 못 쉬게 만든거야. 달달달달달 볶아가지고,

3-2. 월부책장사
구술자: 극단적인 예로는 그 해 말에, 내가 도저히 안 되겄길래, 두가지 일을 벌렸는데 이게 살아야 하니까 먹고 산다기보다는 나 자신이 먹고 산다기보다는, 어떻게 하든지 여기서 절망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버틸라면 서로 의지해야 하니까 뭐 세력을 키우고 뭐 싸우는 것은 둘째고, 우선 우리라도 지켜서 살아남아야한다는 그런 절박감 때문에 모질게 좀 한 것들이 있는 게 인자 그게 두가지였는데 하나는 월부 책장사 했고 하나는 포장마차 그렇게 했어요. 우선 4월달에 징역 갔다 나온 민청학련세력들이 중심으로 해서 구속자회를 만들었어요. 민주회복구속자회라고 그래갖고 내가 초대회장을 맡았었는데, 그래가지고 뭐 학습도 뭐 체계 있게 못하고 자꾸 만나는 거 이제 서로 의지할 수 밖에 없으니까. 뭐 아무도 우리를 상대해주지 dskg는 그런 외톨이가 돼 있는 상황에서 거 구속자회를 만들었는 게 그 구속자회도 다른 지역은 다른 지역들도 만들었는데 다 깨졌어요. 지그들이 탄압하니까. 근데 광주만 그것을 지켜갔는데, 예를 들면은 이제 포장마차, 월부책장사하기전에, 용봉 축제라고 그러죠, 6월 달인가 5월 달에 전남대 개교기념일 행사. 옥바라지를 하겠는데 그 다음에 이제 이 버스비가 없어가지고 못나오는 정도, 담배를 제일 값싼 담배도 못 살 정도에요. 긍게 인자 나는 아예 운동 뛰어든 이후부터는 가방을 똥가방이라고 그랬는데, 가방이 헐어서 똥가방이 아니라 그 안에 벼라 별것이 다 들어 있다고 그래갖고, 아예 담배를 거기다가 여러갑씩 담고 다녔어요. 빤스에다 런닝구에다가 이쑤시개부터, 하여간 손톱깎이까지 집도 절도 없이 동가숙서가식하고 다니니까. 그 안에 담아논 게 후배들이 가방 열어갖고 담배 가져가고, 옥바라지 해야 하고 돈이 필요하니까, 버스비 없다고 하면 형님, 왜, 서울에서 오랜친구가 왔는데 국밥이라도 하나 사먹고 싶은데 하다못해 돈이 필요한 거예요. 돈이 인제. 그래서 용봉축제 때 가서 얼음, 아이스케끼 인제 케키 장사를 하자 그래가지고 전부 모였어요. 처음에는 호기스럽게 다들 자기도 통을 매겠다고 가다가, 형님 동생하고 아는 동생들이 달라드니까 이 원수들이 난처해갖고 싹 (빠지는 거지), 좋아 그럼 내가 하지, 얼음 매고 악을 쓰고 다닌 거예요. 우리 어렸을 때 들어서 얼음과자라고 하면서. 그러니까 인제 학교당국에서도 처장이 나서갔고 사람을 시켜서 날 좀 보잔다고 갔어, 갔더니 목표액이 솔직히 말해서 얼만가, 우리가 주께 좀 가소, 무슨 소리하요, 우리 깨끗이 돈 벌어서 깨끗하게 쓸라고 그러는데, 우리가 사 먹으면 될 것 아닌가, 그거야 내가 장산디 좋죠, 인자 한 통을 딱 사주더라고. 직원들 나눠주고, 그래서 얼른 또 한통을 받아갖고는 또 악을 쓰고 다니니까 오라고 하더만 아 목표액을 말하라고 주께. 인자 그래갖고 인자 안받고 팔고 다녔는데, 끝까지. 악을 쓰고 다녔어요 그냥. 인자 악밖에, 그때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악밖에 없었어. 독, 뭐 다른 거 없어. 신념 그런 건 뻘소리여 그거 뻘소리. 길게 봤을 때 이야기고, 상황 상황을 놓게 되면은 얼마나 독하냐, 악하냐의 문제, 악을 뽐느냐의 문젠데, 그래갖고 인제 그걸 팔고 다니고. 그 다음에 이제 지금은 인제 후문에서 들어가면 오른쪽이 요란해져 브렀던데, 거가 거의 한 만평이상이 그전에는 거 공터 였어요, 초지, 풀밭 그래갖고 전남 농대에서 초지를 조성해갔고 거기를 벴다고요, 사람들을 사서. 거 지금 건물들어서고 난리가 났던데, 전남대 깝깝하게 돼 브렀는데, 옛날에는 시골이었는데, 인자 전남대 내가 축산과니까 농대쪽하고 이야기를 해가지고, 교수들한테 이야기를 해갖고, 일당사서 사람 일당쓰고 쓸 바에야 우리를 써라. 우리가 베서 돈도 이렇게 이렇게 좋은데다 쓸란다, 그렇게 해라. 거기서 인자 벗어 부치고서 베는데 남주가 또 김남주 시인이 입이 걸거든. 그런데 학생들 웃고 떠들면서 왔다갔다 하더니 남주가 화가 나가지고는 욕을 욕을 하면서 시발놈들아 느그들 그렇게 세상이 좋아서 낄낄거리고 웃고 사냐부터 악을 쓰고 그런 일도 있고 그랬는데, 그것도 이틀하고 쫓겨나 버렸어. 압력이 들어와 갖고, 그래서 인제 내가 그러던 차에 김정길이가 몸이 아주 안 좋아진 거예요. 왜 그러나믄 전기고문을 민청때 받았는데, 전기고문 유일하니 김정길이가 받았는데, 날이 으스스하거나 비가 오고 그라믄 몸을 추스르지도 못할정도로 지팽이를 집을 정도로. 그렇게 됐는데 골, 우리가 옛날부터 어렸을때부터 들은 이야기로는 골병 든 사람은 똥물, 오래된 똥물을 마시면 좋다더라. 인자 고 이야기 돈이 없으니까, 해결책이. 그게 또 어떤 사람들이 좀 흑염소를 고아서 먹이면 좋고. 그 인자 오래된 똥을 어딨냐 절간밖에 없다. 절로 보내야 한다. 절로 보내면 먹고사는건 거기서 돈내야 하숙인데, 돈, 흑염소 사먹일라면 돈, 어떻게 하냐 답이 없어, 좋다 그럼 내가 나서겠다. 그래갖고 내가 월부책장사를 나섰어. 아 뭐 왕비 열전부터 시작해서 희망없는 아조 책이라도 돈 버는게 목적이니까. 그래갖고 딱 해갖고 개학하고는 젤먼저 서부경찰서 정보과정을 찾아갔지. 인자 그 사람이 우리들 뚜들어팼고 그런 사람중에 한 사람이여. 책좀 사주쇼, 나도 인자 먹고 살아야 될거 아니요. 복학도 안시켜주고, 취직은 뭐 당신도 뻔히 알잖애 안해 더 안시킨다는거. 과외도 못하게 하는 판에 먹고 살아야하니까 나좀 사주쇼. 그랬더니 사주더라고. 대학에 들어가서 교수들을 좀 만났더니, 교수들이 뭐라 하냐면은 그렇게 나 만나면 반갑게 하고 그러던 사람들이 총장한테 먼저 가보소 총장이 사면 참 우리가 편하겄는데, 우리도 사기가. 그라고 총장한테 갔어. 사주쇼 그랬더니 이건 판공비가 아니라 내 개인 공금에서 나간 돈이라고 함녀서 사주더만. 그래갖고 인자 팔고는 교수들을 찾으러 다닌거여 교수 연구실마다. 속없이 나는 많은 교수들이 사줄줄 알았어. 그랬더니 막 뭐 어쩌고 저쩌고 핑계를대고, 머리 끝까지 화가 나브렀어. 아예인자 교수들 저 복도끝에서부터 시작해서 누구 교수실인지도 안보고 고개 숙이고 땅땅 뚜드려갖고 열고는 책좀 사주쇼. 아 뭐 어쩌고 안녕히 계십쇼. 땅땅 두드리고 계속 방마다 돌아다녔어. 그래갖고는 한번은 얼마나 화가나는지 너무 안사주니까 한 놈도. 비율로 봐서 너무 안사줘븐게 상대 앞에서 문리대 옆에 상대 앞에서 악을 썼어. 이런 개새끼들이 없다고, 쌍놈의 새끼들이 형도 확정되기 전에 제자들 모가지 짤라놓고, 제자들이 이러이러한 일 이렇게 이렇게 해서 과외도 못하게 탄압받는거 뻔히 알면서, 개새끼들이 좀 그런데좀 쓸라한게 책 한권 안 사준다고. 교수새끼들 내가 전부 고무신, 그때 내가 고무신 신고 다녔는데, 귀방맹이를 발라븐다고 도둑놈의 새끼들 말이야. 제자들 죽이고 잘 먹고 잘산다고. 악을 막 쓰고 그랬더니 인자 소문이 났어. 인자 얼른 사줘브러야지 욕을 바가지로 안 먹는다더라.(웃음) 그래갖고 인자 사정없이 뚜들고 다녔는데. 내가 그때 이제 재수달이 없으니까 어떻게 돼 브렀냐믄 그 내가 그 허리가 인제 안 좋아져가지고, 고문의 후유증이 뚜들어 맞은것도 있고, 자세가 나쁜것도 있고 그래가지고 그 그래갖고 이제 이러고 다니는 못 피고. 어정어정하니 근데 이게 찜질하는게 있어요. 핫팩인가 고걸 담고다니면서 가방에서 좀 꼽아서 주라고 댑혀주라 해갖고 이렇게 딱하고 다니고 그랬는데, 아 그러고 다니다가 아폴로 눈병이 유행이 됐는데, 눈병이 와브렀어 인자. 그래갖고 인자 여가 여 소눈깔처럼 이만해져갖고 고름이 끼고, 안대를 매고 허리 이래갖고 이 본관에서 학생회관 식당있는데 지금은 구 본관 요쪽건물. 지금도 학생회관 거가 식당있제. 거리가는 이렇게 길이 좁아. 걸어다니는 길이라. 옆에가 잔디밭이고. 거기다가 왕비열전부터 시작해서 삼국지부터 시작해서 온갖 책 선전팜플렛들 얼룩덜룩한거 쫙 펴놓고는 허리 못 펴니까 가압 여기다가 놔두고 여그(눈) 안대하고 책좀 사주쇼, 책좀 사주쇼 얼굴도 안들고. 그라고 한시간내 한나도 안 사드라고. 그래갖고 그라고 돌아다녔어. 악으로. 요놈이 좀 어지간 하니까 또 요리 오더라고. 요쪽으로 안대 돌려매고. 그래가지고 인자 화가 나갖고는 독심으로라도 팔아야겠다고 생각해갖고 지방으로까지 해서 강진, 완도, 장흥 막 돌고. 그래가지고 그때 당시에 2백 4십만원을 벌었다고. 엄청 큰 돈이지. 그래갖고 내가 두달하고 그만두니까 서울 본사에서 나 좀 더 해주라고 찾아서 내려오고 안만나고 그랬는데. 내가 생각해도 그때 독으로 했어요. 교수들도 욕 나한테 많이먹고 그러고 또 일면 세월이 흐르고 보니까 그 좋지도 않은 책을 교수들보고 사주라고 빡빡 우긴것도 억지는 억진데, 그때는 인자 그 생각보다는 자기들은 좀 도와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거든. 그러니까 인자 안해주니까 독기가 어떻게 하면 독선이야. 일종의 나는 옳으니까, 선하니까 안 도와주면 나쁜놈 이렇게 되는거지. 잘못이긴 한데 그때 내가 심하게 했어. 하여튼 긍게 인자 뭐냐믄 인제 독밖에 안남은거여 악밖에. 이 상황을 이겨낼라믄 이렇게 할수밖에 없다. 그래갖고 새끼들아 경찰도 사줬단 말이야. 근디 느그가 안사줘야 말이지. 느그 봉급이 얼만데, 이런 식이지. 그래갖고 안대 매고 다니는데 한번은 내가 보길도까지 들어갔어 인자 완도를 돌아다니는데 보길도 하면 전남대, 무슨 시험장인가 하여튼 건물이 있어요. 콘크리트 건물이 있는데, 전남대건물이여 농대것인가 무슨 임업 현장인가 인자 잠자리가 있나 시골에 그때만해도 관광지로 알려지기 전엔데 그 인제 그 건물 옥상에서 저녁을 암것도 없이 친구도 뭐고 없이 거기서 날을 새는데, 동네 꼬마들이 밑에서 막 놀고 있더라고. 그 인자 그때는 어떤 자세로 그때 그때를 살아갔냐 그 이야긴데 내가 인자 누워서 별 보고 있다가, 내가 누군가, 나라를 바로잡겠다고 나선 인자 명색이 운동가다, 운동가가 이 보길도라는 섬에 들어와갔고 내가 무엇인가를 해 놓고 나가야학건데, 여기서 잠만 자고 나갈 것이냐. 뭣을 할까. 그래갖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또마들한테 지금부터 씨를 뿌리자 그래작고 꼬마들 홀렸어, 그래작고 노래를 가르쳐준다고 그래갖고 인자 꼬마들한테 애들 재밌는 이양기 잘하니까 어렸을때도 뭐 교회에서 노래, 이야기대회 같은거 항시 일등하고. 그래가지고 애들 엄청 웃겨가지고 딱 끌어모아놓고는 내가 그때 노래를 가르친 것이 이제 그 인자 지내놓고 나면 슬픈 이야긴데 선구자 노래를 가르쳤어 이제. 그 인자 나중에 친일파가 쓴 엉터리방터리 시고 어쩌고 해븐께 김 팍 새는데, 감옥안에서 그렇게 악쓰고 불렀던 노랜데. 이 노래를 이친구들이 어느날엔가 인자 입에 오르내라다 보면, 부르다보면 나이들면 아하 이레 이런 노래였구나 어떤 아저씨가 이렇게 가르쳐줬는데 이게 또 어떤 진로의 영향을 줄수도 있겠다. 씨를 뿌리자 노래의 씨를 그래갖고는 밤새 이제 선구자 노래를 가르쳤어. 애들이 따라서 하여튼 잘 하더라고. 그렇게 해서 인자 보길도 와서는 이정도 그라고 나가고. 지금 박형선이라고 지금 매젠데, 매제가 됐는데 그 친구가 지금 꽤 부자됐지. 그렁게 건설업에 성공해갖고 그때 인제 이 친구도 똑같이 집에서도 찬밥, 복학도 못하고 나 소한도, 그쪽으로 다니고 그럴 때 따라다녔는데. 나보고 형, 술을 좋아하거든, 막걸리 딱한잔만. 무슨소리냐 우리가 뭐 때문에 이걸팔고 다니는데, 아니 형님 딱 한잔만, 한푼이 없을때니까 그대 자기가 나도 그렇고. 이 돈은 우리 개인 돈이 아니야, 엊다 쓸 것인데? 그래갖고 끝까지 못 사먹게 안줘브렀어. 그랑께는 아이고 옷 벗어 부치고 빤스만 수영복이 어딨어, 물에 들어가서 헤엄치고 나와블더라고. 긍게 나는 인자 잊어브렀지. 미국 89년에 왔을때 아이고 그때 그 막걸리 한잔도 안사주고 그렇게 맺혔는데. 인자 그런식으로 팔아가지고 그렇게 해서 돈을 모아서 정길이 염소 사갖고 절에 들어가라고 구례사쪽으로 보내고. 하여튼 그때 비참했어요 인자. 형님, 인자 집세를 못내갖고 길바닥에 쫓겨나니까 어떻게 해서든. 대인시장 내가 93년에 귀국해갖고 대인시장을 갔는데, 왜그냐믄 대인시장에 들어가면은 이쪽에서 전남여고 있는 쪽에서 이렇게 내려와갖고 대인시장으로 들어가면은 요쪽으로 가면 여기 기사식당이 있었어요. 그때 백원이면은 밥을, 백반을 먹는거야. 그다음에 요쪽 요쪽으로 오면은 팥죽집이 있어. 내가 미국 가기 전에 거가 80원까지 했어요. 거 팥죽이 올라 갖고, 40원 60원 80원까지 갔는데, 그라고 인자 팥죽 한 그릇에 미원, 아 이제 미원이 아니라 당원, 당원하고 인제 나박김치 같은거 하나. 딱 정했어요 그때, 손님오면은 특별한 손님이라고 하면은 국밥, 인자 그것이 최고여. 국밥. 그 돼지머리 딱 걸어놓고 국수 이렇게 사리 딱 삶아서 놔두고 송송송 썰어서 인자 국수하고 해서 주고. 그게 그때 꽤 비쌌지. 그 국밥을 손님 올 때 최고. 그러고는 인제 주로 때우는 것이 팥죽이었어요. 뉴슈가 하고 당원, 그런거 놓고 그래서 인제 그때 생각나갖고 대인시장 가서, 갔더니 거기는 시설이 옛날하고 달리 멋지게 지어져가지고 깨끗해졌던데 옛날에는 허술했는데, 그 인제 대인시장 거기는 안 잊어버리는데. 그래가지고 인제 그걸 가지고 보태쓰고 이러 저리쓰고 그 어려움 속에서 지켜간거예요. 꺽이지 않도록.

3-3. 포장마차
구술자: 그 가을에 도저히 안 되겄기에 안되겄다 나만 뛰다닐것이 아니라 같이 해야것다. 그래갖고 내가 투자를 해서 이제 수레를 두 개 만들었어요. 포장마차. 그래가지고 포장마차를 한팀은 인자 학영이쪽에서 하고, 한쪽은 이제 형선이랑 이쪽에서 덕희랑 이쪽에서 하고. 내가 인제 그걸 만들어가지고 그것도 인제 산 것이 아니라 만들었어요. 수레 허술한 놈 하나 사갖고 와서 위에 언지는 것 등등. 인제 그걸 제제소하는 후배가 있어가지고 거기가서 했는데, 그라믄 인자 새벽부터 인자 시장에 가갖고 돈주머니 만들어갖고 차고, 계란에다가 오뎅, 계란 까서 넣고 어찌고 그런거 하는데 내가 인자 학교에 가서 소문을 냈어요. 후배들한테. 그 아까 말했던 여자회원도 키우겠다, 여자 의식화운동도 하겠다 그랬는데 그 독서 뭐 독 이름들이 그때는 서클들 만든 이름들이 많은디 세월이 흐르다 보니까 잊어븐디. 오래가지 못하고 맨날 깨졌으니까. 내가 또 그다음에 바로 들어가블고 그러는 바람에. 이야기를 했더니 오빠들이 형들이 그때는 형들이 이제 포장마차를 한다 그래가지고 와서 이제 어스름해질 때 되면은 수레가 나오니까 그때 맞춰서 나와갖고 그릇도 씻어주고, 오뎅국물도 해주고 이제 준비들 해줬다고. 그러고 인제 죽어라고 형선이랑 덕희는 주대는데로 받아먹는게 인자 소문듣고 선배나 아는 친구들이 와갖고 한자, 그라믄 인자 매상이 오르니까. 계속 이러고 마시고 새벽에 내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면은 혀가 이라고 돌아가 가지고 형님(술에 취한 목소리로), 그라고 인자 돈보따리 내려놓고 자고, 그런데 하루는 교수들이 와가지고 쓸만한 교수들이 와가지고 다들 민주교육지표랑 관련된 사람들이여. 그사람들이 와가지고 내가 이렇게 막 먹소 막 먹어, 여기서 제일 비싼거 뭔가, 막 먹으라고 그라고 뭐 하다가 그 속 이야기를 하는거야. 이런 상놈의 새끼들이 아니 대학 당국에서 교수들한테 이러이러한데 가면은 이러이러한 놈들이 이런 포장마차를 하니까 학생들 보고 거기 못가게 하라고 지시를 하라고 했다는 거야. 아무리 근다고 새끼들이 학교에서 제적당한놈들이 먹고살라고 한디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고걸 못 가게 해야. 그러고 인제 화가 나갔고 자기는 오기로 왔다고, 먹어먹어 내가 내께. 막인자 그러지 당연히. 그 소리 듣고 바로 쫓아갔어, 그 다음날. 학교로 그래갖고 본관 앞에서 이런 개 상놈의 총장부터 개새끼들 모가지 따븐다고. 이런 개새끼들이 없다고, 그래가지고 인자 악을 쓰고 그랬는데 그 다음에는 뭐가 탄압이 들어오냐면 경찰서에서 우리를 잡아가는 거야 인자 단속을 하는 거야 포장마차를. 거가 인자 우리 위치가 장동 그쪽이라 광산동 경찰서가 가까웠거든 지금 동부경찰서하고. 그게 인제 우리 때문에 다른 포장마차들까지 맨날 끌려가는거야. 그래갖고 인자 그 사람들한테 흘려준거야. 당신들 때문이 아니라 저놈들 때문에 근다. 그 사람들이 인자 우리 욕하는 거야. 개새끼들이 먹고 살라는데 장사 훼방 부린다고 빨갱이새끼들이 인자 그런식으로 같은 포장마차들이 악을 쓰고. 그라고 인제 나중에는 이제 잡아들이는거여. 그라믄 경찰서에 가면은 경찰서에 가면은 경찰서에 지금은 주차장 생긴데 그런데는 놔둬블고 유치장에다 너분거지. 그래갖고 하룻밤 자고 즉심으로 넘기는. 그라믄 직심에서 벌금내면 나오고, 아니면 인자 일주일 이내에 구류생활을 하는 거지. 하 인자 학영이랑 등치 큰 놈들이 인자 경찰 잡으러 오면은 수레에 싣고 뛰면은 컵 떨어지고 그릇 엎어지고 난리, 하루는 아무리 기다려도 안 와. 이놈의 덕희가 들어와야 될 때가 됐는데 자취방 얻어놓고 있을땐데, 아침에 인자 갔더니 그 유치장에 통금위반자들하고 같이 앉을자리 가 앉을자리가 없으니까 빼곡한거여. 서서 하룻밤을 보낸거지. 얼마나 화가 나던지. 이런 절대로 우리 돈 없으니까 돈 벌라고 한놈한테 무슨 벌금이냐고 몸으로 때우자고 우리는 때죽이 많으니까 교대해가면서 계속하다 보면은 나중에 먼저 들어간 또 나오믄 또 들어가고 이렇게돌믄 되니까 야 다른 사람들 오늘 저녁에 시킬테니까 벌금 내지 말고 구류살아브러라고. 예 알았습니다. 근데 구류를 때우는디 계산해보니까 이번놈 더 나가브러. 그 액수가 할 수 없이 벌금 물고 나와브렀는데. 하여간에 그런식으로 긍께 거기서 무슨 큰 돈 벌 생각은 안했지. 왜그러냐면 그렇게라도 해서 버티지 않으면 예를 들어 집에서 이라고 앉었고 하면 한없이 약해지는거거든. 인자 뭔가를 부딪치고 이 독을 내뿜어야 사니까 악으로 사니까 인자 그런 일을 해가지고 또, 포장마차 본전도 못 찾고 넘어가게 됐는데 그때 젤 어려운 것은 다른 포장마차 하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어가지고 우리를 원망하는 거지. 견딜수가 없지 그렇게 되면은. 인자 그렇게 해서 포장마차도 버틴적이 있고.

3-4. 탄압국면 2
구술자: 그 다음에 아 내 두가지 것 이야기 해브러야 마무리가 되는데 하나는 이제 내가 돌아가선데, 민청학련사건 2․15조치로 석방돼서 나왔는데, 구속자들 중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나온 사람들이 있어 재판에 안가고 서울구치소까지 갔다가. 그 사람들이 이제 대표적인 것이 이제 이현택이라는 농대생 친군데, 그 다음에 인제 김윤봉, 지금은 이름을 바꿔서 윤환이라고 윤봉인데, 둘다 농대생이여. 둘다 등사기 이걸 잘 못해갖고 이거 민청학련 이거 보면 다 나오는데, 요 지기집 방 빌려주는 애가 윤봉이여. 아무것도 의식도 없는 주먹쟁인데 여 방 빌려줬다는 것 때문에 서울 구치소에서 여기까지 와 븐거지. 그 다음에 이제 그 이현택이라는 그 윤봉이를 우리한테 소개해준 친구고, 그라고 인자 등사를 처음 해보니까 기름 배합을 잘못해갖고 아물해도 글씨가 잘 안 나오는거여. 글씨가 뚝뚝 끼고 그라고 날새기를 하고 그랬는데 그때 인자 내가 먼저 해볼게. 달려 들어가지고 한번 좀 해봤던 애야. 그 친구도 들어가브렀는데.(웃음) 그라고 인자 서울 구치소에서 기소유예로 나왔는데, 구속되자 학교에서 제적을 해븐거여. 같이. 우리하고 같이. 그런데 인자 2․15조치로 나오는데 75년에. 복학을 해줘야 하는 거야 복적을 이놈들이 학교에서 한해주고 있네. 그래서 내가 학교로 가갔고 이름이 무슨 관식 하여튼 새끼 이름이 생각도 안 나는데 총장이. 총장실 난리가 나브렀지. 나쁜 놈의 새끼들이 없다고. 인제 도대체 형도 확정되기 전에 짤라븐 스승이라는 것들이 도대체 뭐하는 놈들이냐부터 시작해서 아니 죄가 없으니까 기소를 안 한 거 아니냐 그럼 됐지 왜 복적을 안 시켜주냐, 인자 우리가 정보기관에 알아봤더니 정보과애들이 누구누구까지를 제적하라 지시해 본 적이 없다는 거여. 알아서 긴 거지. 그래갖고 사정없이 퍼븟었어 나쁜놈의 새끼들이 없다고. 그 인제 이놈들이 대뜸 복직을 시켜갖고 그 친구들은 졸업을 했다고. 인제 나는 아직도 제적을 제적생이지만 어쨌든 그 학교당국하고 그거하고 부딪힌 일 있었고, 에 그 다음에 내가 아까 이야기를 여기까지 해브러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중에 하나가.
면담자: 현대문화연구소는 언제 만들어진 건가요?
구술자: 아 그것은 두 번째 나오는 이야기여. 두 번째 징역살고 나와서 이야기여
면담자: 구속자협의회는요?
구술자: 구속자협의회는 인자 첫째 나와 갖고 4월 달에 만든거고. 민주회복구속자협의회.
면담자: 카톨릭 농님회 뭐 이런 것도 다.
구술자: 그것은 아니지 그것이 이제 광주지역 전반에 운동하고 연결된 부분인데 함평고구마사건이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의 연결은 두 번째. 갔다 나와서 이야기여. 그것은 다음으로 미루고. 민청학련 사건으로 관련된 부분은 에 그렇게 하고. 4월 달에 그렇게 했고, 그렇게 했고 돈 모은다고 이런다고 뛰어 다니던 거. 그 다음에 인자 당시에 남주가 이 경찰서에 옆 골목에 골목에 카프카서점이라는 걸 열었어요. 카프카 서점. 김남주가 그래가지고 당시에는 사회과학서적이 없을 때라 책장에가 놓여있는게 전부 창비, 신서, 그래가지고 시집들과 전환시대의 논리 등등 인자 그런거 들이겠지. 그래서 그런 책들 놓고 팔고. 긍게 인자 운동권에서는 그 책이라도 보는게 숨을 좀 쉬는 길이었지. 그런데 남주가 원체 장사능력이 없어 노니까 원체 돈하고는 무관한 사람이야. 전생에부터 이미 경제능력이 없는 사람이라, 아부지한테 돈 받아다가 피땀 흘려 번 돈 다 까먹어 버렸지. 망해브렀지. 그란디 거가 인자 카프카서점이 아성이었지 맨날 거기서 장기두고, 인자 나는 인자 그라고 인자 월부책 받을 때 후배들 방에서 장기나 두고 앉어 있고 속없는 새끼들 그랬지. 어쨌든 광주지역에 거 탄압분위기 속에서 그러면서도 꾸준히 학내 서클활동을 해쌀라고 서클들을 여러 개 만들고, 그렇게 해서 고리 나가 븟고.
면담자: 선생님 여기가 75년도까지 이야기죠 이게.
구술자: 그 다음에 이제 기독교 학생 총연맹. 그 부분인데 서울에서 인제 나상기 선생님이 거가 그 뭐야 KSF 기독학생총연맹이라고 그러기 거기 활동을 했었는데, 민청학련관련자야. 나상기도 여기 광주출신이고, 근데 나상기가 와서 부탁을 해가지고 인제 광주에도 기독학생운공을 좀 하고 싶다. 그래서 인제 몇몇 후배들을 거리 Ep 줬지. 그래갖고 인제 광주에 인제 기독학생 총연맹이라는 단체가 생기면서 교회운동이, 학생운동 대학에가 교회운동의 시작계기가 됐고, 하여튼 대학에는 하여튼 여러 갈래의 서클들을 만들어갖고 여학생들도 많이 참여하게 만들고, 그래가지고 후배들을 많이 키워냈지. 클럽활동 하고 옥바라지 꾸준히 하고, 돈 번다고 엄한 짓거리들 많이 하고, 참 그때 비참했지. 클럽활동 하고 옥바라지 꾸준히 하고, 돈 번다고 엄한 짓거리들 많이 하고, 참 그때 비참했지. 정말 비참했지. 비참했고, 아 그 다음에 인제 75년 그 이야기까지 오늘 마무리해야겠구나. 인자 해수욕장 이야기가 나오는데, 8월이 돼 가지고 7월? 탄압 상황이라는 게, 교도소에서 얻은 피부병이 밖에 나와서 병원에 다니면서 아무리해도 안 낫는 거여 이제. 교도소 피부병이 아조 고약한데, 근디 이 자 이게 알아보니까 이 바닷물에 가서 해수욕을 좀 하고. 모래찜질을 하고 좀 그라면 낫는다. 그래서 야, 그럼 가자 그래가지고 뭐 우리가 수영복이 있어 뭐. 그때만 해도 인자 레저 그따위 소리 단어도 모를 땐데, 그 인자 닭 한 마리, 산채로 사서 들고, 솥단지, 냄비, 뻔하지 그때 살림들이. 그라 또 우리 스타일이 그래갖고 뭐 남들이야 보듬 말든 그래갖고 인자 모여드는데. 버스회사에서 형사들한테 연행돼브렀어.

게르만 신화와 바그너,히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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